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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와 건설의 의미 :렘 1 : 4 ∼ 10

by 【고동엽】 2023.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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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파괴와 건설의 의미
본 문 :예레미야 1 : 4 ∼ 10절
서울 특별히 강남에서 많이 듣게 되는, 옛날에 못 듣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재개발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동
산 업계에 아주 중요하게 대두된 사건입니다. 재개발, 아주 뜻있는 얘깁니다. 분명히 몇 십 년 전 낡은 집입니다마는 재
개발 지구가 되면 비싼 값에 팔립니다. 왜요? 멀쩡한 집이지만 이제 곳 헐어 버릴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에 현대
식 건물이 거기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멀쩡한 집이지만 아깝지 않게 헐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세웁니다.
재개발, 이거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주후 410년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영원히 건재하고, 그 영광이 영원
할 것이라고 여겼던 대 로마제국이 만족, 야만인족인 서고트족에 의해서 로마가 무너지게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
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로마가 이 로마의 화려한 이 로마의 도성이 어찌 저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벌거벗고 다니는 야
만족에 의해서 이 로마성이 무너질 수 있단 말입니까? 고민을 하게 됩니다. 화려했던 로마의 영광이 역사 뒤안길로 사
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큰 번민에 빠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신앙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어
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깊은 고민 끝에 그는 마음이 열리고, 영적인 세계를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세워
놓은 세상나라가 무너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시티 오브 가드(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책을 저술하게 됩니다. 세상나라는 역사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다…… 이 영광을 그는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파괴와 건설,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종종 파괴 없는 건설, 계속적
으로 발전하고, 계속적으로 흥왕하고, 그렇게 되기만 바라죠. 그런 일들이 있기만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는 그렇
지 않았습니다. 파괴가 있고 건설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흥망성쇠로 전철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나
라가 없습니다. 영원한 승자가 없습니다. 그 화려했던 영광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까? 건설,
그 뒤에는 그보다 먼저 무서운 파괴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에 총 주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엔 메시지가 있고,
테마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일칭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도성 예루살렘, 회계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을 행해서 너는 가서 외쳐라! 망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망할 것이다. 회계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외쳐라, 창자
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보면서 하나님
의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회계하지 않는 백성을 보면서 그 앞에 있는 멸망을 환히 즉시 하면서 그는 고통에 시달려
야 했습니다. 결국은 예루살렘은 망했고, 그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까지, 하나님의 성전까지 불타 버리고 맙니다. 이 엄
청난 사건을 그는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 파괴가 없이, 이 무서운 멸망이 없이, 아름답고 귀하게 밝은 미래가 있어지기
를 바랬습니다마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갔습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속에
더 괴로웠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 받는데, 어째서 하나님의 모르는 느부갓네살 왕, 잔인하기 이를 때 없는 악한
왕을 통해서 이루시느냐는 거죠. 왜 악한 왕에게 승리를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멸망케 하십니까? 성경은 말합니
다. 느부갓네살 왕을 막대기로 사용했다고, 눈앞에는 느부갓네살이 나타납니다마는 그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
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너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영광!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예레미야는 보아야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어찌하여 이런 길로 멸망이 있는 것입니까? 파괴와 건설! 뽑으
시는 하나님과 심으시는 하나님! 헐어버리는 하나님!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그는 전해야 했고, 믿어야 했고, 몸
으로 경험해야 했구요. 본인 자신도 애굽으로 끌려갔고, 돌에 맞아 죽는 비참한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이사야서 59장
1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하나님의 귀가 둔해서 듣지 못하심도 아니
라”고…… 하나님과 너희 사이에 죄가 있느니라, 죄로 인해서 망한다. 죄로 인해서 심판은 있고, 파괴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이 저희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이렇게 예레미야는 눈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
복음 2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46년 동안 지었다고 하는 화려한 헤롯성전, 그 영광된 성전을 앞에 놓
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사흘 안에 일으키리라.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 했는데 정말로 40년 후에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2000년 동안 아직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성벽 하나가 남아있
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경건한 백성들은 그 벽 앞에 와서 통곡을 합니다.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 그 옛날에 솔로몬
성전을 생각을 하며 눈물을 뿌립니다. 이래서 “통곡의 벽” 이라고 말합니다. 헐어버리라! 하나님이 헐어버렸습니다. 그
러나 여러분, 이 놀라운 역사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로마 사람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렸습니다. 다 헐어버
렸습니다. 왜 헐어버렸습니까?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나서 신령
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리고, 보이는 성전은 헐어버리고, 보이지 않는 기독교회를 세워서 오늘
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속된 것을 헐어버리고 신령한 것을 세우고 교만한 것을 세워버리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주시
고, 세상적인 것을 헐어버리고,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세워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한평생 역
사를 연구한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를 아십니다. 토인비의 ‘미래를 산다’하는 책 속에서 그는 한평생 역사를 연구하고
12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을 기록한 그분이 말입니다. 이제 말합니다. 역사를 자세히 보면 첫째, 사람의 뜻대로는 안 되
더라. – 사람이 똑똑한 척하고 뭐 어쩌구 어쩌구 영구할 것이다, 번영할 것이다, 지속, 중단 없는 발전……별소리를 다
해도 안됩니다. 뭐 컴퓨터에다가 뭐… 그렇게 똑똑하면 왜 망합니까? 나는 가끔 차타고 다닐 때마다 방송에 나오는걸
보니까 어느 증권회사 소개하면서 “뭐 전문가들이 해서 틀림없습니다.” ‘틀림없으면 자기가 하지 왜 우리보고 하라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미국에 911사건이 터졌을 때, 그 똑똑한 사람들 그 많은 전문가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쾅! 하고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거죠. 파괴! 파괴가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뜻대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믿어볼게 못됩니다. 둘째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더라.
– 흥망성쇠! 하나님 마음대로더라. 하나님이 생각하신 대로, 기준대로 하시더라! 세 번째는 사람들은 미처 모르고 있지
마는 현실 속에는 작으나 크나 거기에 의미가 있다. – 흥망성쇠! 망하고, 흥하고, 살고, 죽고…… 많은 사건 속에 겸손히
받아들이면 그 속에 메시지가 있어요, 말씀이 있더라, 그런고로 사건에는 우연은 없다. 필연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역사 연구의 결론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그래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계획성도 있고, 목적도 있고, 뜻이 있습니다.
반드시, 있을 일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얼마나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냐가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그 속
에 있는 의미를 듣느냐, 아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고저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같은 방향에서 내가 이
제부터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은 파괴하고 건설하시는 역사의 중심적이요, 대표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뽑고, 심으
십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어떻게 보십니까?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내가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내가 행동하고, 내가 깨닫고, 내가 결심하고, 내가 고치고, 내가 자기 부정을 해야겠지만, 천만에요. 우리
의 신비로운 경험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십자가가 나를 죽입니다. 내가 혼자 회개하면 내 스스로
뉘우치면 회개요, 하나님이 나를 뉘우치게 하면 회개할 수밖에 없도록 강권적으로 역사하면 그건 십자가가 나를 심판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나는 죽어집니다. 아니, 죽어야 합니다. 현저하게 나 자신이 죽어야 비로소, 내 안
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삶이 다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
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어요. 오늘도 십자가를 쳐다 볼 때마다 그 앞
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지고 있어요. 아니, 이미 죽어버렸어요. 이것이 그리스인입니다. 갈라디아 5장 24절에서
말합니다. “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 끈끈한 정, 죽여 버려. 그 많은 욕심, 깨끗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그때부터 자유인이 됩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문제가 있다면 끊을 걸 못 끊었어요. 버릴걸 못버렸어요. 아직도 덜 죽었어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근데 단, 함께
죽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리는 그의 유명한 기독교 강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앙생
활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딱 두 마디로 요약이 된다. 하나는 계속적인 자기 부정이다. 자기를 부정 해야 돼요. 두 번째
는, 순례의 길이다. 이 세상 사는거 오래할 곳 아니다. 곧 떠날 곳이다. 멀어지는 세상 아쉬워하지 말고, 순례자는 목적
한 바가 있다. 목적한 최종 목적지를 향해서 묵묵히 가야한다. 순례적인 생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말하
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심판적 요소를 가졌습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합니다. 우리가 흔
히 말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옛사람이 죽는 거죠. 중생이 무엇입니까? 성령 안에서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에요.
성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변화되는 나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깨끗하게 옛사
람이 청산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전에 좋아하는 것, 내가 전에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이제는 분토와 같이 여기고 해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하기 때문에 이 모
든 것을 싹 지워버리고 산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깊은 산속에 두 마리의 두루미와 한 마리의 거북이가 셋이서 사이좋게 오랫동안 살았답니다. 연못가에서. 그런데,
그만 오랫동안 가뭄이 와서 깨끗이 말라버려서 물을 마실 수가 없게 됐어요. 목말라 죽게 될 때, 기러기가 높이 날아서
멀리 가보니까 산 세 개를 넘어가면 저쪽에 큰 호수가 있어요. 그걸 알고 돌아와서,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마는 우리는 목이 말라서 할 수 없이 저리로 갈란다. 너를 두고 가서 미안하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느냐?” 말했어요. 거
북이가 “하루만 시간을 달라” 고 하고는 깊이 연구하고, 깊이 궁리한 다음에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입에 물고 왔어
요. 나무막대기 하나 물고 와서 “내가 가운데를 딱 물고 있을 테니까 너희가 양쪽을 붙들고 날아라. 나는 날개가 없지
만 너희가 나는 동안에 나도 하늘을 날아서 그 큰 호수가 있는 곳으로 가련다, 너희와 함께 살련다.” 그거 참 좋은 생각
이라고 정말 그렇게 했더니…… 이 거북이 하나를 가운데 두고 두 기러기가 높이 날았어요. 이런 신기할 때가 없어요.
날아가면서 기러기가 말했죠. “야∼ 어떻게 요런 생각을 했냐? 참! 넌 천재다. 참 기가 막히다.” 그러니깐, 거북이가 말
을 할 수 없으니깐 어깨로 으쓱∼으쓱∼ 하면서 좋아 했더랍니다. 이제 산을 3개 넘어 가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쳐다보
고 거북이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야∼ 신가하다.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참 신기하다. 누가 저런 생각을 했
을까?” 하고들 말을 했더랍니다. 거북이가 참다못해서 “내가 했지” 입을 열었더니, 그만 떨어져가지고 깨져서 죽었답
니다. 여러분, “내가 했지” 그것이 문제라니깐요, 그것이 없어야 되는데……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문제라니까요. 이것
때문에 문제예요.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여지없이 파괴하십니다. 파괴하고 건설하십니다. 파괴를 위한 파괴가 심판입
니다. 건설을 위한 파괴일 때는 파괴 자체도 축복입니다.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뼈아프고 어려운 경험을 했습니다.
53년 전에 6.25가 있었구요.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중동에 이라크에 전쟁에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몇 백명, 몇 십명 그런 얘기를 듣고 ‘이건 뭐 전쟁도 아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백 오십만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
든 땅이 다 초토화됐습니다. 옛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깨끗하게 다 파괴됐습니다. 엄청난 파괴가 있었습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파괴가 있었습니까마는……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뼈아
픈 경험이지만은, 그 파괴가 있어서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그 6.25 가 아니었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
다. 틀림없이 우리는 공산화되고 말았을 겁니다. 이 엄청난 파괴로 인해서 우리는 이만큼의 건설이 이루어지고, 이만
큼의 자유세상에서 살게 된 겁니다. 그걸 잊지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이 파괴하십니다. 무엇을 파괴하는가? 우상과 교만
과 허상과 잘못된 이데올로기와 인간에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파괴하시고 새롭게 건설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이루십니다. 오늘도 파괴 없는 건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부득이 이러해야한다는 것이 우리의 아픔입니
다. 파괴하시고 또 세우시는 하나님, 뽑으시고 새롭게 심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주 앞에 그 거룩한 역사를 바
로 수용하고 주의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 엄청난 파괴 속에서도 세우시고, 엄청난 손해를 지불했으나 또 더 큰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파괴를 맞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습니다. 무너뜨리고, 세우시고, 뽑으시고, 다시 심으시
는 주님의 역사 앞에 우리가 바로 서서 그것이 무엇으로 의미하는지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똑바로 알고
바른 역사의식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저 먼 세우시는 역사, 건설하시는 역사, 바라보며 오늘도 바르게 승리 생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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