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예식.성만찬 예화모음 14편

by 【고동엽】 2023. 3. 24.

 

목록가기
 
 

 

 

성찬에 관한 예화 모음

▣ 프랑스의 성만찬

백 년전 프랑스 혁명이 진행될 당시, 프랑스 의회에 의해 종교가 폐기되었고 주일은 지킬수가 없게 되었으며, 목사는 숲 속으로 쫓겨났다. 그리하여 아무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예배를 행하거나 참석하지를 못했다. 그렇다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두 그 기간동안 아무런 집회도 가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니다! 때때로 심부름꾼이 집마다 다니면서 모임의 장소를 알리는 비밀 암호를 말해주었다. 그러면 밤중에 모두 같은 장소로 모였다. 그리고 목사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어느 때인가 군인들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일으키시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 것을 믿고 있었다.
/김홍진 예화

▧ 기도: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을 대할 때마다 그 의미를 묵상하는 자 되길 원합니다. 그 속에 담긴 주님의 자기 포기와 순종, 그리고 목숨까지 내어 주신 그 사랑을 본받는 자 되게 하소서.

 

 

 
 
 

 

 



▣ 포로 수용소에서 이루어진 성만찬

1966년 북베트남 상공에서의 공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포로로 잡혀간 미군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모스 부호를 이용해 서로의 이름과 군번을 알아냈으며, 성경 말씀을 상기시켜 주고 가르쳤다. 어느 날 독감방에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왔다. 매일 아침 벽을 타고 들려오는 신호를 익힌 그는 서투른 솜씨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971년 봄, 수용소 당국은 포로 세 명에게 성경을 일주일에 한 시간씩 필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동안 레이는 산상수훈을 넘어 훨씬 더 많은 구절을 베껴 쓸 수 있었다. 레이가 그 소중한 성경 구절을 감방에 갖고 올 때마다 동료들은 벽돌 가루로 만든 잉크와 깃대 펜으로 배급받은 휴지 위에 성경 말씀을 옮겨 적었다. 부활 주일, 탐 커티스 대위는 예배를 소집했다. 누군가 커티스에게 전날 배급에서 떼어놓은 빵 몇 조각을 건넸다. 그리고 소중하게 남겨둔 미역국 잔이 돌려졌다. 커티스가 잔에 대한 말씀을 암송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내 피니라.” 포로들은 자신들의 찢어진 고막, 빠진 손톱에서 흐르는 피, 임시방편으로 둘러싼 붕대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 조용히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불렀다. 커티스가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울음이 터졌다. 극심한 역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 「러빙 갓」/ 찰스 콜슨

 

 

 
 
 

 

 



▣ 죽음의 위협 속에 치러진 성찬식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의회에 의해 종교는 폐지되었고, 주일은 사라져 버렸으며, 성직자는 숲속으로 내쫓겼다. 상황이 이러한지라 아무도 죽음의 형벌을 초래할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은총의 수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때로 심부름꾼이 비밀 암호를 가지고 집집마다 뛰어다녔다. 그는 “검은 습지요”라고 말하고는 인사나 작별도 고하지 않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자정 직후에 사람들은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동네 아래에 있는 습지에 은밀히 모였다. 조심스럽게 빛을 가린 등불을 비추고, 추방당한 목사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언제 갑자기 경보가 울리며 군인들이 그들을 덮치고 사격을 가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육체는 죽임을 당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주님이 오셔서 다시 살리실 것임을 그들은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 「예화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편집부

 

 

 
 
 

 

 



▣ 마음의 자유

보스턴의 교외에 위치한 병원의 목사로 봉사하고 있던 패트 노벡은 어느 여름,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질병으로 입원한 한 환자를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존이라는 60대의 이 남자는 어떤 검사를 해보아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날로 쇠약해졌으며, 벌써 2주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삼킬 수조차 없었다. 간호사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목사의 사무실을 두드렸던 것이다.
패트는 존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던 중 주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시키려 하심을 느꼈다. 존에게 성찬을 받고 싶은지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패트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했다. 그 순간 존이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그럴 수 없어요! 내 죄는 용서받을 수가 없어요!”
패트는 ‘누구든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성찬에 참여하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과 같다’는 바울의 경고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존에게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존은 감사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패트가 기억하기로 존의 고백이 특별히 엄청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죄는 존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존은 회개하고 흐느꼈으며, 패트는 그를 껴안으며 그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함께 성찬을 나누었다. 패트는 고린도전서 11장을 인용하면서 엄숙하게 성찬 예식을 거행했다. 존은 빵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받아 마셨다. 그는 이미 자유로워졌다. 3일 만에 존은 병원을 자기 발로 걸어서 나갔다.
- 「이것이 교회다」/ 찰스 콜슨

* 묵상: ● 바울은 성만찬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합당하게 시행토록 권면합니다. 성만찬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 성만찬과 같은 영적 활동도 오용되면 도리어 해가 됩니다. 우리의 영적 활동은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 기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 제 삶이 먼저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인지를 돌아봅니다. 말씀에 따른 삶으로 인해 주님의 성찬을 감사와 기쁨으로 대하는 자 되게 하소서.
/생명의 삶

 

 

 
 
 

 

 



▣ 성찬의 뜻

1972년 10월 3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떠난 전세 비행기 안에는 15명의 아마추어 럭비 선수들과 응원단으로 따라가는 친구 25명과 승무원 5명, 합해서 4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천기(天氣)가 너무 좋지 못해서 안데스 산맥에 아무런 식량도 없이 동체 착륙을 하고 말았습니다.
바깥에는 모든 것이 다 얼어붙은 상태였습니다. 45명이 67일 간의 사투(死鬪) 끝에 살아서 구출된 사람은 16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고 연명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시체가 부패되지 않고 그대로 얼어버렸기 때문에 꽁꽁 언 시체를 조금씩 뜯어먹으면서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생존자 중 호세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예배와 성만찬(聖晩餐)에 빠지지 않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학생시절에 교회에 한 주일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의 집에는 살지를 않았습니다. 신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 신앙이 없었습니다. 저는 눈 덮인 산에서 죽음과 싸우며 비로소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성찬(聖餐)에 참여했으나 기계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든 것뿐이며 그 뜻이 내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 죽은 친구의 살 조각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이며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 주님께 대한 봉사

론펠공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식 때 썼던 금잔을 찾아내어 교회에 봉헌하기로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가 막 성문을 나서는데 한 문둥이가 달려나와 구걸을 하였다. 그는 기분이 상하여 "나는 하나님의 명으로 주님의 금잔을 찾으려고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너처럼 더러운 것이 어찌 나를 괴롭히느냐."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급히 지나쳤다. 그 후 그는 생사를 걸고 금잔을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막 성에 들어서는데 또 문둥이가 달려와서 구걸하였다. 론펠공은 오랜 가난신고가 그를 부드럽게 만들어 긍휼의 정신이 그의 가슴속에 일어났다. 그는 그의 전 재산인 빵 한 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빵밖에 없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걸 받게." 그리고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은혜로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이걸 마시게."
이때 갑작스레 문둥이가 주님으로 바뀌면서 "보라, 나다. 그 빵은 찢기운 내 몸이며 그 물은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참 성찬이다. 네가 찾던 잔은 네 손에 든 표주박이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웃에 대한 봉사가 곧 주님에 대한 봉사임을 알자.

 

 

 
 
 

 

 



▣ 편견

한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 부부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성찬시간에조차 이런 행동이 계속됐다. 성찬을 받기 위해 강단 앞으로 나올 때도 손을 잡고 나왔을 뿐 아니라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도 남편이 떡과 포도주를 부인의 입에 넣어주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보며 민망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 중 아내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목사님이 장례식에 참석해 위로해주었다. 그 남편은 그간의 사정을 목사님께 말씀드렸다. 놀랍게도 이 부부는 둘 다 시력에 문제가 있었다. 특히 아내의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성찬식에서조차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치의 편견은 6백만의 유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크진 않더라도 우리 이웃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수많은 편견이 목격된다. 크든 작든 주관적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편견은 매우 잔인한 것이 될 수 있다

 

 

 
 
 

 

 



▣ 교회의 성례들

교회에는 여러 거룩한 예식(성례)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7가지의 예식을 성례라고 부른다. 세례 성체(성찬) 견진(堅振) 고백 병자 신품(神品) 혼인 등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행한다.

(1) 세례식
세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성례적 견해(sacramental view)가 있다. 로마가톨릭과 루터교에서 이 견해에 따르는데 세례를 통하여 실제로 죄가 용서된다고 믿는다. 루터교의 차이점은 세례받는 자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물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

둘째 언약적 견해(covenantal view)가 있다. 세례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믿고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에게도 행한다. 유아세례의 근거가 바로 이 언약적 견해에 있다.

셋째 상징적 견해(symbolic view)이다. 세례가 죄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 씻김의 상징으로 본다. 즉,순종과 헌신의 상징으로 세례를 행한다. 대부분 개신교의 견해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장로교에서 유아세례를 주는 것은 언약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침례교에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약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성찬식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3∼26)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찬식을 행한다. 1년에 적어도 2차례(부활절과 추수감사절) 행한다. 여기서 기념한다는 말의 히브리어 개념은 단순히 기념하거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2000년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으로도 일어나며 거기에 성도들이 믿음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성도들은 더 큰 은혜를 받는다.

 


그러면 성찬의 의미는 무엇인가? 천주교에서는 포도주와 떡(원문의 뜻은 빵)이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화체설(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다.
루터교에서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고 함께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성체공존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상징적 기념설(symbolic memorial)을 주장한다.
/신성종 목사 <대전 월평동산교회>

 

 

 
 
 

 

 



▣ 어느 장로님의 용서

한 장로님이 평소에 자신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성도와 함께 이웃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성만찬의 순서가 있었습니다. 장로님과 그 성도는 주님의 몸과 피를 서로 나누면서 각각 떨어져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에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왜 같이 오신 성도님과 함께 성만찬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와 돈 거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정직하지 않았고 약속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상대하기도 싫기 때문에 떨어져 앉았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장로님은 자신이 우리 주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 주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앉아서 만찬을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들은 장로님은 다시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돈 거래에서 그가 딱 한 번 실수를 했던 것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자신과 차별을 두는 것은 자신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장로님은 그 성도와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가까이 앉아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 사람을 살립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린다. 그럴 수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거나 화장한 뒤 납골당에 모신다. 때로는 고인의 유언을 받들어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기도 한다. 언젠가 시신을 기증한 고인의 유족들과 함께 추모예배에 참석해 새로운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 의학도들은 기증된 시신으로 실험도 하고, 질병을 퇴치하는 묘방도 찾아낸다. 그들이 시신을 기증한 고인의 뜻에 감사하면서 줄 지어 분향을 할때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한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구나. 말없이 몸으로….’
죽은 자도 산 자를 살리 수 있는데, 산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일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살아 있으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살리신다. 그러기에 성만찬에서 떡을 떼고 잔을 들어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라’고 하셨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우리, 살아있는 자들이여, 사람을 살립시다. 세상을 살립시다. 자연을 살립시다.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 부활절 성찬

김미자 집사의 남편은 말기 위암이었다. 암세포가 임파선까지 전이돼 의학적 치료는 끝난 채 임종만 기다렸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 두려웠다. 진통이 찾아올 때는 더욱 두려웠다. 그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김 집사가 부활절 성찬예배에 참석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자기 몫의 성찬을 챙겼다. 떡은 손수건에 싸고, 포도주는 작은 병에 담았다. 성찬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 고통 속에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남편에게 성찬을 내밀었다.
“여보, 오늘 부활절 성찬입니다. 당신을 위해 내 몫을 받아왔어요. 이 떡은 십자가에서 살을 찢어 영생하라고 주신 주님의 몸이고, 이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대신 고통당하신 주님의 피랍니다.” 남편은 아내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성찬을 받았다. 기적이었다. 평안이 오고 고통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김 집사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감사하고 죄송해요. 성찬은 그렇게 받는 것 아닐 텐데요.”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 점심 사랑

내가 처음 예수믿을 때,교회 공동 작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몸이 약해 직장생활을 못했기에 시간이 있었고,교사나 성가대로 봉사하기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다른 교인들이 힘든 노동작업을 할 때,나는 화장실 청소를 도맡았다. 작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수제비를 끓여 나눠먹었다. 그러나 나는 밀가루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젊은 여집사님이 수제비 한 그릇을 들고 왕복 10분 거리의 자기 집에 가서 남편이 들 쌀밥과 바꿔왔다.
“고 선생은 몸이 약해 수제비 못 먹으니 당신이 수제비를 드세요. 당신 밥은 고 선생 드립시다.”

 


여집사의 청을 받아들인 그 남편의 쌀밥 한 그릇은 밥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성찬이었다. 나는 그 사랑으로 목사가 됐다. 세상 어디에도 그 밥보다 더 큰 사랑의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런 맛을 느낀 적도 없다. 우리 교인들이 힘쓰고 있는 무료급식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때 밥 한 그릇 진 빚을 갚고 있는 것이다.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 예배의 소중함을 알자

본문: 시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이 늘 기쁘십니까? 이삭 목사의 간증을 들어 보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80년대 말경 구 소련의 어느 도시에서 이삭 목사는 한 비밀 예배처를 탐방할 기회를 얻었다고 합니다. 예배처에 가보니 예배를 드리기 전부터 성경 통독을 하면서 울던 성도들은 예배가 시작되어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낡은 풍금으로 반주를 하는 단 몇 명뿐인 성가대의 송영도 울음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고 회중의 찬송 소리에도 울음이 섞였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성찬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그렇게 울면서 예배를 드린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 그것이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사람이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어느날 갑자기 KGB에 잡혀가서 20년 혹은 3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우리는 고난 속에서 목숨을 걸고 감격적으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집니까?
[기도]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 성찬에 관한 성경 말씀

0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 26- 28)
0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14:22- 25)
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3- 58)
0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 23- 29)

 

 

 
 
 

 

 

'〓주제별 설교〓 > 설교.자료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염려 예화모음 82편  (0) 2023.04.07
애통 예화모음 48편  (0) 2023.03.24
애국 예화모음 19편  (0) 2023.03.24
열들감 예화모음 17편  (0) 2023.03.24
예술 예화모음 19편  (0) 2023.03.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