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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헌신설교 36편

대야와 수건 1 요13:12~20, 막8:34

by 【고동엽】 2023. 3. 24.

대야와 수건 1           요13:12~20, 막8:34         

 

◑도입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혐오스러운 물건이었습니다.

오늘날 더 이상 십자가형이 행해지지 않고 있어서,

우리는 그들이 느꼈던 혐오감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 혐오감을 어느 정도 상상해 보기 위해 상징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고 교수형을 당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는 예배당 중앙에, 밧줄이 동그랗게 매어진 형상을 내걸었을 것입니다.

 

이 상징물을 보게 하고는, “이 교수대(gallows)가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교수대가 우리의 희망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칩시다.

아마도 충격 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여러분,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매일 이 교수대에 우리의 목을 겁시다.”라고 설교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떠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시대 사람들이, “십자가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라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의 기분이 이와 동일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매일 예수님을 따르십시오.”라는 말을 들을 때는

더더욱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교수대보다도 더 끔직스럽고 공포스러운 처형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초대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여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서게 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중 하나에 속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공포스러운 상징물을 내세운 종교가,

그토록 급속하게 사람들을 끌어들였을까요?

 

이렇듯, 십자가는 참으로 강력한 상징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류의 구원자가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듣는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줍니다.

 

감정적인 충격만이 아니라 지적인 충격(intellectual shock)도 안겨 줍니다.

“왜?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회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 충격이 결국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

그 깨달음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앎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됩니다.

 

▲십자가의 상징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동시에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죽기까지 섬기는 삶을 살라’는 십자가의 메시지가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 크게 들립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는 목사님, 선교사님들이나 지십시오.

우리는 그 뒤나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말씀은

일상 생활 속에서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희생하고 섬기는 길을 택하라는 뜻인데,

많은 사람들은 처절하고 장렬한 순교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본다면, ‘대야와 수건’(설교 제목)은 아주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입니다.

왜, 기독교회가 이 상징을 소홀히 했는지, 생각해 볼수록 아쉬움이 많습니다...

 

◑대야와 수건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 위해 사용했던 대야와 수건은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전하는 상징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보다 훨씬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친근해 보입니다.

 

십자가는 한 번 지고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만,

대야와 수건은 매일같이 필요한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에,

대야와 수건은 안성맞춤입니다.

 

▲본문(요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으신 예수님은 다시 당신의 자리로 돌아오십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던진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의미로 풀어 번역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무슨 뜻으로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는지 알겠느냐?

이 행동을 통해 내가 너희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여러분은 알 것 같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평소에 ‘주인님 lord’ 또는 ‘선생님 master’이라고 불렀습니다.

노예 제도가 있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누구에겐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주인님이 죽으라면,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 자원하여 예수님의 종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존경하고 끔찍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높이 존경해 마지 않던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친히 허리에 두르고 대야를 가져다가

스스로 종이 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노예가 주인의 발을 씻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노예의 발을 씻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학생이 스승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스승이 학생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계급과 신분과 배운 것과 가진 것에 따라서

사람을 달리 취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분 상승’의 욕구를 불태우는 곳이 아니라,

‘낮아짐의 미덕’이 역사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4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대야와 수건’은 십자가의 도를 매일 실천하기에 아주 좋은 방식입니다.

 

◑흑백논리로 십자가의 도를 빠져나가는 현대인들

 

‘흑백논리’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하얀 색과 까만 색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펼치는 논리입니다.

 

하얀 색과 까만 색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색깔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건 하얀색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대뜸 “그럼, 까만색이란 말입니까?”라고 답합니다.

 

정신과 의사 고든 리빙스턴은 그의 책에서,

환자들과 상담하는 가운데 이런 흑백논리식의 대답을 자주 듣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녀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가운데,

“너무 엄하게 하지 말고 어느 정도 시행착오할 수 있는 여유를 줘 보십시오”라고 조언하면,

“그럼, 아이가 망나니가 되도록 내버려 두란 말입니까?”라고 응수한다는 겁니다.

 

아이를 질식시킬 정도로 규제하고 억압하는 것과, 망나니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 사이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중간의 입장을 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없다고.. 일부 사람들은 흑백으로만 생각합니다.

 

혹시 내가 그렇게 하지는 않는지, 늘 기도하며, 고민하며, 판단하고,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아이를 억압하지 않고, 그냥 완전히 손을 떼고 내버려 두는 일은 매우 쉽습니다.

고민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 극단 중 하나를 택하려고만 합니다.

그냥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이 흑백논리와 고통스러운 씨름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2002년에 <사귐의 기도> 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하루 하루, 순간 순간, 하나님과의 사귐을 더 깊게 하여,

무의미하고 답답할 수 있는 일상 생활을 변화시키자는 제안을 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몇몇 독자들이 이렇게 응답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나보고 수도사가 되라는 말입니까?”

 

이 말은, “나는 수도사가 될 수 없으니 그냥 세속에 빠져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이분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두 가지의 극단,

즉 세속을 완전히 등지고 수도사가 되거나,

눈 질끈 감고 세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장 통의 수도자’로 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려면, 매일 매일 고민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반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는 겁니다.

이 때 흑백논리는, 그 요청을 회피하는 좋은 방편이 됩니다.

 

그 후 2004년에 제가 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책이 출판되었을 때는 더 심했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서 한국 교회에서는 소위 ‘청부론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독자들이,

“그럼, 가진 것 다 나누어주고 거지가 되란 말입니까?”라고 반문했었습니다.

 

이분들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의 극단,

즉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나 아시시의 프랜시스처럼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도날드 트럼프나 패리스 힐튼처럼,

그냥 눈 질끈 감고, 아무 생각 없이 돈 벌고,

한도 끝도 없이 쌓아 두고 부를 누리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두 극단 사이에는 수 십 가지의 대안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기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반성하다 보면,

우리는 책임 있고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이렇게 흑백논리로써 복음의 요청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흑백논리) 식으로 답합니다.

“그럼, 나보고 가족도, 직업도 모두 팽개치고 순교하라는 말입니까?

아,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아 보십시오.

아니면, 제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혹시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나의 ‘대야와 수건’은 무엇입니까?

 

그에 반하여, ‘대야와 수건’은 흑백논리를 사용하여

교묘하게 복음의 요청을 피하려는 의도를 무력화시킵니다.

 

대야와 수건을 항상 준비해 두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요청하시는 것은

그 대야와 수건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언제라도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발을 씻어 주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면 별로 어렵지 않게, 영웅적인 용기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요청 앞에서, “그럼나보고 노예가 되라는 말이냐?”,

흑백논리를 사용하여 복음의 요청을 회피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참으로 희망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요청은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되라는 말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원해서 되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 5:13).

 

▲대야와 수건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를 상징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이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력’이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이,

 

어떤 사람에게는 ‘재능’이,

어떤 사람에게는 ‘기술’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능력’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하는 능력’이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받은 상처와 아픔까지도

다른 사람을 돕는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습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 고통을 견뎌야 하는 환자들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의 수녀회”라는 것을 창설했습니다.

그들이 받는 육신적인 고통을 대야와 수건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해 중보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나,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이웃을 위한 ‘대야와 수건’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러셨듯,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대야와 수건’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라고 요청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에 ‘나 홀로’라는 말은 없습니다. 대신 ‘서로, 함께’라는 말만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홀로’라는 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선 그런 뜻이 아니죠.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만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나 홀로’가 없습니다. ‘서로, 함께’만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 홀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끝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 홀로’ 복 받고 잘 살아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가올 징벌로부터 ‘나 홀로’ 구원받아 천국 가자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나 홀로’ 독야청청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고, 참된 축복을 받고,

몸과 혼과 영이 모두 거룩하게 보전되어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한 면이지만,

그것(나 홀로)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내게 있는 ‘대야와 수건’으로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이 차원이 없다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반쪽에 불과합니다.

반쪽 신앙은 엄밀하게 말해서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은혜로운 교회는 서로를 위해 섬기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이고,

은혜롭지 않은 교회는 섬긴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을 휘두르려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번의 예배가 은혜를 끼칠만한 것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지요!

 

지금 이 시간에도 예배당 곳곳에서 ‘대야와 수건’을 들고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력이 없이는 결코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훌륭한 교회 학교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일들을 서로 맡아 해야 하는지요!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 교회가 이만큼이라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말, 예배당 곳곳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봉사하고 섬기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겁습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서로 자신의 은사를 따라,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겸손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가, 일부 교인들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다수 교인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다 제각기 자기의 필요와 욕심을 위해 아우성치는 곳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위해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 없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시고, 일을 마치고는,

“저는 다만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고 물러앉을 수 있는 분들이

진실로 성숙한 성도이십니다.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한국이나 미국이나, 교회에는, 최소한의 희생과 섬김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지고, 그런 분들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유익을 얻어가는 것을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은행이나 시장에서 하는 것인데, 교회에서조차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친구들과 같이 예배 드리다가 헌금을 드릴 기회를 놓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친구 하나가, “야, 오늘, 돈 굳었네.”라고 농담을 했고,

우리 모두는 마치 일확천금한 것처럼 회심의 미소로 응답했습니다.

 

그 때 저희는 몰랐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돈이 내 손에 남겨진 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아니라 손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내 손에 틀어쥐고 있는 것은, 실은 잃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어놓는 것이 실은 진실로 얻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차원에서 보면,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것은

손해 보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자신을 높여 섬김을 받으려는 태도가 오히려 손해 보는 일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아직 헌신하지 못하고 은혜만 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물론, 믿음이 연약하여 섬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생활 환경 때문에 도저히 봉사할 수 없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께서는 더 열심히 은혜를 구하셔서, 성장하시고 회복하시고 강건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믿어, 속 사람이 자라가고 있는 분들이라면, 한 걸음 도약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희생하는 만큼 얻는 것이며, 주는만큼 받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며,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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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소리가 전체 밀림을 변화시킨다

(작은 봉사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여러분, 아프리카 밀림에서,

쩌렁쩌렁하는 사자 울음소리와 삐릭삐릭 하는 풀벌레 울음소리..

이 둘 중에 누구 소리가 더 클까?

 

풀벌레 울음소리가 더 크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사자 울음소리가 울리는 반경은.. 어림잡아 1킬로라고 하자.

그런데 삐릭삐릭 하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미치는 범위는.. 반경 10 미터도 안 된다.

 

그런데 풀벌레들의 특징은, 한 벌레가 울면, 다른 벌레가 따라서 우는 것이다.

그래서 한 풀벌레만 울면, 여기저기서 풀벌레들이 따라 운다.

밤새도록, 그래서 풀벌레 울음소리는, 전체 밀림을 가득 뒤덮는다.

한 마리 풀벌레 울음소리가.. 전체 밀림의 풀벌레 울음소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그 풀벌레가 이제 그만 울고 쉬려고 해도,

그 때는 다른 풀벌레가 우니까, 또 따라서 울게 된다.

이렇게 풀벌레는, 매우 작은 곤충이지만, 전체 밀림을 밤새 일깨운다는 것이다.

 

▲섬기되.. ‘자기 의’는 거두십시오.

 

1)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에 대하여, 자기 의가 있지요?

‘내가 너를 낳았다. 이 놈 자식아, 나를 이렇게 네가 힘들게 할 수가 있냐?

내가 얼마나 너를 고생하면서 낳았는데..’

 

특히 어머님들, ‘얼마나 배가 아픈 줄 아느냐, 별이 보였다.

근데 공부도 안하고, 이 놈 자식아’ 하면서, 희생했다. 희생했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희생했는지 아느냐?

 

2) 부부사이에서도 자기 의가 다 있죠.

여자분은 ‘내가 당신 만나서, 미스터 김, 미스터 박, 다 포기하고, 내가 진짜 실망했다.’ 그런 말.

이렇게 부부사이에서도 자기 의가 있어요.

 

남자는 그래도, ‘내가 돈벌어주고, 내가 진짜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손님 막 접대하느라고 힘든데,

당신은 이렇게 안 알아 주는 거냐?’

이렇게 부부관계에서 자기 의가 얼마나 많은지요.

 

3) 뭐 교회에서, 참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그래도 내가 담임으로 개척해서, 일구었다 이런 마음, 가질 수 있겠죠?

 

또 ‘나는 이렇게 교회에서 봉사했는데, 나는 이만큼 뭔가를 했는데, 나는 그래도 이런 공로가 있는데’,

이런 게 얼마나 많아요, 우리 안에. 뭐 겉으로는 표현 안 해도 깊은 마음 안에,

‘난 그래도 이렇게 희생했는데, 나는 뭔가 최선을 다했는데..’

이런 자기 스스로, 나는 뭐를 했다고 하는, 공로주의. 이게 자기 의의 대명사이구요.

 

4) 또 하나 대표적인 대명사는, ‘내가 누구다’라고 하는 신분입니다.

나는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집사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 집사인데요’, 보통은 집사 이야기하면, 긁적거려요,

 

이렇게 나이롱인데, 이렇게 말하는데,

그래도 난 권산데, 이렇게. 나는 장론데. 나는 교역잔데. 담임목산데.

또는 뭐 세상적으로 학교 출신. 나는 SKY대 출신인데.

나는 그래도 이런 지위가 있는데. 이런 신분의식!,

 

5) 어저께 영적 교만함 이야기 했는데요. 경건한 영역에서도, 본인의 자기 의가 있죠.

‘나는 이렇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인데..’

‘나는 이렇게 설교를 잘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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