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회복을 도우라 (요한복음 20장 24-29절) < 감정 터치를 해주라 >
실패한 사람을 일으킬 때는 감정의 터치가 중요하다. 감정의 터치를 통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날 때 그 만남의 의미가 깊어진다. 자녀가 학교에서 야단맞고 돌아와 그 말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 “네가 야단맞을 짓을 했겠지. 그것 가지고 뭘 그래.”라고 하지 말고 야단맞을 짓을 했어도 먼저 감정을 받아주고 위로하라. “마음이 상했겠구나. 지금은 좀 풀렸니?” 자녀가 자신의 부끄러운 일을 부모에게 말하는 것은 자기감정을 알아달라는 뜻이다.
먼저 감정을 받아주어야 그 다음 단계의 교육이 된다. 그러면 이미 인정을 받았기에 자기 잘못도 순순히 인정한다. 감정을 받아주면 잘못도 인정하지만 감정을 받아주지 않으면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다. 조급하게 자녀의 감정을 무시하고 어른 입장만 내세우지 말라. 자녀는 꾸중들 때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했음을 대개 안다. 그 잘못을 확인시키려고 하기보다 감정을 먼저 받아준 후 잘못을 깨우쳐주라. 감정을 터치한 후 교육해야 참된 교육이 이뤄진다.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탓하기보다는 그의 철없는 요청대로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했다(27절). 그러자 도마는 자기감정을 받아준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감동해 마침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28절). 실패자의 감정을 받아주면 실패를 딛고 일어설 가능성도 커진다. 예수님처럼 감정 터치의 프로가 되라. 성도는 남을 기쁘게 하는 존재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을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했다.
늘 남만 기쁘게 하며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남의 감정을 생각해 조금 더 남을 배려하며 살라. 선을 베풀 때는 “내가 이렇게 선한 사람이지.”란 자부심까지 버리라. 사탄은 선행을 통해서도 틈탄다. 선을 행한 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자신이 영광을 받으면 그때 사탄이 미소를 짓는다. 칭찬을 기대하며 베푸는 선행은 ‘사랑’이 아니라 ‘자랑’이다. 칭찬과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과 배려가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보상을 준다.
서로의 감정을 만져주고 서로 받아주고 서로 살펴주라. 맘에 들지 않는 사람도 “그 사람 정말 재수 없어. 생각만 해도 짜증나.”라고 하지 말고 “그렇게 살면 얼마나 상처도 많고 외로울까?” 하고 불쌍히 여겨주라.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줄 때다. 그러면 마음에 기쁨과 행복과 사랑이 점점 고이고 동시에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고 그의 사업과 가정과 자녀를 일으켜 세워주신다.
< 믿음 회복을 도우라 >
도마의 감정을 위로한 후 예수님은 그의 마음이 열린 것을 보고 말씀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예수님이 가장 원하신 것은 믿음이었다. 보았기에 믿지 말고 기적 때문에도 믿지 말라. 기적이 없고 어려움이 생겨도 믿음을 고수하는 참된 믿음을 하나님은 더욱 기억해주신다. 그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얼마나 귀가 닳도록 말했겠는가? 그래도 도마는 뭔가 보고 느끼기를 원했다. 그는 믿음보다 현상을 중시했고 자기 이성에 충실했지만 예수님은 이성이 아닌 믿음을 찾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겠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믿는 자에게 아버지로서 만나주신다. 왜 삶에 불안감이 커지는가? 인간의 옅은 이성적인 지식 때문이다. 호머의 <오딧세이>에서 영웅 유리시즈가 사일런트 섬을 지날 때 마녀의 소리를 듣고 그것이 마녀의 소리임을 알았기에 불안과 공포로 몸부림쳤다. 그 후 시인 오르페즈가 그 섬을 지날 때는 마녀의 소리에도 그냥 노래하며 지나갔다. 그것이 지식과 믿음의 차이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불안이 없다.
도마에게 주신 음성을 내게 주신 음성으로 듣고 기적적인 응답이 없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라. 사람은 마음이 있어도 다 돕지 못하고 돕더라도 때때로 잡은 손을 놓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나를 도와주실 수 있다. 파스칼은 팡세 430편에서 말했다. “우리의 유일한 불행은 신으로부터 이탈하는데 있다. 사람에게서는 진리도 위안도 기대하지 말라.”
인간의 사랑은 순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나를 택하셨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오늘까지 함께 해주신 하나님이 내일도 보호해 주실 것이다. 고통이 다가오면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든지 아니면 그 고통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살다 보면 때로 막힌 문을 만나지만 그때 포기하지 말고 계속 두드리고 밀쳐보라. 그러면 언젠가 문은 열리고 거기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길은 뜻밖에 가까운 곳에 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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