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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신부( 1918 ~ 2002)Reuben Archer Torrey Ⅲ

by 【고동엽】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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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18년 중국 산둥 성 지난(濟南)에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루우벤 아처 토레이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중국과 조선의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소년기인 1933~34년까지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수학했다.

그의 한국과의 첫 만남은 10대 시절 베이징의 미국인 학교에 다니다가

15세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와 2년간 머무른 때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평양의 선교사와 교사들에게서 진정한 성령의 교제를 경험했다”

고 그때를 회고했다.

이후 데이비슨 대학(남침례 신학교), 중국 연경대학,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남부 대학(Univ. of the South; 성공회 신학교) 석사 과정을 마치고,

선교에 대한 의견차이로 장로교회와 대립을 보여 성공회로 교파를 옮겼으며

1946년 2월 2일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주1)

1957년 현재 성공회대학교인 성 미가엘 신학원의 재건립을 위해

한국에 입국하여 1964년까지 학장으로 일하였다.

1965년 강원도 태백시에 성공회 수도원인 예수원 Jesus Abbey 을 설립하여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등사회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2002년 노환으로 별세하였으며, 현재까지 예수원에 남아 생활하는

현재인(Jane Grey Torrey)사모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된 벤 토리(Ben Torrey, 한국명 대영복)신부가 있다. 주2)

 

◑3. 관련글, 어록, 일화

 

▲1. 그 분은 한국 교회의 스승이셨다.

그는 늘 가슴에 베를 달고 살았다.

한국교회의 잘못을 대신 회개하겠다는 의미였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예수원이나 책을 통해 대천덕 신부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생전에 여러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했고, 그를 보기 위해 예수원을 찾았다.

그들은 여러 질문에 알맞은 답을 해 주던 대천덕 신부의 모습을 기억하겠지만

대천덕 신부님은 뒷편으로 한국 교회의 모습을 회개하고 있었다.

 

▲2. 영양실조 걸릴 만큼 검소했던 신부

한편으로, 대천던 신부의 일생은 늘 가난했다.

15년된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고, 작은 음식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이가 한입 베어 물고 버리려는 깍두기를 재빨리 낼름 집어 먹던 이였다.

(바로 앞에 앉았었기에 목격한 모습이었다. 난 그때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했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신부님의 재빠른 모습이 웃기기도 하면서... 모두 스크랩 글)

그가 하늘로 올라가기 2년 전이었던 2000년.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되어 한번 위험한 고비를 맞은 적이 있었다.

강릉에서 진단을 받다가 상태가 안 좋아 급히 서울로 날아왔고,

바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 때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녔던 분은,

그의 상태를 알고 나서, 차마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시 82살이었던 그는 '영양실조'였다.

영양이 극도로 부족해지면서, 가뜩이나 약한 심장 등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사실 예전부터 그는 ‘따로 먹고 싶은 것을 해 드리겠다’는

예수원 사람들의 배려를 단호히 거부했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항상 모두 함께 모이는 공동식사에 나와 먹었고,

자신만을 위한 음식은 사양했다.

모두가 어울려 사는 공동체에 자신만이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던

그의 곧은 성품 탓이었다.

 

▲3. 검소한 삶을 몸소 실천하시다

개인 자가용이 없었기에, 태백에서 서울에 올 때는 늘 기차를 이용했고,

서울에서 묵었던 곳은 종로5가 기독교100주년기념관 5층의 2만원짜리 숙소였다.

대천덕 목사는 생전에 “한 번도 외부에 돈을 달라고 요청한 적 없었고,

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한 적 없었는데 하나님은 항상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셨다.

우리와 함께 일할 사람도 끊임없이 보내주셨다”고 간증했었다.

대천덕 신부는 말했다.

"오늘날의 현대선교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재정을

사도행전에서는 왜 한 번도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왜 사도행전에서는

그렇게 자주 배를 타고 다니고

그 많은 도시들을 다니는데

거기에 들은 재정에 대해서는

왜 일절 기록하지 않았을까?

여러분, 현대교회에서는 ‘교회 재정’이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예수님/복음’이 약화된 것이다.

 

▲4. 말씀을 실험하기 위해 세운 <예수원>

특히 그는 자신을 '신부님'이라고 따로 부르지 않기를 원했다.

권위 자체를 스스로 내려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저 예수원에 사는 사람들이 동일한 호칭(형제 자매)로 남녀를 부르듯,

자신 또한 ‘아처 형제’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하지만 우리 풍습 상 어른에게 존대를 안 하기는 어려운 일,

그래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예수원>을 설립하면서, 사실 당신께서는

‘성경이 진짜 진리인지 실험하시기 위해 설립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원>안에서, 성경에 있는 대로 생활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정말로 주님이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주시는가?

정말로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면 복을 받는가?

정말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가?

등등을 말이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예수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적인 유익을 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원에 머물면서

대천덕 신부님의 가르침을 통해 인생의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5. 말씀의 권위

(어느 블로거) 제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이

서울대학교에 오셔서 강의를 하신다는 벽보를 보았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도 거른채 서울대 강의실로 찾아갔다.

커다란 강의실에서 50-60명 정도의 학생들이 강의를 들었다.

(이런 위대한 강의를 이렇게 적은 수의 학생들이 듣는 것이 안타까웠다).

20년이 지났지만 그 날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서기관들과 차원이 다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에게서 권위를 느꼈던 것처럼,

신부님의 강의는 (말씀의) 권위가 있었다.

그것은 신부님의 권위가 아니라, 말씀의 권위였다.

성경에서 바로 꺼내서 전해주시는 말씀 같았다.

의자에 앉아서 마이크에 대고 조심스럽게 강의하셔야 할 만큼

연로하신 신부님의 메시지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모두 성경에 있는 내용이었다.

모태신앙으로 수많은 설교를 듣고 거의 매일 성경을 읽었던 제가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할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날 깨달았다.

나는 매우 중요한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신부님을 존경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신부님이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과 실천은 하지 못하고 살았다...

 

▲6. 예수원 생활

예수원의 기본 일과는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는 성 베네딕트의 가르침에 근거해

하루 세 차례의 예배와 노동을 주축으로 이뤄져왔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평소 아침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6시부터는 예수원 식구들과 공동예배를 드린 뒤, 토스트로 아침 식사를 하고

사무실에서 설교 준비와 편지쓰기, 글정리 등의 일을 하셨다.

예수원의 정해진 일과를 마치고 나면

9시부터 10시까지 개인 중보기도 시간을 가졌다.

그의 기도 파일에는 항상 사람들의 사진과 기도 제목으로 가득했다.

예수원내 그의 침실은 겨우 두 사람이 들어가 누우면 그만일 정도로 초라했지만

매년 1천통 이상의 상담편지를 받았고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를 보기 위해 예수원을 찾았다.

예수원은 신학의 실험실로 불린다.

대천덕 신부는 늘 “신학이 대학의 강단과 연구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원도 산골에 머물러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도

사회를 향해 빈부격차와 토지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사회적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신학은 학문적으로 보수와 진보, 동양과 서양을 망라할 뿐만 아니라

해박한 성경 지식과 기도와 성령의 힘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 기본하고 있다.

성경의 의문점을 문답식으로 저술한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는

1982년 첫 출간된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출판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7. 수많은 제자들, 영향력

<창조과학회>와 <한동대학교>도 모두 대천덕 신부님의 비전 안에 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각각 설립하신 분들이 그 비전을 받고 진행해 나가신 것이죠.

그 외에도 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성토모),

낙태반대운동연합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보내주신 진정한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8. 도서 <나와 하나님> 머리말에서 대천덕 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7:1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하나님 뜻을 행하려는 지혜, 잠1:7)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5~8

본문에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로 결정하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의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까 말까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아직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는 마음이 흔들립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지혜가 아직 없기 때문이며, 지혜를 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9. 한국 전통 문화를 존중하시다.

한국 성공회대를 정착시킬 무렵

그는, 마을 사람들과 융화를 위해 철저히 한국 전통을 존중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서 두건을 썼고, 우리 전통 예법에 따라 베옷을 입으며 같이 아파했다.

미국식 기독교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한국민을 존중하는 그의 모습에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열렸다고 한다.

이 같은 태도는 예수원을 설립한 강원도 태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해지는 일화 하나.

어느 해 예수원에 살던 청년들이 부근 마을을 지나다

마을 주민들이 꾸며 놓은 '성황당'을 보게 됐다.

그들은 예수원에서 기한을 정해 놓고 수도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우상숭배’라고 생각한 이들은 성황당을 과감히 훼손했다.

하지만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그들이 대천덕 신부에게 들은 것은 꾸지람이었다.

대천덕 신부는 직접 마을 주민들을 찾아갔고,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말하면서.

대천덕 신부는 평소 묘비명에 어떤 글을 남기고 싶으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태어나고 죽은 날만 간단하게 적고 싶다”며 “죽어서도 예수원에 묻힐 것”이라고 말해왔다.

현재인 사모 역시 “다시 태어나도 같은 사람과 동일한 삶을 살 것”이라며

대천덕 목사와 한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해왔다.

 

대천덕 신부님이 한국에 오신 초기에,

태백 그곳 마을 어른들을 초대했는데,

갑자기 예상보다 몇 배 많은 동네 어른들이 와서,

사모님이 준비한 음식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다함께 기도하고 같이 식사를 했는데,

찾아온 동네 어른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고 한다. 단 한 번 있었다고 한다. 일종의 5병2어의 기적이다.

 

◑사상

대천덕 신부는 성서와 성령에 의한 회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사회정의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신학자로 평가받는다.

 

▲1. 사회 정의를 외친 복음주의자

한 번은 대천덕 신부의 아주 가까운 분이

‘신부님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으라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대천덕 신부는 ‘지붕위에 올라가 외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인생의 말년에 정의에 관해 말하고

정의의 기초인 성서적 토지법을 '외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성령에 의한 회심를 중시하고, 복음주의적인 전통에 서 있던 그가

어째서 이런 문제에 그토록 집중했을까?

그 이유는 어느 책 한국어판 서문에 나온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다.

물질적인 문제는 기도와 영적 전쟁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영적인 문제는 현실의 삶, 즉 실제적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

한국교회에는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면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고,

사회문제를 강조하면 성령과 말씀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천덕 신부는 성령과 말씀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사회정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대천덕 신부님은

‘교회가 세상의 정의를 말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거나 도리어 방종하는 모습’이라며

종종 안타까워하셨다.

 

▲2.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은 도둑질, '헨리 조지'를 소개하다

대천덕 신부님은 우리나라에 제대로 '헨리 조지'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했다.

경제학을 전공했거나 토지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헨리조지는 1839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다.

명저 <진보와 빈곤>을 통해 '모든 지대는 도둑질'이라고 규정하며

토지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이 고민한 사람이었다.

땅으로 얻는 불로소득에 막대한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 헨리조지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대신부님 또한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던 ‘조지스트’였고,

이 분야의 뛰어난 이론가이기도 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에 입각해 '자연에 의해 생겨난 땅은

하나님의 산물이기에 인간이 그것을 통해 불로소득을 얻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

대천덕 신부님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1984년 조직된 ‘한국 헨리조지협회’의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미국인이었지만 그는 이스라엘을 도와 아랍을 공격하는 미국의 모습에 비판적이었다.

아랍을 폭격하는 미국의 행동에 ‘미국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호히 말하기도 했다.

아울러 예루살렘은 이스라엘만의 땅이 아니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어느 한쪽의 땅만이 아니기에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주1)

그분의 아버지는 R. A Torrey 2세 입니다.

그렇다면 R. A Torrey 1세는 누구일까요?

19세기 말 미국에서 유명한 복음전도자 D. L. 무디와 동역하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뛰어난 신학자이십니다.

무디가 세운 "무디성경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셨죠.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당하시던 "성령 하나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정립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 분이시죠.

구두수선공출신이었던 무디의 부족한 신학적 지식을 보완해주신

훌륭한 동역자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책 <성령론>은 거의 필독서입니다.

*토레이 크리스천이 되지 않아서 치르는 대가/ R. A....

*토레이 응답 받는 기도 R. A. Torrey

아무튼...R. A. Torrey 1세 목사님은 장로교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손자인 대천덕 신부님은 왜 "신부님"이 되셨을까요?

대천덕 신부님은 영국 성공회의 사제이십니다.

20세기 초에 대천덕 신부님은 미국에서 아시아,

특히 한국과 중국을 품고 선교를 하려고 하셨는데

그때 당시 미국내 모든 개신교 교단 중에서

아시아를 대상으로 선교전략을 세운 교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시던 중, 성공회에서

아시아를 대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공회에 입교하게 됩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천덕 신부님 신앙 간증 참고 : http://www.myblade.net/631)

이분은 그래서 성공회 교단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지내시던 중 한국에서 "성공회 대학교"를 설립하려고 하니

가서 초대 학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1957년(6.25가 끝난지 4년 뒤)에 한국으로 오시게 됩니다.

 

병역대신 선원으로 근무하는 대체복무를 하였다.

당시 미국의 가톨릭, 성공회 계통 신학생들은 신학교에서 계속 공부하거나,

입대하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해야 하였는데,

대천덕 신부는 미국과 전쟁 중이던 독일로부터 상선이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데도

청사진을 읽는 선원으로 근무함으로써 병역을 대신 한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주의에 열광했다고 회고했다.

대학을 졸업한 42년 선원조합 활동을 시작한 그는

그 후로도 건축기사 노조활동, 흑인해방운동 등 사회운동의 최전선에 자신을 내던졌다.

46년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동료 사회운동가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 명도 인도하지 못했다. 이 시절의 경험은 그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신앙을 조화시킬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했다.

 

주2)

아들 벤 토레이 신부도 아버지 대천덕 신부처럼 성공회 신부일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성공회 신부가 아닌 동방 정교회 전통을 잇는 교회인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의 사제이다.

벤 토레이 신부는 예수원 내의 삼수령 수련원 원장으로

북한선교를 위한 <네 번째 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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