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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추천(가) 명설교 300편

때가 찼습니다.

by 【고동엽】 2024. 12. 13.

디모데후서 4:3, 전도서3:

새해 덕담을 나눕니다. 세상과 세계,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속에 살고 있는 사람과 모든 것은 유한된 생활을 하고 있기에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은 그 속에서 생명의 근원을 이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조물주의 세계 세상 창조의 첫 시작은 그로 말미암아 진행해 가는 시간 선에서 변화해 가는 공간을 유지하며 시간으로 흘러감을 알게 합니다. 그 주어진 시간위에 우리는 그저 감격하며 살고 있습니다. 조물주의 계획은 일점일획도 유한하지 않습니다.. 창조와 질서는 하나님의 진행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무엇도, 누구도 그를 제한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거기에 지식의 근본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무한하신 진리가 유한된 지식으로는 항상 제한됨을 알게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간이 삶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제한 된 ‘시간과 공간’에 약속이 실현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려면 반드시 ‘시간의 약속’과 ‘공간의 약속’이 지켜져야 합니다. 시간으로는 어느 한정된 시간이 약속되고 공간으로는 어느 한정된 공간이 마련되어야만 그 약속이 지켜지고 만남이 성사 됩니다. 시간의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에다 공간의 장소인 어느 특정한 제한된 장소가 약속되어야 서로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약속도 만남에서만 구원의 역사가 이뤄짐을 알게 합니다. 그러기에 역사의 전 후의 관계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한 시대가 가고 한 시대가 옵니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옵니다.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옵니다. 가고 오고 사이에 중심된 관계가 이어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변화가 따릅니다. 새것의 살아있음이 깃들어야 합니다. 새 하늘의 뜻과 새 땅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사람은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이치를 깨닫게 됩니다. 성서의 지혜 자 들은 이것을 일컬어 범사에 기한(제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때”가 있다고 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말 합니다. 또한 성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니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고 한 지혜 자들의 시간적 감각을 깨닫게 합니다.

   과거가 무엇이며 미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능력을 주신 것에 감격,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라는 오늘은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께 향한 구원의 날 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인의 “오늘”이라는 낱말의 풀이는 ‘오’라는 감탄사에 ‘늘’(항상) 시간 주심에 대한 보답에서 현재인 ‘오늘’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면 새해를 맞는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시간과 공간의 이해를 통해서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2)고 당부한 점에 대하여 유의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은 하늘 가득이 때가 찼습니다. 시간의 크로노스적 이해로 전력의 흐름처럼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이해로 오는 날을 넘기려 합니다. 그러나 처음과 나중의 시간의 카이로스적 이해로 ‘때’에 대한 시간의 수직적 이해를 무시해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음으로 모든 일에 소훌 함이 없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때가 차므로 인한 오늘의 책임은 약속의 실현이며 회개하는 일이 우리의 소임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역대 성서에 나타난 신앙의 선진들이 때가 찼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심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말 많은 세상에 그 말대로 실천하는 모습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언행일치가 되지 못한 채 정치,경제, 문화, 사회가 모두가 거짓말 속에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약속이 흐트러지고 책임소재가 분명하지 못한 현실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로인한 오늘의 사회는 혼돈과 무질서, 총체적 병든 증후군. 신뢰가 망가진 불신에서 오는 갈등, 책임 없는 말만 풍성한 언행불이치가 오늘의 사회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책임은 그 책임소재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때가 찬 시간 선상에서는 약속과 책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딤후 4;3-4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 안에서 돌이켜 나타난 이야기를 쫓는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면 귀가 가려워서 약속이나 책임은 회피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듣기 좋은 소리만 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때가 찼습니다. 때가 차면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를 하면 변화가 옵니다. 변화가 오면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지혜자는 ‘내가 해 아래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 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전3;)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때가 찰 때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메시지가 반드시 따르게 됨을 알게 합니다. 인간은 창조자와 세상과의 관계에 있으며 모든 일에 때가 있어 처음과 나중이 있음을 알게 하고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심판의 가름도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약속의 실현 여부가 때를 따라 이루십니다. 약속과 책임소재가 부재할 때 신뢰는 상실하고 불신풍조가 사회악을 더 만들게 됩니다. 교회는 사회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책임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도 사회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사회의 안정과 통합에 기여하기도 했고 때로는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기도 하였고 반대로 사회변화를 억제하는 보수적인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에서 사회와 유리된 모습으로 그 변화상황에 무관하게 자족하는 신앙공동체만으로 머물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사회를 정화시킬 자정작용(自淨作用)을 하여야 합니다. 오염된 대기나 하천이 침전, 산화작용, 유기물의 분해 등으로 저절로 깨 끝 해지는 작용처럼 교회는 회개하는 마음 밭을 일구도록 기도하며 실천하는 모습을 생활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자정능력을 길러 주어 양심의 바로미터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 전반적인 기상도의 날씨예보나 상황이나 척도의 역할을 감당해가야 합니다. 천기는 살펴 기상예보는 알아 일기예보에 대응해 가듯이 교회도 재앙을 막는 일기예보를 할 수 있어 더 이상 악천후를 막아야 합니다. 지금은 때가 찼습니다. 카이로스적 역사적 결단이 요구 됩니다. 회개하는 교회의 모습이 이 사회에 비추어지면 합니다. 이제는 삶의 양적인 측면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우리의 위치를 냉정하게 뒤돌아보고 삶의 질적인 수준을 향해 살아가도록 오늘의 교회는 기도해야 합니다. 때가 찬 이 시대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새해덕담입니다. 새해! 행복 하세요

출처/배성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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