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리/누가복음 15장 11-24절

by 【고동엽】 2023. 1. 23.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리

2002-01-09 11:56:33 read : 465

 

누가복음 1511-24

 

<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있어야 합니다 >

 

사랑은 흔히 4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육신적인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환경에 따라 기복이 심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정적인 필리아의 사랑입니다. 아름답고 깊지만 변질되고 식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는 혈통적인 스톨게의 사랑입니다. 질기고 숭고하지만 그 사랑의 범위가 작습니다.

넷째는 신적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이 주어지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포기하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진노 속에도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외면 속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그 사랑이 절대적인 사랑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절대적으로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의 불행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저는 어제 이 구절을 보면서 "이 둘째 아들이 기분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분이 무엇일까요? 어떤 목사님은 사람의 기분을 '사이비 자유'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사이비 자유가 진짜 자유인 줄 알고 그 사이비 자유의 포로가 되면 안됩니다.

 

어떤 분을 보면 믿음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교양도 있고 배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사람은 교양이나 배움보다 기분의 지배를 받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대단하다는 분들도 자세히 보면 믿음보다 기분의 지배를 받는 분이 많습니다.

그처럼 기분에 죽고 기분에 사는 기분파라면 우리는 뿌리깊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윤락녀가 백만 명이 넘고, 원조교제를 하는 소녀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기분대로 살지 말고 선한 의지대로 살아야 합니다.

죄의 단맛은 잠깐이고 그 쓴맛은 오래 되는데 그런 저주받은 길을 가서야 되겠습니까?

 

결국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14-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본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면 다 얻을 것 같고 마음대로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젊음, 건강, 재산, 기쁨, 행복을 다 잃고 멸시천대와 가난과 저주만 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 하나님을 떠난 가정, 하나님을 떠난 민족은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궁핍해지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풍성해지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얼마 전, 전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마약을 끊고 상처를 보듬어가면서 살도록 얼마나 많은 분들이 노력했습니까?

그러나 이성으로도 안되고, 노력으로도 안되고, 때려도 안되고, 형제들이 힘써도 안되고,

박태준 회장이 노력해도 안되고, 감옥에 3번이나 가도 그 아픔을 보듬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분이 변호사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면서 지금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릅니다.

순수하고, 예의 바르고, 진실하고, 그 변화된 모습을 보고 다 호감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있어야 진짜 사람답고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어야 아름답게 됩니다. 아름다움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떠나게 되면 추하게 됩니다.

선인과 악인은 가장 큰 차이는 무엇보다 자리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아우슈비츠의 독일군들이 다 악마였겠습니까? 아마 평범한 군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그들을 악마로 만든 것입니다.

살다 보면 맘에 안 드는 사람, 너무나 실망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그분들 중에 상당히 많은 분들은 자기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한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탓하기보다 "저 사람 자기 자리를 잃었구나!"고 생각하고 대해보십시오.

그러면 측은하게 여겨지고, 그들이 제 자리를 찾게 돕는 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습니까?

 

< 현재의 부족한 자리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

 

그런데 사람이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리는 바로 '하나님 품안'이라는 자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빛이 안 나도 하나님이 주신 자리가 행복의 자리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중국에 열자(列子)가 진리 안에 초연히 살아가는 스승 호자(壺子)를 만납니다.

호자를 만난 후 열자는 자기 삶의 천박함을 한탄하다 새로 삶을 배우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스승을 찾은 것이 아니라 집에 돌아가 3년 동안 집에만 있었습니다.

글공부한답시고 아내 고생시킨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쳤습니다.

그렇게 소박한 자리를 중시하면서 그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만난 사람이 가장 먼저 돌아가야 할 곳은 기도원이나 신학교가 아니라 집입니다.

가정을 성스럽게 여기지 않는 진리는 결코 진리가 아닌 줄 알면 신앙에 실패는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소박하게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지 않아도 나의 현재의 자리가 희망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소박한 자리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삶이 편안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애절하게 찾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대개는 사방의 길이 막히고, 몰릴 대로 몰려서야 비로소 울먹이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성찰을 우선하기보다 덜컥 이런 질문부터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고통이 있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는 사실이 알고 보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고통이 있어도 사람의 교만이 대단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만약 나에게 고통이 없었다면 내가 사람답게 되었을까요?

대단했겠지요. 그것을 생각하면 고통은 우리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든 도구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삶의 기근과 흉년은 꼭 필요한 조치입니다.

 

< 하나님의 품을 떠났어도 다시 돌아서면 됩니다 >

 

그러면 비참한 처지가 된 둘째 아들이 다시 행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는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돌이키는 용기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소중한 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 단점이 있고 장점이 있고, 그저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깨닫고 돌이킬 수만 있다면 바로 그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는 자리는 대개 문제가 있는 곳이고, 우리가 실패한 곳입니다.

그처럼 문제 속에 있고, 길이 막막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나를 더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흠이 없이 곳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곳입니다.

내가 잘 나가면 내가 하나님인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오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혹시 어렵고 답답한 상황이라면 지금이 바로 하나님 만날 기회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는 죽고 싶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현실은 우연이 아니고, 그 속에 하나님의 부름과 초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보지 못하기에 어둠 속에서 울지만 이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그 어려운 자리는 바로 나의 불행이 죽고 행복이 탄생하는 소중한 자리가 될 것이고,

그 순간, 우리의 잿빛 현실은 무지개와 같은 찬란한 은총의 세계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다시 아버지를 찾기로 결심합니다. 18-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 둘째 아들의 선언은 굉장한 선언입니다. 이런 선언을 하는 사람은 길이 많습니다.

"나는 품군의 하나도 보아 달라고 하겠다!"라고 하는 자세는 대단히 좋은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진 분은 어디에 가든지 사랑 받고, 쓰임 받고, 반드시 성공합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부족한 허물이 다 덮이고, 일자리가 많이 주어집니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은 손에서 불이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춘 사람입니다.

이처럼 "나를 품군으로 보세요"라고 말할 줄 아는 자세가 진정 용기 있는 자세입니다.

그처럼 마음 하나 낮추면 길이 활짝 열리게 되고, 할 일이 많아지고 행복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능력 있게 살지 못하고, 감사가 없는 이유는 너무 마음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 높은 마음을 바꾸고 자세를 낮춰야 가정생활, 교회생활, 직장생활이 행복해집니다.

교회에서도 최고로 은혜 받는 비결은 "나를 품군으로 보세요"라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감사가 넘치고, 쓰임 받고, 그 누구와 살아도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 행동으로 회개를 표시하십시오 >

 

이처럼 둘째 아들이 자세를 낮출 결심을 한 후 어떻게 합니까?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진정한 회개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눈물 흘리고 감정풀이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더 잘하겠다는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발걸음까지 있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어떤 분은 생각은 천사처럼 합니다. 입으로도, 생각으로도, 마음으로도 회개는 잘합니다.

그것만해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심(決心)만 하고 결단(決斷)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분이 친구에게 전도하는데 10년 동안 "그래 생각해볼게"라고만 대답하더랍니다.

너무 그러니까 어느 날 그분이 친구에게 "너 지옥 가서도 생각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없으면 그 믿음은 결코 축복을 가져다주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였던 스펜서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두 마리의 생쥐와 두 명의 꼬마인간이 행복의 치즈를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고생 끝에 치즈 창고를 발견했고, 거기서 행복해하며, 쌓인 치즈를 즐기며 안주했습니다.

그런데 평생 행복의 치즈와 함께 살 줄 알았는데 치즈가 다 상하고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두 마리의 생쥐는 미련 없이 치즈 창고를 떠났고,

한 꼬마는 며칠 동안 실의에 빠져 고민하다가 다시 치즈를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여러 번 도전 끝에 더 커다란 치즈 창고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꼬마는 빈 창고에 앉아서 넋두리를 하며 상황을 분석하기만 합니다.

"누가 내 치즈를 훔쳐갔을까?"

 

이 책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정신은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변해야 하고, 부부관계도 변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고민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변화를 모색하고 새롭게 일어나면 성공의 길은 반드시 열리게 될 것입니다.

환경과 함께 자신도 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변화를 즐기고 변화에 도전해야 합니다.

인생길이 쉽지 않지만 믿음으로 개척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

 

그렇게 탕자가 일어나 아버지께 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이 한 걸음 달려오니까 아버지가 열 걸음 달려가는 장면을 보십니까?

 

탕자가 세상이 좋다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도 하나님은 조용히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회개하고 한 걸음 내디뎠을 때 하나님은 열 걸음 달려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잘못해도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릴 맞아주십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깨닫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미국의 수잔 앤더슨이란 여인이 시력이 나빠 수술 받았다가 그만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남편은 아내를 직장까지 출근시켜 주고, 퇴근할 때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여보! 내일부터 당신이 한번 혼자 출근해 보라!"고 했습니다.

배신감을 느끼고 섭섭했지만 남편을 이해하고 이를 악물고 직장에 혼자 출근했습니다.

많이 넘어지기도 했고, 서러워서 눈물도 흘렸지만 얼마 후 출퇴근이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게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운전기사가 무심코 말을 했습니다.

"부인은 좋겠습니다. 좋은 남편을 두셔서요. 매일을 한결같이 부인을 살펴주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남편은 그때까지 아내가 버스를 타면 같이 타 뒷자리에 앉았다가

아내가 회사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뒤에 자기 직장으로 출근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넘어지기도 하고, 서러운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남편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사라지고 혼자인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등 뒤에 계십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미 내 주변에는 벌써 사랑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문제는 돌이킴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돌이키면 이미 하나님은 우리 앞에 와 환하게 미소짓고 계실 것입니다.

 

< 회개한 자녀를 기뻐 맞이하시는 하나님 >

 

그 아버지의 기쁨이 본문에 얼마나 잘 표현되어 있습니까? 22-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들에게 최고의 환대를 해주고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념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잘해야 사랑을 해주지만 하나님은 못해도 여전히 사랑해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은 잘난 사람, 인물 좋은 사람, 건강한 사람, 실력 있는 사람을 더 잘 대해줍니다.

미국의 한 교수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부모들도 잘난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난 사람도, 잘난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는 다른 축복의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의 영혼을 목마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버려야 할 생각은 하나님을 떠나도 잘되는 줄 아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영광은 너무 잠깐이고, 겉은 화려해도 속은 썩은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에게는 겉은 화려하지 않아도 속에는 기쁨과 평안과 미소가 있습니다.

가끔 어떤 분은 교회 다니면 "답답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지레 걱정을 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재미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교회생활 잘하면 행복의 극치를 맛봅니다.

그처럼 행복하게 살면서 때가 되면 하나님이 축복까지 주시니 얼마나 수지 맞습니까?

 

< 아버지 앞에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

 

그런데 그 아버지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고 첫째 아들이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 첫 아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아버지 집 떠난 탕자가 되어서도, 아버지 집 안의 탕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어떤 분은 교회 안에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계속 섬겨주려고 노력합니다.

본능대로 살려면 인상을 쓰고 싶지만 교인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미소를 짓습니다.

그런 태도는 위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능력으로 나타난 선한 마음가짐입니다.

교회에서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 있어도 우리는 미소로 그를 대해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그것을 못한다면 어느 공동체에서 그런 마음의 훈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기쁘게 서로를 높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짓밟아 버리면 누가 우리를 높여주겠습니까? 남이 하겠습니까?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나라는 사람을 높여주는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40년 전만 해도 영남과 호남이 서로 "인심 좋다!"고 하며 잘 살았다고 합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가 대결할 때 개표를 하는데

자정까지 윤보선 후보가 앞섰는데 목포의 투표함이 열리면서 역전되었다고 합니다.

40년 전에는 영남 출신 박정희 후보를 호남 사람이 밀어주어서 당선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40년 사이에 영남과 호남 사이에 무슨 큰 시민전쟁이라도 벌어졌습니까?

 

미국은 과거에 남쪽과 북쪽이 큰 시민 전쟁을 해서 수십만 명이 전쟁에서 죽었지만

지금은 그 앙금을 깨끗하게 떨쳐버리고 함께 손잡고 세계를 향해 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전쟁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복된 민족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 됨을 이루어 웅비하는 민족이 우리부터 작은 실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가 되지 못합니까? 좋은 것은 보지 않고 나쁜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중국인과 유대인들은 잘 하나가 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처럼 하나가 잘 되는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기분이 문제입니다.

기분파가 많다 보니까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쳤다가 기분 나쁘면 치고 받아서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대통령 연설을 하면 좋은 대목에서는 여당, 야당을 초월해서 박수를 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모습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예 TV를 끄고, 어떤 분은 TV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TV까지 때리는 분도 있습니다.

그처럼 둘째 아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첫 아들의 모습으로 살면 언제 하나되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혹시 이 첫째 아들의 모습은 없는지 살피며 우리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모습은 나에게 용납이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안에 계시된 그 무궁무진한 사랑의 진리를 항상 새롭게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거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나 자신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간증하며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