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자본주의 살전4:11~22 출처 휘발 backtogod.net
*원제:CHRISTIANITY AND PROSPERITY (Date 06/02/02) by David Feddes.
자본주의는, 기독교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 토대는 인본주의 사상이 아니었다.
이 설교를 통해 자본주의 사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와 물질적 번영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기독교를 믿으면 보통 물질적 번영prosperity을 얻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보다
대개의 경우 더욱 부유해지고,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들보다 보통 물질적으로 더 잘 산다.
기독교를 믿으면 물질적 번영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기독교 본질과 잘 맞지 않는 듯 여겨진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아무 사유 재산도 없이 사셨고,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더욱 친구로 삼아 지내셨는데...
즉, 가난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반대로 부자로 살게 되겠는가?
물론 예수님은 돈 버는 일에 대해 그다지 강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부자가 되려는 목적으로 기독교를 믿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또
한, 부자가 된 것은 그의 믿음이 신실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으며,
반대로 가난하다고 해서 믿음이 적거나 죄의 결과로 볼 수도 없다.
예수님과 신실한 제자들은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신 것이 사실이다. 소유의 양이 믿음의 양을 결정짓진 않는다.
물질적 번영은 기독교 신앙의 주된 목표가 아니다. 기독교가 번영을 꼭 약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개인과 국가가 번영해 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개인이 예수를 믿고 성경대로 살면 비교적 단정한 삶을 살게 된다.
결혼관계를 벗어난 성관계를 피하고 결혼의 서약을 죽을 때까지 지킨다.
이런 안정된 가정이 개인의 정서적 안정뿐만 아니라 경제적 안정도 더불어 가져온다.
“미국 사람들은 아래 단 3가지만 지키면 적어도 가난은 면할 수 있다”고 혹자는 말했다;
①고등학교 졸업 (지금 우리나라도 20% 학생이 고등학교에서 중도 포기)
②결혼하기 전에 아기를 임신하지 않는 것(미혼모 출산 금지).
③20세 이후의 정식 결혼.
미국은 누구든지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성실히 일하면 (부모 재산 없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이다.
누가 정식 통계를 내보니, 위의 3가지 조건을 채운 사람들 중 79%는 가난하지 않았고,
8%는 그래도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안정된 가정을(위의 3가지 조건처럼) 꾸린다면,
거두게 되는 경제적 효과는 대단히 크다. 건전한 가정은 영적으로 유익할뿐더러 경제적으로도 매우 큰 유익을 준다. 더 나아가 성경은 근면, 시간 절약, 성실한 삶, 금주 등의 덕목을 가르친다.
그런 교훈을 따르고 살면, 가정은 당연히 부유해 진다.
기독교를 믿으면 국가 전체가 번영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나라 안에는 보통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기 마련인데, 문제는 중산층이다.
기독교 국가에도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 살지만,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이
예수와 성경을 가르침을 따라 삶으로써 경제적으로 부유해진다.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의 선진국들이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된 것도 기독교의 영향이 컸다.
오늘날 유럽 나라의 국민들 중 다수는 기독교를 부인하고 있지만,
그들이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 것은 과거 기독교 신앙의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한국이 단 시간 내에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나라가 된 것도, 기독교 강국이기 때문이다.
그럼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일본은 비록 기독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기독교적 관행으로 운영되는 서구의 선진 경제 체제를 그대로 수입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하루아침에 부자 나라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차차 시간이 걸리면서 이루어진다. 나라 전체의 운영 시스템이 기독교 정신을 채택하고,
대다수 중산층이 거기에 적응해서 부유한 결과를 낳게 되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하루아침에 거지 나라가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영적인 믿음과 지적 자원들이 부패하고 고갈되는 것도 천천히 시간이 걸리면서 계속 진행된다.
나라가 점점 꾸준히 부패해가면서, 그 나라의 경제 성장 역시 지속적으로 퇴조의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컨데, 작은 씨앗이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를 이루어 많은 새들의 안식처가 될 만큼 크게 성장할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또한 누룩yeast으로 비유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비록 느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확실히 변화의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으면 발효되는데는 적지 않는 시간이 걸리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작은 씨앗이 하루아침에 큰 나무가 되지 못하며, 적은 누룩이 단번에 발효되지 못 한다.
그러나 그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효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효력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신 방법도 바로 그런 방식이었다.
하루아침에 효과가 확실히 나타나는 빨리빨리 방식이 아니셨다.
전 생애와 삶을 통해서, 또는 그 제자들을 통해서 길게 보시고 일하셨다.
또한 예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신 영역은 종교적 영역만 아니었다.
삶의 전 영역을 터치하셨는데, 거기에는 경제적 영역도 물론 포함된다.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가 경제와 물질적 번영에 우선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다 보니까, 경제적 번영이란 부수적 효과도 거두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 Worthwhile Work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가 부유해진 이유로 우리가 잊어서 안 되는 것은,
기독교는 노동work의 가치를 존중했다. 성도들은 일하는 것을 존중하고 유익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생산성도 더욱 높았다. 거기서 경제 성장은 자연적인 결과다.
기독교 나라에서 경제가 성장하면서 더욱 많은 부가 축적되었고,
부의 축적은 그 나라를 더욱 부유하게 만드는 부익부 효과를 가져왔다.
만약에 모든 사람들이 노동의 가치를 경멸하면, 그 나라의 경제는 어떻게 될까?
만약 부자들이 일하는 것을 비천하게 여기고, 대중들은 최소한의 의무적인 일만 감당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리스․로마 사회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플라톤은 ‘노동과 장인정신은 노예들 몫이고, 자유인과 상전의 몫은 아니다’고 말했다.
시세로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은 자유 시민으로 태어난 사람이 할 일이 아니고,
육체노동을 하며 벌어먹고 사는 것은 하층민들이나 하는 일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상류층인 시민권자들은 너무 고귀해서 일하지 않았고,
하류층인 노동자 부류는 수고스럽게 일하고도 좋은 보수를 받지 못했었다.
또한 노예들은 일만하고 아예 임금은 없었다.
당시에 노동이란 하찮은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사회는 당연히 부유하지 못했다.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기독교는 노동의 가치를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
예수님은 노동에 손대지 않으실 만큼 사회적 배경이 고결하거나 높으신 분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목수였으며, 일하시며 땀을 흘리셨고 그 손은 투박했다.
사도 바울도 설교나 저술 활동 등 고상한 일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했었고, 자기 비용은 자기가 벌어서 충당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왕성하게 돌아다니시며 전도의 일을 했었고,
이런 본보기를 보이심으로써 기독교는 당시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한층 격상시킨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는 첫 인간 아담도 창조 받자마자 에덴동산에서 ‘일’work을 했다고 가르친다.
노동work은 타락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이 아니라, 타락이전에 벌써 있었던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범죄한 이후로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을 따름이다.
타락이전에 벌써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인간에게 사명으로 주셨다mandate.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도, 이 ‘일’에 대한 명령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서 성도들이 일할 때는 그것이 마치 주님께 하듯이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하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골 3:23-24).
우리가 일을 대할 때 주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아무리 하찮을 정도로 천한 일이라도 가치가 있으며,
아무리 보수가 형편없이 낮아도 마음이 뿌듯해지는 - 일 자체가 주는 소중한 가치를 느낀다.
특별히 기독교는 각 개인이 가지는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소명calling으로 여긴다.
(물론 죄짓는 직업은 제외됨) 그 일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귀한 기회가 된다.
직업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기 위함이 첫째 목적이 아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함이 첫째 목적이다.
비록 노예의 신분으로서 자기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도 주님께 하듯 열심히 해야 되는 이유는,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노동 윤리는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을 위함’보다 앞선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당시의 노동을 천시하던 문화가운데서, 열심히 일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또한 노동자의 임금을 속이고 착취하는 일을 철저히 금했다.
그래서 상전들이 종들에게 임금에 있어서 의와 공평을 베풀 것을 강권했다(골 4:1).
예수님도 일꾼이 자기 임금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고(눅 10:7),
바울도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서 사용했었다.(딤전 5:18)
특히 야고보는 약 5:4에서 주인들의 정당한 임금 지불 문제를 엄하게 다루었다.
그래서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 주는 것이 기독교 정신으로 일찍부터 자리 잡게 되었다.
▶사유 재산 Personal Property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들이 부유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사유재산권의 보호’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십계명을 주시면서 “타인의 소유를 도적질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 말씀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재천명하셨다(마 19:18).
이 말씀은 개인이 자기 노동의 대가로 얻은 소유를 누릴 때,
타인이 아무라도 그것을 함부로 빼앗지 못함을 가르친다.
나아가 하나님은 10번째 계명으로 “탐내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타인의 소유권을 적극적으로 인정함이요,
내가 못 가진 것을 타인이 가졌다고 해도 불평할 수 없음을 뜻한다.
물론 주님께서 정치나 경제에 대해 세세한 대목까지 자세한 지침을 주진 않으셨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가 꼭 준수해야할 원리principle들은 주셨다.
그것은 경제 영역에도 당연하다. 사유재산권 역시 주님이 주신 경제 원리이다.
플라톤을 필두로 해서 세계의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은 사회의 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유재산권을 침해해야 된다는 주장을 종종 펴 왔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 볼 때, 권력은 종종 개인의 사유재산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또한 아무 보상도 없이 함부로 빼앗아왔다.
그 중에 극치가 바로 공산주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을 작성해서 전파했는데,
이것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바로 <사유재산권의 철폐>다.
공산주의나 급진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재산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재산권은 정부에 있다. 이들은 노동자를 위한다고 천명하지만,
노동자는 자기 재산을 모으지 못하고 자기 돈으로 물건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는데,
노동자중에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다는 동기부여가 되겠는가? “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는 일하는 시늉만 하고, 정부는 임금 주는 시늉만 한다”는 농담이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실질적인 노동도 이루어지지 않고,
정부의 정당한 임금 지불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거저 서로 흉내만 내고 있다는 뜻이다.
사유재산권을 철폐하는 것은 공공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비상한 처방이라는 개념이 매시대마다 채택되었지만,
사실 이 제도는 소수의 최고 지도층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제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브라함 링컨은 비교적 성경적인 지혜로운 말을 했는데,
그것은 “소유는 노동의 열매로서, 소유는 흠모되어져야 한다. 정당한 소유는 선한 것이다.
사람은 부유하게 살아야 하며,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자의 본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산업과 기업 경영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되어져야 한다.
무주택자는 유주택자의 집을 무너뜨리려 해선 안 되고,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자기 집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사유재산권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를 폭력으로부터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없는 자는 적극 일해서 사유재산을 가지도록 유도해야지,
있는 자의 것을 빼앗아 나눠주는 식이 되면 사회가 분배가 평등해서 평안해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이 부채질되어 더욱 불안해진다”고 말했다.
물론 링컨은 지주가 불의하게 노예들을 착취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렇지만 언제나 노동의 가치와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편에 섰다.
이런 사상들이 오늘날 미국의 번영을 가져온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가진 자의 사유재산권 보호’와 기독교의 ‘구제와 자선’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얼핏 보기에는 서로 대치되는 사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서로 보완적이다. 사유재산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사유재산을 다 빼앗고, 아무 노동의 자발성도 없어서 생산성도 지극히 낮은 사회 제도 속에서
모두가 가난으로 평등해 졌는데, 거기서 어떻게 구제활동이 이루어지겠는가? 가난해서 못하게 된다.
이와 같이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지혜로
더욱 잘 분배된 사회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거기는 ‘구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모두가 도리어 구제의 대상이 되고, 구제의 주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구제에 매우 관대했고 이런 전통은 후대에도 계속되어졌다.
그것은 기독교가 세상 사회에 끼친 좋은 본보기다.
그러나 이런 성도의 개인적 구제는, 사회주의에서의 정부 주도적 재산 압수와는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인의 구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이고, 사회주의의 분배는 강제적이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회주의는 ‘네 것이 내 것이고, 그것은 나라의 것이니 강제로 압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 것이 네 것이며 사랑으로 자원해서 나누어 준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원리가 성경의 초대교회의 유무상통 원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주의를 요한다.
겉모습은 본 땄는지 모르지만, 본질과 내용은 완전히 180도로 다르다.
‘사유재산’은 ‘자유’라는 말로도 대체된다. 사유재산권이 없는 곳에는 개인의 자유도 없다는 말이다.
사유재산에 대한 세금 공제가 작을수록 경제적 자유는 증가된다.
만약 수입의 40%가 세금으로 공제된다면, 개인이 경제적 자유는 60%만 가지게 된다.
정부는 그 40%를 관장하고, 개인은 오직 60%에 대해서만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정부가 세금을 높일수록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소멸되고, 그것이 심하게 되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되고 만다. 그 때는 생산성이 매우 저조해진다는 것을 염려해야 한다.
이것은 조세제도가 모두 엉터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조세를 성실히 납부할 것을 가르친다(마 17:27, 22:21, 롬 13:6-7).
비록 성경은 몇 %를 공제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제시하진 않고,
정부가 얼마만큼의 조세를 거둬들여야 하는 것도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성경은, 정부가 개인의 재산을 압제할 만큼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하며,
동시에 그런 정도의 가혹한 세금 징수를 반대한다. 시민은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되,
정부는 개인의 재산권을 압제하지 않고 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 세금을 징수해야 옳다.
사유재산권이 보호되는 곳에 경제의 발전, 구제를 통한 소득의 재분배 등 모든 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국민의 모든 재산권을 나라가 소유하고 나라가 주체적으로 투자하고 계획하는 것 보다,
소유권이 각 개인 가정에 있으며 개인이 투자하고 소비하고 저축하는 체제아래서
경제가 더욱 발전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자유’가 ‘강제’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런데 자유가 자칫 탐욕을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자유롭게 사업을 한다지만, 인간의 탐욕이 동인(動因)으로 작동하여 열심 내게 된다면
부작용을 가져오지 않을까 염려한다. 실제로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벌어진다.
물론 자유가 주는 그런 약점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작은’ 부정적 요인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모두 말살하고 빼앗는 ‘큰’ 잘못을 저지를 순 없다.
▶노동에 대한 보상과 게으름에 대한 책임 Reward and Responsibility
기독교가 들어간 곳에 물질적 번영이 일어난 것의 또 다른 이유는
‘노동의 보상과 반대로 게으름에 대한 책임’에 대한 확실한 강조 때문이다.
사람이 일을 잘 하면 많은 이윤을 보상받기도 하고, 반대로 일을 잘 못 하면
그에 따르는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듯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아야 옳다. 곧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일하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영적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먹기 위해서는 일을 했어야 했다. 비록 재림에 대한 약속이 분명히 남아있지만,
그것이 무책임한 게으름이나 남들이 구제해 주는 것을 얻어먹고 사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살후 3:10) 성경은 구제를 강조하지만,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사람까지 도와줄 것을 명하진 않는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이나 보상이 똑같고,
지혜롭게 투자한 사람이나 어리석게 투자한 사람이 거두는 이윤이 똑같은 곳에선,
물질적 번영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생산성을 보호하다가 창조적인 생산성까지 약해진다.
물론 한 번 경제적으로 실패한 사람에게도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는 당연히 보장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분배 정의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관계없이 똑같은 보상이 주어진다면,
거기엔 생산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개인의 게으름이나 어리석은 경제 활동으로 생긴 가난을
정책적으로 지나치게 보조해주는 제도는 가난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뿐이고
가난을 개선해주는 효과는 약하다. 성경은, 열심히 일한데 대한 보상을 약속하지만,
동시에 게으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상을 갖는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부지런하게 살기를 추구하며,
또한 경제 (투자) 활동에 있어서 가급적 현명한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것이 자기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심은 대로 거두는 공평한 성경적 원리가 강조된 사회에서는,
당연히 선의의 열심이 생기며 그 결과 사회는 더욱 생산성이 높아지고 그 결과 부유해지는 것이다.
성경은 ‘정의’justice를 강조한다. 사회에 경제 정의가 실현될 때 더욱 번영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노력한대로 거두게 되는 것을 눈으로 보고 또한 믿기 때문이다.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일한 사람들이 많은 결실을 거두는 정의가 실현될 때,
사람들은 더욱 합법적으로 일하고자 하는 동기가 부여된다.
그러나 반대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이 불의하게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될 때,
사람들은 열심히 일할 의욕을 잃게 되고, 그 결과 사회적 번영은 주어지지 않게 된다.
기독교 국가가 비록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세상 어느 나라보다 높은 경제 정의를 구현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부유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기는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그가 속한 사회와 제도가 정의로운 기독교화가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더욱 핍박과 불이익을 받아서 이전보다 더욱 가난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그 사회에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가면서,
사회가 점점 민주화되고 정의로워지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과
도덕적인 경제 원리를 지키는 사람이 더욱더 잘살게 되는 길이 반드시 열릴 것이다.
▶자본의 윤리 Moral Capital
사회가 경제적으로 점점 잘살게 되면서, 자본의 결집과 더불어 ‘자본의 윤리’가 점점 강조되고 있다.
사람이 신용이 있으면 사업상 계약도 잘 이루어진다.
반면에 사람이 신용이 없으면 계약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없다. 계약을 해도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용 없는 사회에서는 계약이 이뤄지지 않고 따라서 경제적 번영도 이뤄지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신 25:15)라고 명하신다.
속이면 이윤이 많이 남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직한 저울추로 정확한 거래를 하고 깨끗한 장부를 기록할 때,
신용이 쌓이면서 활발한 투자와 신용 거래가 확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진다. 일부 사람들은 과장 광고를 하고,
회계 장부를 거짓으로 작성하기도 하는데, 결국에는 경제적 패망을 가져올 뿐이다.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엔론사Enron Co. 회계 사기 사건’이 단적인 예다.
물론 세상에서 완벽하게 깨끗한 경제는 없다.
그러나 그 사회의 주류 기업들이 정직하고 투명하게 하느냐, 아니고 속이느냐에 따라
경제적 번영과 경제적 패망의 서로 다른 결과가 주어질 것이다.
지금 세계 몇 나라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재앙은(한국의 IMF 같은) 그 주된 원인이 경제 윤리성의 결여였다.
경제가 투명하지 못하니까 신용이 떨어지면서 투자가들이 자본을 빼가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투자 유치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만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노동에 대한 소명감이 높았고, 도덕적 기준도 더욱 높았다.
간혹 이런 소명감과 도덕적 기준이 상실되는 어두운 시대도 과거에 있었지만,
그러나 대체적으로 보면 그래도 기독교가 노동과 경제면에서도 세계 인류에게 큰 기여를 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더욱 정직하고 신용이 있었으며, 부지런히 일하고
반면에 노는 사람들에겐 책임을 물었다. 사회는 더욱 안정되어갔고 절약의 정신이 추앙되었으며,
사람들은 원기 왕성하게 일하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활기찬 사회로 변모되어왔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주창했으며,
대차대조표와 기업재무정산표 같은 투명한 기업회계의 혁신을 일으켰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은 경제를 활성화시키거나
사람들의 은행 잔고를 늘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 경제에 있어서 이런 성경적 원리들이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고,
그런 경제적 번영이 사람들로 하여금 도리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교훈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축복을 받아 부유하게 된 후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물질에 더욱 욕심이 생기거나,
기독교의 경건을 물질적 축복을 받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엄한 경고이다.(딤전 6:6)
나는 바로 지금도, 사람들이 이 설교를 들은 후에, 기독교를 단순히 부자 되기 위한
요술방망이 정도로 여기는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될까봐 무척 두렵다.
그런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책임감을 있는 삶을 살게 하며,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어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사회는 당연히 물질적으로 번영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유하게 되는 과정에서, 세상 보물을 하늘의 보물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은 큰 실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경제 분야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선한 변화를 일으키셨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마음의 변화를 우선으로 여긴다.
또한 기독교의 궁극적 목표는 영생이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네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다(마 6:21).
세상 물질을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늘 염두에 두자.(마 6:33)
예수를 믿음으로 생기는 이런 경제적인 축복은 언제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죄 씻음 받음과 영생이야말로 성도가 받는 주된 축복이다.
그러므로 부차적인 축복을 못 받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믿고 따른다.
부하게 되는지 가난하게 되든지, 주님이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기꺼이 믿고 따라갈 것이다.
우리가 받은 죄 씻음과 영생의 축복 한가지만이라도 무조건 주님을 믿고 따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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