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의 메시지
막 9:2-8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이 세상에는 두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세계 즉 지상의 세계요 물질의 세계 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적인 세계 즉 환상의 세계요 정신의 세계요 신앙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이 두 세계가 병존하며 운영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육신의 세계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상의 세계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값입니다. 인간은 이 두 세계를 균형 있게 알고 살아갈 때 가장 건강하고 건전한 정신과 삶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오늘 현대인들에게 이 두 세계를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과 현실의 사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세 제자와 함께 산으로
본문 2절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 이 세 제자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키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차 이 세 제자는 특별한 사명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세 제자들에게 특별히 보여주실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산은 참 좋은 교육 처 입니다. 산에 오르면 눈이 열립니다. 생각이 열립니다.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노래가 나오고 시가 나오고 작품의 눈이 뜨입니다. 특히 한국인은 자연과 함께 살아온 민족입니다. 우리민족은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삶을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양순하고 순전하고 인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자연과의 삶은 그만큼 인간으로 하여금 풍성한 정서와 인성을 길러줍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만큼 소중한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돌아다니며 소중한 교훈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자연은 그만큼 좋은 교육 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대부분 이런 자연을 등지고 콘크리트 빌딩 숲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그토록 삭막해지고 독해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말라버리고 정서가 말라버려서 그렇습니다.
환상을 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 펼쳐진 시원하고 마음이 확 트이는 산하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그곳에 환상이 벌어졌습니다. 3,4절을 보면 “그때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고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공이 초월된 순간 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대화를 했다는 말은 그곳이 천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이런 환상과 기적이 수반됩니다. 흔히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만 기록해 놓아서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점이 있기 때문에 성경이 성경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서삼경이 아무리 훌륭한 고전이지만 그곳에는 기적의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서삼경은 훌륭한 고전이지만 성경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천국이 있고 부활이 있고 눈뜸이 있고 고침이 있고 환상과 기적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인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을 지나다가 환상 속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삶을 180도 회전해서 전도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예수님께서 일어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스데반이 웃음 띤 얼굴로 죽어갔던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라의 미래가 불안해서 성전에 나아가 기도를 합니다. 그때 환상 속에서 천국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성전지붕을 덮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의미는 웃시야 왕이 죽었다고 염려하지 마라, 이 나라는 내가 지키고 있다는 메시지 엿을 것입니다. 세상 어느 책에 이 같은 이상과 기적의 내용이 들어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바로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 세상에 이런 환상이나 기적 그리고 체험을 주십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이고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무지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신앙에서 떨어질 염려가 많습니다. 실제로 오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갑니까. 신앙은 보지 않고 믿는 생활이지만 동시에 그 불확실함 때문에 신앙의 길에서 탈락하는 사람들도 많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신앙생활은 보고 믿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때로 기도응답을 주시기도 하고 기적을 체험하도록 배려하기도 하십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기적이 존재이유가 바로 그런 점 때문일 것입니다.
찰스 템플턴이라는 사람은 1940년대 빌리 그래햄과 함께 설교자로 각광받았던 인물입니다. 빌리 그래햄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템플턴은 도중에 전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기독교 비평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기자가 와서 “당신은 왜 불신앙 자가 되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템플턴은 대답하기를 “나는 기독교에 늘 회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했지만 사실 나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불쌍한 아프리카 여인이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안은 채 목적을 잃고 서 있는 두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을 근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고 대답했습니다. 신앙은 말로 하는 생활이 아니고 중심으로 고백되어지고 믿어져서 고백하는 생활입니다.
미국에는 무신론자들이 모여 무신론자 대회를 합니다. 이들이 모여서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삶을 간증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곳에는 전직 목사들도 참여합니다. 그들은 목회를 청산하고 신앙을 무시하는 삶을 간증하며 “I don t need Jesus , “나는 예수가 필요 없다“며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에게 매여 목회하고 설교를 하다가 확신도 없고 예수에 붙잡힘도 없고 어려서부터 믿긴 했지만 그 매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동경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그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자유로움에서 “이제 예수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외치며 간증하며 대회를 이끌어 갑니다.
인간이 육신의 옷을 입고 영적 세계를 현실처럼 보고 고백하고 믿는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간의 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가끔씩 이 세상에 기적을 보여주시고 나타내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시고 때로는 환상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기적과 환상이 나타나고 보이는 이유이고 뜻입니다. 그렇게 본 사람들은 다릅니다. 믿음의 강도와 질과 내용과 확신이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들 중에서 세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산으로 가서 그들에게 환상 속에서 나타나는 천국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장차 큰일을 하기 위해서 훈련하시려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집을 짓고
산에 오른 세 제자들이 그 환상을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놀랍도록 환상적이었겠습니까. 더구나 그곳에 갑자기 모세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천국의 모습이 펼쳐진 것입니다. 얼마나 찬란했겠습니까.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5절을 보면 “여기가 좋사오니 집을 짓고 여기서 함께 삽시다”하고 말합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곳이 얼마나 환상적이었겠습니까. 제자들은 그 순간의 그 찬란함과 행복함을 깨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 지금 참 행복하다“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 행복한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잠을 자면서도 웃음을 웃습니다. 그런 때 곁에서 잠을 깨우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 삶이 너무 행복해서 그 행복한 삶이 깨질까 봐서 자살해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그런 분위기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집을 짓고 함께 삽시다”하고 제안했던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우리들끼리만 모여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만 천국가고 우리만 복을 받고 우리만 모이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직무유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끼리, 안일함, 나태함, 적당히, 눈감음”등 입니다. 오늘 교회의 가장 큰 직무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내 교회만, 주위에 대한 무관심” 등 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산 위에 수도원에 집을 짓고 우리끼리만 모여 평안하게 살자“하는 삶의 태도는 직무유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들에 특별히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여기서 우리들 끼리 행복하게 살자 하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특별히 천국의 모습을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신 뜻은 이제 보았으면 큰 뜻과 큰 각오를 가지고 내려가라는 뜻입니다. 이제 보았으면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도피하고 숨는 삶이 아니고 나아가고 다가가고 함께 하고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려와야
14절을 보면 “산에서 내려오니 큰 무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 일행을 맞이했다고 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가 하면 거기 암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면 “무리중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 쫒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산에서 내려와 보니 이 같은 암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세계에는 늘 이 같은 비관적인 것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위에서 천국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여기서 살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내려가자 해서 억지로 내려와 보니 이 지경입니다.
여러분, 귀신들린 사람을 보았습니까. 내 아들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 아들이 귀신에 들려서 날마다 미친 짓을 하고 귀신이 내 아들을 날마다 붙잡고 넘어지게 하고 피 흘리게 하고 침 흘리게 하고 때로는 물에 빠트리기도 하고 불에 뛰어 들어가게도 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목회할 때 젊은 집사가 귀신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권사님들을 불러 모아서 저녁 늦게 까지 귀신들린 여 집사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귀신들린 분이 얼마나 양순하고 얌전한지 모릅니다. 한밤중에 권사님들에게 맡기고 들어와 자다가 새벽에 나가 보니까 권사님들을 앞에 놓고 이 귀신들린 여 집사가 훈계를 하고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권사들이 기도는 하지 않고 잠만 잤다”고 고자질 하면서 비웃고 있습니다. 이 귀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산 아래에 내려와 보니 그 모양입니다. 산 아래에 있던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놓고 귀신아 나가라 하고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산 아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을 보라보십시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중보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각종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분들, 가난의 문제, 실패의 문제,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를 외면하고 나만 천국 가겠다고 산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만 건강하고 평안하고 배부르다고 그것이 배부른 것이 아닙니다. 나도 건강하고 너도 건강하고 모두가 배가 불러야 그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만 천국 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이웃들이 다 지옥 가는데 나만 천국에 간다고 행복할 수 있습니까.
톨스토이의 “동굴 속의 인간“이라는 책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굴 속에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군상들은 모두 육신의 굴레에 잡힌 채 육신의 세계만 알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밖의 세계를 모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육신의 차원을 넘어보려고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부류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술가들입니다. 이 예술가들은 육신의 차원을 벗고 작품을 통해서 무한한 자유를 누려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예술의 세계를 통해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또 군인들은 세상을 개혁해 보려고 부수기도 하고 뒤엎어 보기도 하고 전쟁도 해 봅니다. 그런데 남는 것은 피 흘림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종교인들도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다 마침내 영적세계를 발견하고 천국을 보게 되고 부활을 믿게 되고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것을 비로소 알게 된 신앙인들은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자신만 영적 세계를 발견하고 밖으로 나아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동굴 속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쇠사슬을 벗겨 주기 위해서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할 일입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으로 가서 이 제자들에게 아주 깊은 영적 체험을 시키게 됩니다. 이 세 제자는 장차 뭔가 큰일을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특별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체험하게 했고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사명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부름 받은 우리들이 세상을 확신 있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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