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을 사모하라 (요한복음 18장 25-27절) <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
예수님이 붙잡히신 후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다(19절).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 예수님이 붙잡혀온 곳은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이었다(13절). 다른 복음서에서는 가야바의 심문만 나오는데 안나스의 심문은 예비 심문이고 가야바의 심문은 공식 심문이었을 것이다. 가야바의 심문은 예수님의 유대인 메시야 여부에 초점이 있었고 안나스의 심문은 예수님의 유대교 이단성 여부에 초점이 있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묻자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다(25절). 마가는 베드로에게 한 두 번째 질문도 여종이 한 것으로 기록했지만 요한은 두 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 질문에 대해 요한은 베드로가 “나는 아니라.”고 대답한 것으로 기록했지만 마태는 “맹세하고 부인했다.”고 기록했다(마 26:72). 가야바의 예비심문에서 예수님의 무죄 방면이 틀렸음을 알고 베드로는 겁이 나서 예수님을 더욱 세게 부인했을 것이다.
그때 대제사장의 종인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말고의 친척이 말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그 질문을 듣고 베드로가 또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27절). 셋째 질문은 예수님의 체포 현장에 대한 증언을 동반한 구체적인 질문이었기에 베드로의 부인도 더 강해져야 했다. 본문에는 그냥 부인했다고 표현했지만 마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했다.”고 기록했다(마 26:74). 다른 제자는 다 부인해도 자기는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루도 지키지 못한 인간의 나약성을 닭 울음소리가 뚜렷이 부각시킨다.
제자의 길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사라졌고 최후까지 남은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 부인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킬 때는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십자가를 질 때는 다 사라졌다. 그 모습이 ‘무리’와 ‘제자’의 차이다. 복음서를 보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란 말이 자주 나온다. 예수님은 그런 무리에게는 관심이 없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 성령충만을 사모하라 >
무리는 많지만 제자는 적다. 언제나 그랬다. 베드로도 본문에서는 제자가 아니고 무리 중의 조금 나은 무리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파하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제자가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성령충만이라는 암시다. 성령의 능력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비겁한 베드로를 위대한 증거자로 만들 수 없었다.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성령충만밖에 없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셨지만 몸을 입어 공간의 제약이 있었기에 이 사람과 함께 하면 저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었고 시간의 제약이 있었기에 늘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난 후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 성령님이 영혼에 임해야 믿음도 온전해지고 현실 극복 능력도 나타난다. 성령님이 심령 안에 거해 능력이 나타나면 미운 마음 대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우찌무라 간죠가 말했다. “네가 미움의 총을 쏘나 나는 사랑의 대포를 쏠 것이다.” 어떻게 미움의 총을 쏘는 사람에게 사랑의 대포를 쏠 수 있는가? 성령충만하면 가능하다. 성령충만은 수많은 문제와 잘못을 극복하게 한다. 본문에서 비겁하고 쩔쩔매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던 베드로가 53일 후에 위대한 증거자가 되었다. 그 사이에 벌어진 사건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는 사건이었다. 그처럼 성령충만이 위대한 것이다. 내가 넘지 못할 벽으로 느끼는 어떤 것이 있을 때 그 벽을 넘는 최적의 길은 성령충만의 길이다.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이후에도 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종종 보였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자기 극복을 이루면 이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튼튼한 영혼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충만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게 된다. 믿음은 영혼을 기쁘게 하고 소망은 삶에 활력을 주어 바쁘게 하고 사랑은 예쁘게 보이게 만든다. 성령충만하면 ‘기쁘다, 바쁘다, 예쁘다’의 ‘삼쁘다’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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