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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선택한 성공! (창 39:1-6)
MBC 문화방송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드라마였던 '성공시대'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1997년 11월 IMF의 한파가 밀어닥치는 그 어려운 때에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프로였습니다. 지난 11월 4일 박세리 선수 편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마는 주제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성공의 원동력이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성공을 했나? 하는 것을 말해주는 그러한 의미 깊은 그런 테마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들 다시 말해서 성공시대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들은 운명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처한 처지가 숙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것이 공통점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재능을 살렸습니다. 희한한 어떤 다른 능력 다른 환경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즉, 천재적 능력이나 높은 기술적 능력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을 작던 크던 그것을 다 통해서 성실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아니 일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 즐겼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박세리양으로 말해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그 딸을 골프선수를 만들기 위해서 피나는 아주 엄하고 고된 훈련을 시켰습니다. 담력을 키운다고 해서 어린아이를 공동묘지에 갔다버리고 왔습니다.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메고 산을 오르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15층 아파트를 아버지는 승강기 타고 올라가면서 "너는 걸어올라 오라. 뛰어 올라 오라. 세 번씩 뛰어올라 오라." 뛰어내리고 뛰어오르고……. 이렇게 해서 힘을 키웠습니다. 또 그는 아주 엄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무섭게 책망을 했습니다. 호되게 훈련을 시켰지마는 중요한 것은 이 박세리양은 골프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아버지 같은 사람하고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가하면 그 박세리양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 뭐냐하면 "그따위로 하려면 골프 그만둬!" 그 말이 제일 무서웠답니다. 왜요? 골프가 즐거우니까. 그렇게 무서운 훈련을 받으면서도 골프만은 즐겁게 생각을 했어요. 그게 성공의 비결이에요. 즐겼어요. 더욱 중요한 것은 남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성공했다고 하지만 본인들은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남들이 성공했다고 축하할 뿐이지 본인은 아니요. 왜요? 아직도 아니니까. 좀 더 두고봐야 할 문제니까. 이것이 복이 될는지 화가 될는지 Nobody knows. 그런 고로 이 성공이라고 하는 과정 속에서 현재라고 하는 시점을 성공의 종착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거예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가 이렇게 부정하고 있고요. 또 흔히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성공시대에 나와달라고 부탁을 했지마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절을 했습니다. "남들은 뭐라고 하는지 몰라도 나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절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네번째는 이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그 어려운 환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습니다. 기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처한 이 역경 이 자체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 성공이란 소유도 지식도 지위도 명예도 아닙니다. 성공이란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고 어떤 지위에 올랐느냐가 아니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것도 아닙니다. 성공이란 존재의 문제입니다. Being입니다.
Being에서 becoming 으로 갑니다. 그래서 되어야할 존재로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공이란 되어지는 과정일 뿐이지 성공이란 어떤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성공한 자로 계속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왔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스스로 행복하냐. 그것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행복해야 됩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됩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어야 됩니다. 혼자만의 행복은 성공이 아닙니다. 삶의 가치란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올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했느냐 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또 문제 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떤 사람으로 남느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느냐. 거기에 성공을 말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 중에 아파치족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잘 모르지만 영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여러 인디언 중에도 아파치족은 가장 강한 그런 족속이었던 같습니다. 어느 아파치족의 추장이 나이 많아서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때 후임을 정하기 위해서 많은 시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체력·지혜·인품이 출중한 사람을 고르기 위해서 활쏘기도 하고, 말달리기도 하고, 씨름도 하고, 여러 퀴즈도 내고, 많은 시험을 거쳤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마는 다… 다 떨어져 나가고 세 사람이 남았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하나가 추장이 될 때에 그 추장은 말하기를 "너희는 저 뽀얗게 보이는 저 높은 산정에 올라갔다가 내려 오라"고. 길도 없는 험한 산을 죽기살기로 세 사람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려왔는데 한사람은 산정에만 있는 특별한 꽃 한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이 산꼭대기에 있는 꽃입니다." 또 한사람은 매끈매끈한 돌을 하나 가지고 와서 "이것이 산정에 있는 특별한 돌입니다. " 하고 내려왔어요. 산정까지 올라갔던 증거입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너는 무슨 증거가 있느냐?" 그러니까 "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추장은 대노했습니다. "산정에 올라가라고 했는데 어째서 넌 그냥 내려 왔느냐!" 그는 말했습니다. "저는 먼∼ 산 넘어 저쪽을 보고 왔습니다. 거기는 아주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비옥한 땅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머지 않아 저 산을 넘어 저쪽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하겠습니다. 아주 비옥한 꿈을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그럴 때에 나이 많은 추장은 "네가 다음 추장이다." 그를 임명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보다 멀리 보다 더 먼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거기에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요셉이라는 사람, 그는 성공한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그가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신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자기 자신 앞에 신실한 사람이요.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믿어주었습니다. 진실을 믿고 그 능력을 믿어주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는 empowering leadership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신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신바람 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일하게 하고, 능력 있게 하는 empower leadership. 그래 그가 일하면서 많은 사람이 기쁨으로 힘차게 일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비록 그는 노예였지마는 정신적으로는 주인이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특별하게 유달리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간 다음에는 노예 중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고, 많은 사람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고, 오늘 성경말씀대로 '가정 총무를 삼으니라.' '아무 것도 관계하지 않고 네 맘대로 하라.' 모든 것을 내 맡겼습니다. 그만큼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죄수가 되었을 때는 같은 동료 죄수들로부터 그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 앞에 섰을 때에 전적으로 왕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것이 요셉입니다.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인격이었습니다. 그러한 인품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성공입니다. 그는 환경과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바뀌던 그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진실했고 성실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는 과거의 노예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의 과거가 어떻습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형이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그것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노예로 한번 팔리면 일생 노예입니다. 그 자손도 노예입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났지, 그 비참한 노예…….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친형이 동생을 노예로 팔았는데 이렇게 팔려간 요셉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그 한을 생각한다면 아마 정신병이 돼 죽었을 거예요. 가슴이 터져서 죽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그는 지난날을 깨끗이 잊었습니다. 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봅니다. 한이 있었던 것은 압니다. 어려운 고비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한풀이에 남은 일생을 다 바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은 한입니다. 그것으로 지나가야지 이제 그 한을 풀어 보겠다고 거기다가 운명을 걸어요? 또 하나의 비참한 것이에요. 지난날의 억울한 것도 억울한데, 이제 또다시 소중한 현재와 미래를 그 과거에 바쳐 버릴 것입니까? 과거 때문에 망쳐야 되는 것입니까? 요셉은 그런 점에서 훌륭합니다. 그 억울한 한을 품고도 자유했습니다. 온전히 자유한 심정으로 살아서 그리고 전혀 소망이 없는 노예생활에서 말입니다. 뭐, 잘해도 노예고 못해도 노예고 노예로 살다 노예로 죽을 것이요. 진실할 건 뭐 있고 충성할 건 뭐 있습니까? 모든 노예가 그랬듯이 그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그에게 도덕성을 물을 필요는 없는 것이에요. 옛날부터 그런 논리가 있지 않습니까? '가난은 무죄다! 피압박자는 무죄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도적질 할 수 있다!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내가 좀 빼앗아도 죄가 안 된다.' 너무나도 억울함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요셉은 이 논리에서 벗어났어요. 완전히 자유했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는 노예생활이지마는 그는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실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정체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했습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용모가 아름다웠더라. 아담하였더라. 이 보디발의 이 주인의 아내가 이 남자를 탐을 냈어요. 어느 조용한 시간에 끌어들여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자' 했죠.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상이니까 그 옆에 우상이 있는데, 그 우상에다가 치마를 벗어서 갖다가 덮어놓고 보라고 못 보지 않느냐고 괜찮다고. 그때에 요셉이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믿는 저런 우상은 못 보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런 고로 안됩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갑니다. 그래도 그는 성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경건하게 신앙인의 정체의식을 분명히 하고 거기다가 운명을 걸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살든 죽든 진실할 것이요 성실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간단하게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십자가 앞에서 계속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 부정적인 생활이다. 십자가 앞에서 욕심도 버리고 질투도 버리고 시기도 버리고 절망도 버리고 명예욕도 버리고 다 버리는 거요. 깨끗하게 버려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어디까지 버렸느냐, 그것의 그의 경건이다.
또 하나는 신앙인의 생활이란 순례적인 것이다. 순례자를 보세요. 그는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종착지가 아닙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필그림(Pilgrim),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집이 있다고 내가 오래 살 것입니까? 돈이 있다고 오래 살 것입니까? 이 땅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요. 그건 분명합니다. 다 버리고 다 떠나야 합니다. 가끔 아들 딸 시집 장가 다 보내놓고 두 늙은이만 앉으니까 너무 허전해 가지고 앵앵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울긴 뭘 울어 본래 그랬던 건대요. 앞으로도 그럴 건데요. 인생은 나그네요. 하나의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이에요. 그런 고로 절제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에요.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욕심을 부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마음 둘 것도 없고요 훨훨 털고 일어서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순례의 길을 가고있는 것이요. 하늘나라를 향해서 말입니다. 요셉은 그러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먼 길을 바라보고 오늘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오늘 본문성경에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렸다 그랬어요. 이 점이 너무 아름다워요. 요셉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 집에 복을 내리신 뿐만 아니라 보디발이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 복덩어리가 들어왔다. 저 사람 때문에 우리 집에 복을 주시는 구나. 우리 농사가 저 사람 때문에 잘되는구나. 내가 하는 일이 저 사람 때문에 잘되는 구나.' 복의 근원이 됐어요. 그런 감동을 주었어요. 그런 확신을 주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특별히 창세기 45장에 가서 그는 유명한 간증을 합니다. 형님들을 만났을 때, 형님들이 벌벌 떨며 두려워 할 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나를 팔아먹어서 내가 팔려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Not sold but sent, 나는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의 사명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중국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군자가 가지는 수치가 있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군자오치(君子五恥)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 수치가 있는데, 첫째는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 이게 군자 수치예요. 두 번째는 마음속에 성의가 없어요. 성의가 외모를 따르질 못해요. 그 진실과 성의가 없는 것, 그게 군자답지 못한 거예요. 또 하나는 내실이 없는 거예요. 겉보기만 뻔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거예요. 그건 군자답지 못한 부끄러운 거예요. 자신의 역량을 모르는 것이 군자의 부끄러움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것 같은, 그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군자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아야합니다. 다섯째는 행한 일을 끝까지 이루지 못해요. 시작했으면 끝내야죠. 마지막을 잘 마치지 못한다면 그는 군자답지 못해요. 군자의 부끄러움이예요. 요셉은 시작도 좋았고 과정도 좋았지만 마지막은 더더욱 좋았습니다.
여러분, 그가 선택한 성공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바른 길이었습니다. 그의 성공의 길은 오직 성실함이었습니다. 신임 받는 인격이요 주도적 인격이요 그리고 결국 복의 근원이 됐습니다. 복의 근원이 됐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성공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을 막연히 기다리면서 오히려 성공을 역행하며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복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성공적인 길을 가게 하시고 그 어디서든지 주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의식을 분명히 하고 나 스스로 은혜에 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은혜의 길로 인도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그런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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