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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나눠가며 사십시오//신명기 33장 29절

by 【고동엽】 2023. 1. 23.

행복을 나눠가며 사십시오// 20010128 주일낮예배

2001-12-08 17:35:26 read : 210

 

신명기 3329(구약성경 318)

 

세상이 어둡고 각박해서인지 사람들의 얼굴이 대체로 어둡습니다.

이러한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시기에 무엇보다 그립고, 보고 싶은 것은 밝고 따뜻한 얼굴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그런 얼굴이 된다면 이 사회는 얼마나 밝아지겠습니까?

누군가 여러분들의 얼굴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푸근해지는 그런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려지는 그런 얼굴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는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는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무심코 그린 얼굴

 

우리가 보고 싶고, 우리에게 힘을 주는 얼굴에는 어떤 얼굴이 있을까요?

먼저 풍랑 속에서도 배에서 고요히 주무시던 주님의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작은 실패와 작은 성공에 수시로 감정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우리지만

주님의 편안한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도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힘을 주는 얼굴로는 자녀들의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가끔 고통스런 일이 있어도 자녀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정말 힘이 납니다.

잘생긴 얼굴은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영혼에 힘을 주지는 못합니다.

잘생기지는 못해도 영혼에 힘을 주는 아름다운 얼굴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성도들 중에 그런 아름답고 따뜻한 얼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얼굴에서는 외모가 잘생긴 것과는 상관없이 정말 푸근함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느낌이 생기게 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희생과 헌신의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 그런 느낌이 생깁니다.

 

이은경 집사님이 그런 따뜻한 얼굴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우리 중에 어느 누구보다 어려웠지만 어느 누구보다 만족하며 지냈습니다.

차비도 없는데 성남에서 아기를 업고 교회의 모임마다 최선을 다해 참석합니다.

영어를 잘 못해도 교회 프로그램이니까 꿈을 가지고 열심히 참석하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는 백혈병에 걸렸는데도 아픈 몸으로 전철을 타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는 여러분들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이은경 집사님이 급성 백혈병 진단이 났을 때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치료비도 없는 그녀에게 이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금방 마음속에 이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천사처럼 활동하게 하는 역할을 맡기는 사람이 있는데

이번에 이은경 집사님에게 그 역할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병상에 누워 있는 분들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기에 마땅한 사람이지만 우리 대신 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은 천사와 같은 사람들을 병상에 눕히기도 합니다.

그런 천사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도를 배우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천사들 때문에 우리가 이웃 사랑을 배우고 헌신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병상에 누워 있는 분을 어떤 분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나면서 난치병에 걸려 7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장례식 날, 어떤 사람이 그 아이를 생각하며 안타까워서 옆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 아이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상에 있는 무의미한 인생을 만드셨을까요?"

 

그러자 옆에 있는 분이 사람에게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의 인생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 때문에 간호사들이 사랑을 배웠고 천사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배웠고, 그 가정이 천사 가정이 되었지요.

그것만으로도 그 아이는 이 세상에 존재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병상의 천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천사들의 고통을 외면하면 되겠습니까? 안될 말입니다.

이제 이은경 집사님은 백혈병 치료라는 힘든 대장정에 들어섰습니다.

워낙 비용이 많이 드는 치료이기에 치료비 문제에도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워낙 시간도 많이 드는 치료이기 때문에 본인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마음이 힘들지 않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때를 자꾸 외면하면 우리가 언제 우리에게 보낸 천사를 돕겠습니까?

 

지금 이은경 집사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마음이 이 병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나눌 때 우리에게도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런 사랑의 나눔이 삶에 희망과 용기와 여유와 의욕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왜 사람들이 고독을 느끼고 성공한 뒤에도 텅 빈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까?

부와 명성과 성공에 대한 눈은 있지만 헌신과 사랑에 대한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는 세계적 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가졌지만 행복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네 번 결혼을 했고, 61살에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결국 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죽었습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긴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

만약 그가 희생과 헌신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삶은 아주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할 때 노력해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성공을 얻고자 합니까?

그러면 성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명예를 얻고자 합니까?

그러면 명예를 얻어서 무엇하려고 합니까? 그냥 과시하고 끝나려고 합니까?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공과 명예보다는 사랑과 행복입니다.

그 어떤 성공적인 삶도 사랑과 헌신을 모르는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을 나눠주며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고독을 느낍니까? 사랑을 나눌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1979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에게 영국 방송기자가 물었습니다.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테레사 수녀가 말했습니다.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번 이은경 집사님이 사랑을 받음으로 고독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해야 하고,

우리도 역시 구체적인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 고독한 존재가 아님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이은경 집사님을 일으키고, 우리 각자의 심령을 일으킬 것입니다.

 

리빙스턴이 죽은지 3년 후에 한 목사님이 아프리카에 있는 그분의 사역지로 가서,

그곳에 있는 원주민들에게 리빙스턴이 어떤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원주민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원주민을 변화시킨 힘은 다른 어떤 힘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없고 율법만 있는 첫째 아들을 기뻐하지 않습니다(15).

오히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사람들을 더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있을 때 귀신이 떠나고 병자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문제를 극복하고 현실을 극복하는 힘도 바로 사랑에서 나옵니다.

실질적으로 사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딛고 일어섰는지 모릅니다.

 

사는 것에 회의를 느낀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견디다못해 그녀는 18세 되던 어느 날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지고 두 다리와 한 팔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한 팔로 생활하는데 손끝에는 손가락이 세 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외모는 추한 모습이었지만 신앙 안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이 생겼습니다.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한 남자의 청혼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결혼생활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사를 준비하는데 남편이 좋아하는 감자를 깎을 수 없었습니다.

깎으려고 하면 감자가 손에서 빠져 나와 자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굴러갑니다.

그런 모습이 반복되니까 엄청난 절망감이 밀려오고 마음에 고통이 생겼습니다.

순간적으로 들고 있는 칼로 자신을 찌르고 싶었지만 대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같은 사람에게 남편도 주고 자녀도 주셨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감자를 요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처럼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니까 마음에 물밀 듯이 평안이 밀려오고,

곧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감자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반으로 잘랐습니다.

그리고 그 반을 도마 위에 올려놓으니 감자가 도마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자를 깎을 수 있었고 그날 저녁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삶의 감격을 맛보면서 그녀는 조그만 것에 감사하면서 삽니다.

그녀가 바로 "산다는 것은 황홀하다"는 지은 다하라 요네꼬입니다.

왜 그녀의 삶이 황홀합니까? 사랑과 헌신이 지배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기초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만물의 근원도 하나님이듯이, 사랑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자는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광야 40년의 세월이 지난 후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유언기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 유언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무슨 말을 합니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말합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세월들이 뭐 그리 행복의 조건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입을 빌려 분명히 그것이 행복이라고 합니다.

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행복자라고 했습니까?

 

1) 광야를 면제해서가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2)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돕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3) 방패일 뿐만 아니라 영광의 칼이 되셔서 대적을 밟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이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사랑하는 이웃과 행복을 나눠 가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행복하게 나눠가며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겸손한 삶 >

 

그것을 위해서 무엇보다 진실하고 겸손한 삶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겸손함에서 나옵니다.

아름다운 삶을 보십시오. 대부분 겸손함에서 우러나오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아름답게 살기 원하면 항상 겸손함의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 서남 침례교 신학교의 설립자인 캐롤 박사에게 한 학생이 찾아왔는데,

학생이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이 학장님이 그 학생의 구두를 닦고 있었습니다.

전도사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아니, 학장님! 왜 저의 구두를 닦습니까?"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사자의 구두 닦는 것은 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이 학장님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반대로 교만, 자기중심주의, 약속을 파기하는 삶 등은 얼마나 추한 삶입니까?

 

< 이해하는 삶 >

 

그리고 행복을 나눠가며 살려면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삶도 필수적입니다.

오늘날 이런 이해가 없기 때문에 많은 공동체가 깨지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관계를 하면서 공동체에 어려움을 주고 공동체를 깨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분이 마귀의 조종은 받을 수 있어도 그 사람 자체가 마귀는 아닙니다.

그처럼 평범한 사람이 왜 공동체를 깹니까? 자세히 보면 대개 오해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런 식으로 깨지는 가정과 공동체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부부가 호텔에서 열리는 한 모임을 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늦었다고 남편이 급히 혼자 나가는데 아내는 그것이 속이 상합니다.

결혼 후 15년 동안 한번도 자기를 기다려 준 적이 없었고 항상 그런 식이었습니다.

언짢은 마음으로 허둥지둥 나가 차에 올라타는데 오히려 남편이 화를 냅니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까지 올라가는데

1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까 남편이 또 혼자 쑥 나가버립니다.

아내는 남편의 그런 모습에 화가 나서 내리지 않고 그냥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1층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11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기대했던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멍 하니 가만히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데 다시 엘리베이터가 닫혔습니다.

그래서 또 1층까지 내려갔다가 11층까지 올라가기를 3번째 했을 때

그때에서야 11층에서 남편이 나타나 "왜 그러느냐?"고 화를 벌컥 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 도착해서 남편은 또 차에서 내려 먼저 집으로 갑니다.

아내는 그런 모습이 너무 속이 상해서 차안에서 그냥 30분 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차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내는 그 모습을 보며 사랑을 불신합니다.

그리고 언짢은 표정을 하고 30분만에 집으로 들어가 둘은 한바탕 해 댔습니다.

다음날로 그 부부는 이혼법정에 서게 되었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싸움의 발단은 남편의 기다려주지 않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태도는 사랑과 관계없다고 생각했고, 아내는 관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격차이와 관점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부부관계가 어려워지면서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깨지고 있습니까?

 

언젠가 방송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퀴즈를 내고 맞추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문제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그 설명한 것으로 문제를 맞춰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문제를 보았습니다. 문제는 '천생연분이라는 문제였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문제를 설명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뭐라고 하지?"

할머니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합니다. "원수!" 방청객들이 웃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화난 표정으로 다시 손짓을 하며 설명합니다. "두 글자 말고 네 글자!"

그러니까 할머니가 다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합니다. "평생원수!"

할아버지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데, 할머니는 평생원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부가 오늘날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해 부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아야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 헌신하는 삶 >

 

그리고 행복을 나눠가며 살기 위해서는 헌신의 의미를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처럼 사랑하고 희생하는 사람은 삶과 영혼이 더 풍성해지고 튼튼해집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가치에 신경을 더 쓸수록 영적 가치는 빈약해 질 것입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영혼이 풍부해지고, 안하면 안할수록 영혼이 빈곤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풍부하게 살찌우는 길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TV에 한 사업가의 미담이 소개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인 미시시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난이 싫어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일해서 마침내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자기 고향 미시시피를 위해 1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그가 미국 인터넷 기업인 넷츠케이프의 창시자 짐 박스데일(Jim Barksdale)입니다.

그처럼 가난하면 꿈을 잃지 말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행복을 주고,

부유하면 그 부를 아름답게 쓰는 모습이 행복을 주고 아름답습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성공은 외면적 성공 이상으로 가치도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공이란 타인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내가 기여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성공이 사람들을 긍정적인 방법으로 돕는데 유익이 있어야 참된 성공입니다.

 

마태복음 달란트 비유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무엇입니까?

재능은 좋은 일에 쓰고 활용해야 하나님이 더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공도 헌신의 도구로 활용되어야 진정한 성공이 됩니다.

 

오늘날 책임을 강조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사회학적 용어가 있습니다.

로마시대 귀족들인 노블리스에게는 그들의 신분에 맞는 오블리제의 삶을 요구했습니다.

즉 자리가 주어졌으면 그 자리에 맞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노블리스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블리제도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얻었는데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줄 모른다는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노블리스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인다운 오블리제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멋대로 주장하고 싸우며 자기 주장을 펴고 싶지만,

오블리제를 생각하면서 한번 더 참고 인내해야 하고,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고,

또한 오블리제를 생각하면서 나의 것을 실질적으로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오블리제의 베푸는 삶이 있어야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그런 헌신이 없으면 그 삶은 결코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없습니다.

 

19세기 미국에 스티브 팩스턴이라는 주일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청년 시절에 이 스티븐 팩스턴이 교회 친구의 유혹을 받습니다.

"스티브! 주일날도 일하는 장사인데 아주 수익성이 좋은 장사이네!

이 장사를 하면 앞으로 10년이면 넉넉히 5만 불은 벌 수 있네!"

 

그 당시 5만 불은 굉장했습니다. 이 유혹을 받고 스티브가 대답했습니다.

"너무 좋은데! 그러나 나는 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할 수가 없어."

그래서 그 친구는 주일에 장사하는 일을 택해서 세상으로 나가고

스티브 팩스턴은 계속해서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우연히 둘이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 친구가 정말 아주 큰 부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의기양양하게 그 친구가 팩스턴에게 말했습니다.

"스티브. 내가 말한 대로 되지 않았나? 10년만에 나는 5만 불을 벌었네."

이때 큰 교회의 주일학교 부장으로 있던 스티브 팩스턴은 대답했습니다.

"축하하네. 그런데 10년 동안 내 손을 통해서 거쳐간 어린이들도 한 5만 명은 될 거야."

 

5만 불과 5만 명의 가치를 비교해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한 영혼이 소중한데 한 사람은 5만 불에 매달리고 있었을 때

한 사람은 5만 명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나의 것을 나눠주고 행복을 나눠가며 사는

사랑과 헌신을 아는 아름다운 행복의 전령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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