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가는 밝은 길// 20010408
2001-12-08 17:17:36 read : 204
주일 낮예배// 마태복음 20장 17-19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분들의 주장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냥 꿈을 꾼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진짜처럼 느껴지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기 때문에 신비한 장면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 꿈속의 장면들이 신비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분명 천국은 아니었습니다.
약 5년 전에 인천에서 목회 할 때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아침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이 거의 같았습니다. 광속으로 우주 곳곳을 돌아다니는 꿈이었습니다.
꿈속에서의 기분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극치의 기분에 달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가 끝나고 매일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는 매우 피곤한 몸으로
다시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는 꿈을 기대하며 약 1시간 정도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다시 우주 공간을 나르는 꿈을 꾸며 극치의 기분에 젖어듭니다.
그러나 두 달쯤 지난 어느 날부터 저는 그 꿈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속의 좋은 기분에 마냥 젖어서 그저 꿈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속의 환상적인 장면들을 보면 기분이 좋지만 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삶의 긍정적 영향과 변화는 없었고, 꿈 같은 쾌락으로 아침 잠만 늘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분당으로 목회지를 옮겼을 때 초창기에도 한때 그런 유사한 꿈을 꿨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꿈은 보다 특이했습니다. 우주 전체를 환상적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어느 곳을 생각하면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한 곳으로 급속히 초점이 확대되어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집안 모습까지 자세히 보이는 그런 특이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유사한 꿈을 꾸기 때문에
신비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한 동안 그 꿈을 즐겼지만 역시 멀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들이 현재의 삶에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런 신비한 꿈 얘기를 하면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천국의 삶을 묘사하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꿈처럼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꿈이 정말 생생해서 몸이 항상 붕 떠서 진짜 움직이는 느낌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꿈이 매일 아침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바로 등장하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꿈이 일종의 엑스터시이지 천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만약 제가 그 엑스터시적 상태에서 본 환상을 사람들에게 천국이라고 주장하다 보면
저는 그때부터 목회자가 길을 이탈하게 되고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면 천국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열두 진주문과 황금 보석길이 있고, 어둠이 없는 화려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며 저도 신앙생활 초기에는 가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천국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천국을 진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제까지 천국의 기분을 느낀 적은 있어도 천국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이 한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을 바라는 것이 황금 집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명나무에 사시사철 열리는 과실을 먹고 싶어서 천국을 사모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신부로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좋아 천국을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천국을 보는 것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매일 천국의 환상을 꿈꾸는 것보다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 삶을 알면 우리도 그렇게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삶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은 정말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환상적인 인생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 본능 속에서도 환상적인 인생보다는 주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삼고
겸손하게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처럼 음지에서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며 의미 있게 사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우리에게는 살 힘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이유는 그렇게 되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랜시스>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한겨울에 편도나무가 활짝 꽃을 피우자 주위 나무들이 조롱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어떻게 저렇게 교만할 수가 있나! 너무 허영이 심한데."
그렇게 놀려대자 편도나무 꽃잎들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말합니다.
"여러 나무님들 용서하세요. 억지로 꽃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정말 없었습니다.
다만 내 가슴속에 따뜻한 봄바람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현실을 보면 겨울과 같아서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런 분이 그립습니다.
이때 마음속에 따뜻한 사랑이 넘쳐 꽃잎을 피워내는 분들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 정성이 담긴 글을 보면 대개 추천 클릭을 해 줍니다.
글을 쓴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에 담긴 무언의 사랑을 전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전파되기를 원하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삶을 도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사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삶을 볼 때마다 어둠 속에 비치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항상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울한 분위기이지만 그런 희망의 빛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죽음의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죽음의 길을 눈앞에 두고 가장 주님에게 필요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누구보다도 내일의 상속자, 내일의 소망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주님은 특별히 12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죽음의 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주님은 제자들도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뿔뿔이 흩어지지만 그래도 함께 가야 합니다.
실패가 예상되는 장소라도 우리가 꼭 가야 할 장소라면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방인에게 넘겨져 능욕 받고 채찍질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것도 아셨습니다.
주님은 그처럼 모든 어려운 상황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그 길로 가십니다.
이런 삶을 사명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항상 그렇게 사명적으로 사셨습니다.
우리고 그렇게 사명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짐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들 수 없는 것은 붙들려고 하지 말고 진정 붙들어야 하는 것은 꼭 붙들라."
시시한 것을 붙들지 말고 고귀한 일을 붙들고 그 길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나는 진정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고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자기 양심에서 들려지는 소리를 스스로 들어봐야 합니다.
"진정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리를 따라 살고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온 세계가 다 무너져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가 내게 있어야 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야 우리는 진정 사명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사명을 따라 예루살렘에 가서 붙잡혔을 때
베스도 총독이 "네가 미쳤다.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고 말합니다.
그때 바울이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자기의 사명을 위해 줄기차게 달리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도 우리의 귀한 시간을 좀 더 주님 앞에 좀더 사명적으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을 때에 사명적으로 믿어야 하고,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사명감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갔던 베드로와 바울과 스데반과 주기철 목사님을 보십시오.
그분들의 사명적인 삶이 안일한 생각 속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도전이 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에게도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명적 삶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생명도 내놓는 그분들의 위대한 정신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1997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유대인 빅터 프랭클 박사의 베스트 셀러
"그래도 나는 삶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지내던 그 처절한 상황에서 그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상상하고, 자연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책에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유명한 말을 합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명적인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사십니까? 작은 예수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일이라면 울면서라도 감당하려고 해보십시오.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암소처럼(삼상 6장) 울면서라도 우리는 올곧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국지에서 관운장의 적토마는 다들 탐을 냈습니다. 외모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관운장이 죽자 그 적토마는 여몽의 소유가 되는데 그때 적토마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여몽은 적토마를 취한 후 극진히 보살피지만 적토마는 전혀 움직이질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먹이를 줘도 먹지도 않고, 상념에 빠진 듯 그저 허공만 쳐다봅니다.
결국 여몽의 온갖 정성스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토마는 5일만에 죽고 맙니다.
짐승도 이처럼 일편단심으로 주인을 사랑하는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분명히 고백했으면서 정말 주님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는 빠지고 나를 위해서만 주님을 필요로 하는 모습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제 주님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올곧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어떻게 됩니까? 주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님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진다고 말입니다.
그처럼 소중한 목적을 위해 자기를 남에게 넘기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이처럼 좋은 일을 위해 자기를 넘기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쓰십니다.
아무나 쓴다는 말이 아니라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쓰임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얼마나 작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지니까
그 오병이어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남는 기적의 도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이 적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위해, 소중한 일을 위해 드릴 줄 아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능력만 가지고 하려면 우리의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능력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는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과 물질을 나누어야 하고, 무엇보다 어려운 사람을 인간답게 대접해야 합니다.
이제 이은경 집사님이 골수 이식 수술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리고 2천만원에 달하는 수술비용을 위해서도 교회 전 성도가 힘써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전 존재를 주셨는데 우리는 너무 인색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소중한 일을 위해서라면 우리 자신을 넘겨주기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넘겨져서 어떻게 되십니까? 능욕과 채찍질과 십자가의 해를 당하십니다.
왜 능욕 받으셔야 합니까? 우리의 수치를 가려 주기 위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어떤 일에 큰 수치를 느끼지만 주님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름다움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또한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날 한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구석에서 청소하는 한 청년이 비를 팽개치며 짜증을 부렸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까 자기의 처지가 너무 비참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세익스피어가 그 청년에게 아름다운 삶을 도전하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청년! 자네는 지구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것이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삶을 좋아하지만 아름다운 삶을 더 좋아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환상적인 삶을 좋아하지만 정말 가치 있는 삶을 더 좋아하십시오.
바로 그런 삶의 변화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삶의 변화가 아닙니까?
그런 변화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채찍질을 받으셔야 합니까?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억압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돈에 매이고, 권력에 매이고, 정에 매이고, 근심 걱정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기쁨이 진정 믿는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합니까?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진실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틸이라는 신학자는 구원과 관련해 인간은 발언권이 없다고 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니까 오히려 "보따리 내 놓으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는데,
그처럼 교회를 다니면서 아직도 자기 보따리를 지나치게 찾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보따리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항상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처럼 예루살렘에서 능욕 당하고 채찍질 받고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명을 향해 달리시는 모습이지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께서 예수살렘으로 가시는 고난의 길은 사실상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부활 승리의 역사를 위해서 꼭 필요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가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알 길도 없고 은혜를 체험할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이상합니다. 십자가를 기쁘게 지면 인생의 짐이 정말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부담스럽게 여겨 지지 않으면 오히려 인생의 짐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삶은 사실상 행복과 기쁨과 보람과 능력의 원천입니다.
어느 날 독일의 한 봉건 영주가 우연히 주님의 십자가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었건만, 넌 나를 위해 무엇을 주겠느냐?"
그가 하루 종일 저녁 늦게까지 그 그림을 보는데, 점차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신비한 기운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강한 다짐을 합니다.
그 다음날 진젠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이 봉건 영주는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들고, 교회를 짓고,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후 주님만 바라보는 이 아름다운 신앙운동은 모라비안 운동으로 일컬어졌고,
그 모라비안 교인들의 신앙으로 영국의 요한 웨슬레가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레로 말미암아 감리교라는 거대한 신앙공동체가 생겨납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회심과 십자가의 결단이 만들어낸 이 놀라운 작품을 보십시오.
그처럼 십자가를 지고 나가 보십시오. 반드시 성공의 물꼬가 활짝 터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내 짐도 무거워 지기 힘든 시대입니다.
그래도 남의 짐을 같이 지기 위해서 몸을 낮출 때 우리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내 삶의 짐이 오히려 가벼워지고 삶의 보람이 넘치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이런 신비는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달성하고 가치 있게 살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중심으로 향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구심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반복해서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길을 잃게 됩니다.
산을 정복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한 곳에 베이스 캠프를 치는 것입니다.
위험하고 어려울 때 내가 돌아가야 할 자리! 그곳을 확고하게 마련해놓지 않으면
위기의 순간에 나를 지켜주는 거대한 힘을 잃어버리게 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처럼 구심성이 확보되었으면 밖으로 향하는 원심성이 또한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서서 주님의 빛을 받았으면 이제는 사명적인 존재로서
자기 갱신과 자기 헌신을 통해서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고난 주간 첫째 날,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하늘로 가는 가장 밝은 길임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겠다는 거룩한 도전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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