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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통해 얻는 복 (예레미야애가 5장 1-22절)

by 【고동엽】 2023. 1. 7.

고난을 통해 얻는 복 (예레미야애가 5장 1-22절) < 고난을 통해 얻는 복 >

 고난의 광야가 없었던 시대도 없고 고난의 광야가 없는 사람도 없다. 고난이 없는 곳은 없다. 땅의 3분의 1이 사막이다. 살면서 사막을 피해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사막과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광야에서 마귀의 사탄의 있어도 광야가 다 사탄으로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 가신다. 사탄을 통해 주어진 광야도 결국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주어진 것이다. 광야가 다 사탄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인물로 만들려고 광야를 허락하실 때도 많다.

 마가복음 1장 12-13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에게도 광야 체험이 필요했다. 그 체험 후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다. 성도도 광야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다만 불필요한 광야는 피할 수 있고 광야 기간을 줄이거나 미래의 광야도 줄일 수 있다. 광야 체험은 보통 체험이 아니다. 그 체험을 잘 활용하면 놀라운 복을 빚어낼 수 있다. 어떤 복인가?

1. 기도의 복

 예레미야는 나라 패망으로 인해 자기 민족이 당한 고통을 기억하고 치욕을 살펴달라고 기도했다(1절). 또한 자신들의 힘든 현실에 대해 하소연을 했다(2-5절). 그런 하소연의 기도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다. 힘든 일이 없어 기도도 없는 것보다 힘든 일이 있어 기도가 있는 것이 더 큰 복이다. 제일 큰 복은 힘든 일이 없어도 기도하는 복이고 제일 큰 불행은 힘든 일이 있어도 기도가 없는 것이다.

 광야의 고난을 통해 기도하는 삶을 찾으면 인생의 위기는 인생의 기회가 된다. 나쁜 것도 믿음의 기도를 통하면 얼마든지 좋게 만들 수 있다. 불면증이 어떤 사람에게는 끔찍한 고통이지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 기회다. 기도는 누워서 해도 된다. 어떤 사람은 누웠을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고 싶은데 눕기만 하면 금방 잠들어서 늘 아쉬워한다. 고통스런 불면의 밤을 복스러운 기도의 밤으로 만들듯이 고난을 통해 참된 기도를 찾는다면 그것도 복이다.

2. 회개의 복

 예레미야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이 사람을 의지하려고 했던 것과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했다(6-7절). 본문 8-16절에는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의 비참한 현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는 그런 비참한 상황이 자신들의 범죄 때문이라고 탄식했다(16절). 결국 그의 절규는 불평불만의 토로가 아니었고 민족의 죄악에 대한 통렬한 회개 고백이었다. 고난 중에 겸손한 회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고난은 연속해서 올 때가 많다. 연속적인 고난으로 계속 낮아지는 상황을 무엇이 끊는가? 바로 회개다. 계속된 고난으로 앞길이 캄캄해지고 무서워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 잘못했어요. 도와주세요.”라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때부터 올라서는 길이 열린다. 그런 회개를 통해 살인자 사울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다. 고난 중의 회개는 복된 인생을 만드는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다.

3. 영안의 복

 예레미야는 죄로 인해 그들의 마음이 피곤해지고 눈들이 어두워졌고 황폐해진 시온산에서 여우가 놀게 되었다고 했다(17-18절). 거룩한 도성인 시온 산이 여우의 놀이터가 된 것보다 언약 백성에게 더 큰 수치와 비극은 없다. 그 표현은 죄로 인해 마음이 사탄의 놀이터가 된다는 은유적인 뜻도 있다. 고난 중에 내면의 어둠과 사탄의 실체를 깨닫는 영안이 열려 미래를 잘 대비한다면 그것도 고난을 통해 얻는 복 중의 하나다.

 영안이 열리는 복은 큰 복이다. 영안이란 신비한 환상을 보는 눈이나 남의 마음을 신비하게 투시하는 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래의 환상을 보기 전에 현재의 실상을 볼 줄 알아야 선견지명을 통해 내 고난도 막고 남의 고난도 막아줄 수 있다. 또한 남의 마음을 신비하게 투시하는 영안이 있기 전에 남의 마음을 사려 깊게 배려하는 영안이 있어야 행복의 씨앗이 되고 예수님을 닮은 인격적인 성도가 될 수 있다.

 나는 공적인 시간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지만 가족과의 시간 약속은 편하게 여기고 늦을 때가 많았다. 부부동반으로 외출할 때 아내가 집에서 떠나면서 교회에 있는 내게 전화한다. “10분 후에 교회 앞길로 나오세요.” 그러면 조금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까 7분쯤 후에 미리 나가 기다리다가 아내가 조금 늦게 도착하면 하늘이나 사람을 바라보고 기도와 묵상 시간을 가지면 된다. 그런데 그 시간도 아깝다고 10분이 지나도록 일하다가 아내를 기다리게 하고 심지어 아내가 다시 전화하도록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가족끼리 그 정도의 시간 약속 어기는 것은 괜찮게 여기면서 “나는 아주 바쁜 사람이니까 아내가 이해해주겠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해해준다. 문제는 “내가 바쁘니까 가족이 이해해줄 거야.”라고 하면서 이해 받으려는 태도다. 내가 조금 일찍 나가 기다리면 아내의 엔도르핀이 상승해 기쁨을 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예전에는 아내가 식사하러 집에 오라고 하면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10-20분 늦게 출발했다. 요즘은 식사하러 오라고 하면 하던 일을 바로 그치고 일어서는 편이다. 그런 작은 배려를 배우는 데 20년이 걸렸다.

 상대가 부를 때 일찍 가서 상대를 기다리면 상대의 엔도르핀이 증가하지만 늦게 가서 상대를 기다리게 하면 상대의 아드레날린이 증가한다. 그러면 불편한 표정과 말로 인해 어색하고 불편한 일종의 고난 상황이 펼쳐진다. 그 고난을 통해 “다음부터 좀 더 시간을 잘 지키자.”라고 결심하며 상대의 엔도르핀을 증가시켜주고 평안과 행복을 주려는 삶도 영안이 열린 삶이다. 그런 이해심과 배려심도 없으면서 환상을 보고 미래를 본다고 하면 대책 없는 존재가 된다. 이해심과 배려심의 영안이 열리는 기초부터 튼튼해야 복된 미래가 열린다.

4. 희망의 복

 한참 동안 비참한 현실에 대해 탄식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버리심과 진노하심 중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19-22절). 비록 절망적인 현실로 한탄해도 그 한탄까지 받아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성도가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살다 보면 부조리한 상황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면서 절망감이 들 때가 있다. 그때 스스로 고백하라. “절망을 희망으로 만드는 하나님을 신뢰하자.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내 아픔과 상처를 다 아신다. 내가 처리할 수 없으면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라. 고난에 지면 고난이 나쁜 것이 된다. 그때 고난을 통해 배움과 성숙을 얻지 못하면 더 배워야 하기에 또 다른 고난이 주어진다. 그러나 고난을 잘 극복하고 성숙과 승리의 발판으로 만들면 이전의 고난은 좋은 추억으로 기억되고 미래의 고난은 막거나 줄일 수 있다. 잘 극복되고 선용된 고난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 넉넉히 채워주시는 하나님 >

 머리에서 머리칼이 빠지는 부분은 대개 베개가 닿지 않는 부분이다. 베개와 머리가 닿아 머리칼이 짓밟히는 부분에서는 머리칼이 더 튼튼해지고 겨울에 보리밟기를 할 때 봄에 보리가 더 튼튼해지듯이 인생도 단단하고 성숙한 인물이 되려면 짓밟히는 고난의 순간도 필요하다. 땀을 흘리는 것도 일종의 고난이다. 수동적으로 당하는 고난을 막으려면 능동적으로 임하는 고난의 땀을 흘리라. 고난의 순간을 믿음으로 잘 대처하면 하나님의 임재도 체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채워주심의 은혜도 체험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광야 중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체험했다. 여호수아 5장 12절을 보면 가나안 땅의 음식을 먹은 후부터 매일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가 그쳤다. 그들은 축복의 가나안 땅에서보다 고난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더욱 생생히 체험했다. 고난의 광야에서 하나님은 엘리야, 다윗, 바울의 필요도 넉넉히 채워주시면서 인물로 성장하는 은혜를 주셨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수많은 광야를 겪었지만 지금까지 금식할 때나 식사 생각이 없을 때 외에는 돈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식사를 거른 적이 거의 없었다. 공과금을 돈이 없어 못 낸 적도 거의 없었다. 아이들의 필요도 적절하게 채워줄 수 있었다. 가장 은혜로운 사실은 지금까지 잘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광야의 순간을 지나거나 광야의 위기가 코앞에 닥친 적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살 길을 열어주셨다.

 옛날에 미국 유학 갈 때 퇴직금 100만원으로 비행기 표를 사고 물건 부치자 거의 무일푼이 되었다. 그 상태로 미국에서 7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교회 전도사 사역을 하면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지금은 그렇게 못할 것 같다. 신대원 졸업 후 약 100불 들고 귀국해서 거의 무일푼으로 결혼하고 바로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지금은 그렇게 못할 것 같다. 그 후 1998년에 분당에서 다시 무일푼으로 교회를 새롭게 개척했다. 역시 지금은 그렇게 못할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 무모하다고 여길만 했고 스스로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했었다.

 2014년 여름에 2개월 치의 발행비만 가지고 <월간새벽기도>를 창간했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지속적인 공급하심으로 현재까지 55호가 발행되었다. 이번 3월호는 20,200권 발행한다. 1권에 1000원을 받고, 광고도 전혀 싣지 않고, 택배비도 안 받고, 약 9,000권을 무상으로 교정기관과 군에 기증하고, 아직 자립에 안 된 상태에서 선대가 남겨준 재정까지 다 써서 다음 달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지금은 시계 제로 상태다. 아마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지금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그때도 똑같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못할 것 같다.”

 남들에게는 무모하게 보여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믿음과 사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신다는 사실이다. 약 11년 전에 교회에 단체로 등록한 무리가 기존 교인들까지 단체로 몰고 나가면서 교회가 아주 어려웠었다. 그래도 믿음과 평안과 감사는 잃지 않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도 바닥나지 않았다. 믿음과 감사만 잃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채워주심의 은혜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고난의 순간을 영광의 순간으로 나아가는 영적인 4차원의 통로로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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