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성육신의 사랑을 실천하라

by 【고동엽】 2023. 1. 6.

성육신의 사랑을 실천하라 (요한복음 3장 16-21절)

< 성육신의 침묵에 담긴 사랑 >

 얼마 전 한 이단 교주가 성경에 약속된 최후의 낙원인 피지에 가면 피지인을 거느리며 왕처럼 산다고 미혹해 약 400명의 신도를 피지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현지 농장 등에서 일하다 탈출한 신도들은 피지가 최후의 낙원이 아닌 지옥 같았다고 했다. 그들은 여권을 뺏긴 채 감금돼 하루 14시간 넘게 돈도 못 받고 일하고 서로 감시하고 몸 안의 귀신을 내쫓는다면서 타작마당이란 이름으로 폭행을 일삼았다고 증언했다.

 어떤 교인은 맞아서 온몸에 벌겋게 피멍이 든 채 후유증으로 죽었다. 또한 매 맞으며 일하는 삶을 견디다 못한 신도 20여 명은 필사적으로 섬을 탈출했다. 가족도 서로 감시시켰다. 이단을 구분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가정을 버리도록 세뇌하면 대개 이단이다. 왜 이단의 뻔한 거짓말에 넘어가는가? 욕망 때문이다. 왜 이단의 사기가 계속되는가? 뻔한 거짓말에도 속으니까 “어, 이런 말도 통하네.”라고 쾌재를 부르며 계속 속이는 것이다.

 교주가 추종자를 종처럼 거느리는 정신적 쾌락에 빠지면 거짓말이 심화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자기를 높이고 자기 왕국을 쌓으며 남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 이단 교주는 말로는 최고의 영성을 과시하지만 행동을 보면 기본 윤리성도 없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삶을 조금만 묵상해도 이단 교주를 쉽게 분별해낼 수 있다. 피지인을 거느리며 왕처럼 산다는 말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비성경적인 말인가? 그 말에 피지로 이주한 신도들은 일을 시키고 먹여만 줘도 좋은 종처럼 되었다. 왕이 되려고 욕심내면 비천한 종이 된다.

 희생을 모르는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물론 이단 교주도 희생을 크게 강조한다. 그러나 왕 같은 제사장 및 내세의 축복을 약속하며 자기 왕국을 위해 신도의 희생을 강요한다. 화려한 말로 ‘영혼의 때’를 위해 헌금하라고 하면서 그 헌금으로 초대형 교회를 건축해 교주 자신은 ‘이 땅의 때’에 집착하는 모순적인 행동으로 남만 희생시키는 것이 이단 교주의 특징이다. 자기희생이 없이 남만 희생시키는 교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반드시 파멸된다. 자기희생이 있어야 참된 발전도 있고 참된 권위도 서고 마음의 상처도 남지 않는다.

 한 아빠가 자녀의 잘못에 대해 엄하게 야단쳤다. 자녀가 서러워 울다가 이틀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아빠가 자녀와 아픔을 나누려고 말없이 금식했다. 훈계는 꼭 필요해서 했지만 훈계 이후에 성육신의 태도를 가지고 자녀와 마음의 고통을 함께 나눈 것이다. 그 자녀는 아빠가 “네가 잘되도록 금식한다.”라고 광고하지 않았어도 자신과 마음의 고통을 나누려는 아빠를 보면서 아빠의 엄한 징계가 전혀 상처로 남지 않았다. 아빠의 훈계를 상처로 받아들일 틈이 없을 정도로 아빠의 사랑을 훨씬 크게 느꼈기 때문이다.

 한 아빠가 자녀가 주일예배에 빠지자 자녀와 소통을 끊었다. 그런 겉모습만 보고 가끔 지인이 말했다. “자녀와 소통하세요. 자녀에게 상처로 남아요.” 그러나 아빠는 자녀와 소통을 끊으면서 최대한 불편한 삶을 감수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자녀는 “아빠는 내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기를 진심으로 원하시는구나.”라는 것을 무언으로 느꼈다. 그러자 소통을 끊은 아빠로 인해 상처를 받기보다 오히려 깊은 사랑을 느꼈다. 그것도 성육신의 삶이 주는 치유의 능력이다.

 소통은 말을 많이 나눠야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언뜻 생각하면 전화와 문자를 많이 해야 목회를 잘할 것 같지만 침묵을 잘하는 사람이 목회를 잘하는 경우도 많다. 침묵도 좋은 소통 수단이다. 그 중에 최고의 소통 수단은 사랑이다. 쉽게 “소통하세요.”라고 말하지 말라. 어떤 교인은 늘 소통을 강조했지만 자신이 교인 중에 제일 소통을 못했다. 말의 내용보다 누가 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본받을 만한 존재의 말은 무게 있게 영혼을 울리지만 본이 안 되는 존재의 말은 무게 없이 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침묵에는 ‘속상함의 침묵’과 ‘성육신의 침묵’이 있다. 후자의 침묵은 자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부모가 가끔 자녀 앞에서 후자의 침묵을 하는 것은 자녀의 현재와 앞날을 위해서다. 자녀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어 불안감도 없애고 침착성도 기르고 침묵을 통한 교훈의 영상도 깊이 오래 남기려는 조치다. 너무 자녀를 사랑하기에 후자의 침묵을 하며 내일의 더 좋은 날을 위해 현재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 대개 좋은 결과를 낳는다.

 성육신의 침묵을 모르는 불신자는 교육심리학의 원리대로 쉽게 충고한다. “자녀와 더 소통하세요.” 그러나 성육신의 사랑이 없이 많이 소통하면 좋다는 것은 피상만 보는 피상주의다. 말을 많이 해야 소통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침묵도 메시지를 간절히 전하는 하나의 소통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 침묵의 밑바탕에 성육신의 사랑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지상 최대의 소통 도구는 ‘성육신의 사랑’이다. 하나님도 인간과의 소통을 위해 조용히 베들레헴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는 ‘성육신의 사랑’이란 소통 방법을 택하셨다.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 >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이 잘 요약된 구절로서 하나님의 성육신의 사랑을 잘 나타낸다. 그 사랑을 알면 모든 인류가 독생자 예수님을 믿고 심판을 피할 것 같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해서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18-19절). 진리를 따르는 삶이란 빛 되신 예수님께 오는 것이다(20-21절). 예수님께 와서 열린 마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반응해서 성도의 할 일은 무엇인가?

1.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이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면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왜 가끔 문제가 생기는가?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선순위가 어긋나지 않도록 일깨우는 도구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요 21:5). 그 물음은 지금도 하나님이 하시는 질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확실한 길이고 모든 능력의 원천이다.

 파스칼이 철학자로서 하나님을 탐구할 때는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지만 그가 병들어 어린애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 하나님이 나타나 구원하셨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지식보다 사랑이 우선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 안에서 순종적인 삶을 체질화시켜야 한다. 사랑과 순종은 일란성쌍생아와 같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보다 순종적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

 사랑에는 ‘목 위 사랑’과 ‘목 아래 사랑’이 있다. 목 위 사랑은 머리와 혀로 사랑하고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다. 반면에 목 아래 사랑은 가슴으로 사랑하고 손과 발을 움직여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목 위의 추상적인 사랑만 있으면 영혼은 점차 병든다. 목 위의 추상적인 사랑이 목 아래의 순종적인 사랑으로 진전되어야 영혼이 풍성해진다. 믿고 순종해도 때때로 시련이 찾아오지만 그 시련을 잘 이겨내라. 믿음의 시련에서 탈락하면 뒤따라오는 축복을 놓치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믿고 순종하면 축복의 열매를 풍성하게 얻는다.

2.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라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원천이면서 이웃 사랑으로 실증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달하라. 이웃 사랑은 나를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웃을 사랑하면 내 영혼부터 살고 축복 받지만 이웃을 미워하면 내 영혼부터 죽고 축복도 잃는다. 지나친 경쟁심을 버리고 사명을 따라 살라. 뚜렷한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의 경쟁 체제에 편입되지 않는 것도 축복이다. 경쟁적인 강탈보다 창조적인 확장으로 지경을 넓히라. 경쟁심이 지나치면 낮은 차원의 성공은 해도 높은 차원의 성공은 못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성도의 진짜 싸움 대상은 사람이 아닌 사탄이다. 사람과 지나치게 경쟁하면 믿음과 축복의 높은 고지를 차지하기 힘들다. 남이 바르게 잘 되면 축하해주고 잘못된 길로 가면 불쌍히 여기라.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을 경쟁 대상이 아닌 사랑 대상으로 보라. 왜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는가? 사랑과 사명감을 가지고 영혼 구원에 열심을 내고 죽도록 충성했기 때문이다.

 어디서든지 충성스런 일꾼이 되라. 적당히 일하는 것은 오히려 힘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눈치 보면서 자꾸 시계를 보면 시간이 더 안 간다. 열심히 일해야 시간도 잘 간다. 누가 보거나 보지 않거나 내가 맡은 일은 열심히 틀림없이 하라. 바울의 놀라운 충성이 어디서 나왔는가? 사랑이다.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넘쳤기에 예수님을 위한 열심도 넘쳤다. 사랑이 있으면 저절로 충성하게 된다.

 왜 부모가 충성스럽게 자식을 위해 일하는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살림하는 주부는 자녀가 수학여행 떠나고 남편도 저녁 먹고 온다고 하면 저녁식사를 혼자 대충 먹는다. 그때는 한 끼 식사 준비도 힘들게 느낀다. 자기만을 위해서는 식사 준비를 안 해도 남편과 자녀를 위해서는 반찬 하나라도 더 맛있게 준비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행동이다. 사랑하기에 충성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지혜도 생기고 행복도 넘친다.

< 성육신의 사랑을 실천하라 >

 부모가 힘들게 일해도 집에 들어가면 자녀가 반기는 맛에 산다. 열심히 돈을 벌어 사랑을 베풀어줄 자녀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자녀가 없으면 돈 버는 힘도 약해진다.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은 거의 없다. 남자가 혼자 살면 돈을 잘 모을 것 같은데 오히려 모으지 못하는 것도 돈 버는 힘과 절제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혼자 쓰면 남아서 많이 저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부모가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는 이유는 많은 경우에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능력과 지혜와 평화의 원천이다.

 바울의 사랑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바울의 사상도 나왔다. 평화는 옳고 그른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평화를 깨는 정의는 바른 정의가 아니다. 불의가 평화를 깨뜨리지만 때로는 정의도 평화를 깨뜨린다. 어떤 정의가 평화를 깨는가? 사랑이 없는 정의다. 옳다는 생각이 다 정의가 되지는 않는다. 사랑이 아닌 미움, 나쁜 분노, 교만, 열등감에 담긴 정의는 ‘변질된 악’이 될 수 있기에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겉으로 지나치게 강해 보이는 것은 실제로 약한 것이다. 사람 외투 벗기는 내기에서 바람과 태양 중 누가 이겼는가? 바람이 세게 불자 나그네는 옷을 더 꽉 잡았다. 옳은 말도 너무 강하게 하면 더 방어막을 치지만 태양이 내려쬐듯이 부드럽게 사랑으로 얘기하고 더 나아가 성육신의 침묵으로 대하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다.

 옳은 것만큼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것이 낫다. 의분이 생길 때 기도하라. “하나님! 미움보다 사랑을 앞세워 잘 분별하게 하소서. 잘 분별한 후에는 선한 길을 닦는 데 생명을 걸게 하소서.” 각 사람이 가진 장점은 단점을 넉넉히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많다. 문제는 단점을 확대해서 장점을 가리는 것이다. 성육신의 사랑만 있으면 장점이 훨씬 크게 보인다. 그 장점을 보면서 오래 참고 침묵해야 그를 통해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도 더해진다.

 금년 4월에 얼라이언스(미국 성결교) 한국 총회가 생기고 법과 조직이 세워지면서 여러 번 진통이 있었다. 법 해석의 갈등과 직무 범위의 갈등이 특히 컸다. 옛날에는 교단 회의를 하면서 진통이 커졌는데 요새는 전화, 문자, 카카오톡을 주고받으며 진통이 커졌다. 문자와 카카오톡은 기록이 남기에 상처의 흔적도 더 진하게 남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필자는 몇몇 실행위원들에게 카카오톡 문자를 자제하고 침묵 시간을 조금 더 갖자고 했다. 실제로 그런 침묵으로 인해 이전의 몇 번의 진통도 비교적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성육신의 사랑이 없으면 옳은 말도 일단 멈추라. 사랑 없는 옳은 말이 교회와 공동체를 어지럽힌다. 내가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잘못은 드러나고 진리만 남는다. 팩트 설명이나 충고도 오래 기다렸다가 해야 공감도 되고 갈등과 상처도 줄어든다. 모든 갈등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성육신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는가? 깨달음만으로는 힘들고 더욱 큰 사랑을 받아야만 실천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성육신의 사랑을 이웃으로 잘 흘려보내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