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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유기성목사 명설교(199편)

십자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능력 롬6:6~8

by 【고동엽】 2024. 11. 22.

십자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능력         롬6:6~8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저는 고등학생 때, 고등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예수님이 모든 믿는 사람 안에 계시다는 설교를 들었다.

 

그것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저는, 모태교인이요, 아버지 목사의 장남으로서

 

어릴 적부터 늘 ‘작은 종’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아직 ‘예수님께서 제 안에 계시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깊이 만날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목사가 되면.. 예수님을 깊이 만날 줄 알았다. 역시 그렇지 않았다.

 

 

십자가란.. 내가 죽고 내 속에 예수님이 사시는 능력이며,

 

내 삶에 예수님 한 분 만이면 충분하며,

 

내 능력이.. 내가 십자가에 죽는 데서 나온다는 등의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는 데는

 

그 때 고등학생 때 처음 말씀을 배운 이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 완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저는 신학생 때,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지 못했다.

 

저는 이 고백의 정확한 의미도 몰랐을 뿐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목회에 실패한 자의 변명처럼 들렸다.

 

 

그 당시 제 마음의 소원은, 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경력, 학력, 영력, 이런 것 열심히 준비해야 되는데,

 

만일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하면서 아무 것도 준비 안 하면,

 

도무지 안 될 것 같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너는 나 한 분이면 충분하다며?’ 하고 아무 것도 안 주시면

 

어떻게 하나? ... 그런 염려가 들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리지 못했고,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거나 믿어지지도 않았다.

 

더욱이 걱정스러운 것은, 괜히 그렇게 고백했다가

 

주님이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나를 인도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 진리를 깨달은 계기

 

저는 1984년 군목 장교훈련을 받던 중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육군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을 때,

 

‘이제 앞으로 평생 다리를 저는 불구자로 살아야 된다’는 선고를 받고서,

 

그날 밤 병실에서 크게 회개하며,

 

주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 체득한 진리가 바로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었다.

 

그날 밤, 수술실에서 나는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수술을 통해서.. 죽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서.. 나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주님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훈련을 계속 시키셨다.

 

지금도 저는 그 훈련을 받고 있다.

 

 

진짜로 내가 죽고, 예수로 다시 살면...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자동적으로 고백하게 되어 있다.

 

내 욕심, 내 야망, 내 명예... 내 자아가 죽을 때, 다 함께 죽었는데,

 

 

 

예수님 말고도, 뭐(세상 축복)가 더 필요하다는 것은,

 

아직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낙심하고 좌절할 때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본다.

 

저는 목사 집안에 목사 아들이었지만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해서 재수를 했었고,

 

어머님은 제가 대학 다닐 때 돌아가셨다.

 

또 군목 훈련받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3년 동안 임관도 못했다.

 

군인 병원에서 대수술을 세 번이나 했었다.

 

 

그리고 제대하고서,

 

어느 교회에서도 저를 써주지 않아서 3개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기도만 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해야 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인가 할 정도로

 

지치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많았다는 말이다.

 

마귀는 오히려 목사인 저를 넘어뜨리려고 더 강하게 역사한 것 같았다.

 

그 때마다 휘청거렸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회복하는 법’을 제게 깨닫게 해주셨다.

 

 

저는 낙심할 때마다 이같이 고백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십자가가 그 증거야.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다 나를 정죄하고 미워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만은 나를 미워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실 리가 없어.”

 

 

그 때마다 회복을 주시고 다시 시작할 힘을 주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것이다.

 

 

낙심하고 좌절할 때도... 나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예수님 한 분>이다.

 

그 분과 거리가 가까운 사람은... 금방 낙심과 좌절을 떨치고 일어선다.

 

 

 

▲내가 완전히 죽었음을 고백할 때까지 왕창 깨뜨리신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죽는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제가 깨달은 것은,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갈2:20 등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6:6, 8

 

 

 

하나님께서는 제 자신(의 죄성, 열등감, 무능함 등)에 대해 절망하게 하시고

 

‘나는 죽었습니다!’라고 선언하게 만드셨다.

 

그 죽음을 경험하도록 이끄셨다.

 

 

결국 “하나님, 유OO은 죽었습니다.” 라며 진심어린 고백이 나오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철저히 우리 자아를 깨뜨리신다.

 

 

 

▲내가 죽으면, 비로소 주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십자가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능력>임을 알게 되면서

 

제 삶과 목회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저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눈을 떴다.

 

예수께서 왜 ‘네가 먼저 죽어야 한다’라고 하시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만나도

 

내 힘으로 발버둥치지 않고,

 

주님의 뜻이라고 깨달으면서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내가 죽었기 때문이다.

 

두려움도 없고,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서도 자유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능력

 

기독교를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나간다고 하는데,

 

그 ‘십자가의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물론 거기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뜻은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된다.

 

 

십자가를 믿는 것이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이며

 

‘내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것이다.

 

 

죽으면 다 끝장인데...  다 끝난 것 같은데...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부활이 뒤따른다.

 

‘나는 죽고, 예수의 능력으로 사는 부활’이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부교역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적용해 보았다.

 

첫째, 그동안 제 힘으로 부교역자들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을 나는 회개했다.

 

예수님께서 부교역자들을 친히 가르치고 이끄신다는 것을

 

제가 온전히 믿지 못했다.

 

 

제가 일일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 결과, 제게도, 부교역자들에게도 서로가 항상 좋지 않았다.

 

이제는 부교역자들도 주님께 맡기게 되었다.

 

제가 가르치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성령님이 친히 저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도록.. 말이다. 요일2:20, 27

 

 

둘째, 제가 부교역자를 능력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을 회개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계속 교역자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저는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지 못했다.

 

목회를 사람의 능력으로 하는 줄 오해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데 고전1:27~29

 

 

그런데 나는 계속 사람의 능력, 유능함, 강한 것을 따지고, 평가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부교역자들에게

 

“사역을 잘하시오. 설교를 잘 하시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사역에서도, 설교에서도

 

그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보여 달라고 하기로 했다.

 

 

그 다음부터 제가, 부교역자들과 관계가 깊어졌다.

 

서로 기도가 깊어졌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진심으로 서로 동역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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