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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분량대로(롬12:1~13)
지난 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윤리,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한 총론적인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첫째로, 이는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진 그러한 존재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한가지, 이것이 영적 예배다, 항상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만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런고로 성전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항상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성전의 그 영역과 그 의식이 점점 더 넓어지는 생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가정이 교회가 되고, 직장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터가 되어서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영적 예배로 드려지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하는 것을 조목조목 설명해나갑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첫째로 주시는 말씀은 '생각'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3절)"-특별히 이 생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나, 혹은 이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여기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생각할 바 보다 높이 생각하지 말라, 하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먼저 그 영이 구원을 받습니다. 영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생각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생각이 구원받게 될 때에 그 인격 전체가 구원받은 바 되고, 다음으로 그 생활이 구원받은 자의 생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이 먼저예요. 그 다음이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건강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각을 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말 아닙니까? 우리가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이래저래 떠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먼저 아는 것이다, 이것부터 먼저 알아야 된다-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오늘의 본문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내용의 근본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바로 자기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에요.
자기는 '부분'이라는 것이에요. 부분--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큰 공동체 안에 내가 한 부분이라는 말씀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아니에요. 나 하나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예요.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안에 나라고 하는 작은 실체가 있는 것이에요.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으로 알지도 말고, 그 이하로 생각하지도 말아라 함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self-identity, 자기 정체가 분명해야 됩니다. 그런데 자기 정체를 너무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저 '나는 소우주다. 내가 우주다'-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건방진 생각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계시고 내가 있어요. 부모가 있고 내가 있어요. 형제가 있고 내가 있어요. 나라고 하는 정체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 자체의, 존재의 독립된 성격도 알아야겠지마는, 전체에 속한, 예속된 '나'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하자면 '철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고 전체를 봐서는 안돼요. 심리학적으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자기만 생각해요. 그 심리를 심리학적 차원에서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그런고로 '어머니는 왜 존재하느냐?-나를 위해 존재한다' '어머니의 젖은 왜 돌이냐? 하나는 먹으라는 것이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것이다' '오빠는 왜 존재하느냐? 내가 타고 놀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누구냐? 나를 위해 돈벌어오는 사람이다'-이렇듯 전부 나를 중심해서 생각해요. 나만이 최고예요. 하지만 조금 크면 얘기가 달라져요. 내 밑으로 동생이 태어나거든요. 그러니까 사랑이 동생에게로 쏠립니다. 그래서 이제는 달리 생각합니다. 형이 있고, 동생이 있고, 중간에 내가 있지 않아요? 그래서, 사과가 하나 있으면 '저 사과의 반은 내 것이고 반은 형님 것이다'-이런 생각을 해야지요. '전부 내 것이다'-이것은 유치한 거예요. 사실이 그렇지 않아요. 그렇듯 자라면서 차츰 하나님의 큰 세계를 이해하고, 그 속에 내가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각한 바, 그것보다 높이 생각하지 말라'--이렇게 말씀합니다. 바울의 유명한 '지체론'입니다. 나는 교회의 일원으로, 교회의 한 부분의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는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고 27절에 자세하고도 길게 설명을 합니다. '지체' 라고 하는 것은 사대적 중요성과 절대적 가치를 균형 있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유명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도록 용기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할 수 없는 것, 고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수요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냉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그런 경우가 많아요. 사업가튼 것도 그렇습니다. 이미 다 틀린 일이에요. 그렇다면 실패했다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지요. 그런데 흔히들 '남들이 날더러 실패했다고 하는 말을 나는 도저히 들을 수 없다'-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사실인데 어떻게 할 거예요? 이렇게 되면 고민이 많아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우리는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은 기다리고 할 수 있는 것은 한다-이것이 바로 진실한 자기 정체 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서 내가 있다-이렇듯 나를 생각할 때에 내가 나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는 그런 지혜를 가져야 됩니다. 그런 바른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로, 나는 사랑 받는 존재다 하는 현실성을 인정해야 됩니다. 가만히 보면 나는 사랑을 못 받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못 받았다면 애시당초 나는 없어요.
알거나 모르거나 우리는 사랑 속에 살고 있어요.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속받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기 정체를 이해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겠다는 것을 수용해야 됩니다. 때때로 이런 경우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 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 안해요. 그리고는 스스로 절망하는 거예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러분,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지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죽을 죄인입니다. 영원히 죽을 죄인입니다' 한다면 어떻게 죄는 거예요? 이것은 사랑에 대한 욕입니다. 여러분이 혹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이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하고는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고 괴로워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용서합니다. "괜찮다. 잊어버려라." 그러면 "감사합니다"하고 벌떡 일어나서 용기를 내야지요. 그런데 "저는요, 지금뿐만이 아니라 또 실수 할 거예요. 구제불능이에요. 그저 부모님들 앞에 죄송할 따름이에요" -이렇게 주저앉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또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엄청나 모독이에요. 그런고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을 때,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는 자기를 바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따라서 내가 나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나를 바로 생각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아무나 하는 것예요? 더구나 우리 교회 성가대에서는 요새 오디션을 해요. 시험을 보지요. 시험을 봐서 '틀렸어'하면 낙제예요. 그런데 여기에 떨어진 사람이 제 방에 들어와서 "목사님, 어떻게 좀 해주세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가대장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성가대 지휘자가 하는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을 다시 붙여줄 능력이 없습니다. 왜요? 은사가 없으니까요. 음치 하나가 있으면 성가대를 다 망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되지요. 성가대는 성가대대로 할 사람이 있고, 또 교회학교 교사도 그래요. 그것도 아무나 가르치겠다고 나서면 큰일나요. 사실은 가르치는 것도 문제예요. 그것도 은사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어요. 아무나 하겠다고 뛰어든다고 그게 됩니까? 그러면 학생들 다 잃어버리고 말아도. 다 도망가고 말아요. 모름지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내게 주신 은사를 내가 바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항상 말씀합니다.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내게 주신 은사대로-그는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유대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고,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도 그는 '유대사람에게 복을 전하는 것은 베드로가 하고 나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다, 나는 이방인의 사도다'-이것을 강조하고 있어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태로부터 하나님께서 택정하셔서 이방사람의 사도로 준비시키신 사람이다'-이것을 자기가 알고 있어요. 그 은사, 내게 주신 은사를 아는 거예요. '민족애나 애국심에 호소해 가지고 어쨌든 간에 유대사람을 위해서 일한다고 억지쓸 것이 못되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맡길 것이요, 나는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렇듯 내게 주신 은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그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이 은사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Use gift, 그 카리스마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카리스마를 활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돈으로 말하면 돈을 잘 써야 됩니다. 무엇이든지 그래요. 잘 써야 됩니다. 활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걷지 않으면 다리를 못쓰게 돼요. 움직이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하게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도 자꾸 써야 돼요. 나이가 많으면 치매현상이 온다고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 잊어버려도 책을 보라고 하는 거예요. 잊어버려도 책을 봐야 해요. 그래야 치매를 막을 수 있어요.
책 읽기 싫으면 바둑이라도 두라고 하잖아요? 어떻든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야 나이가 들면 생각하기가 싫어요. 그저 멍청하게 앉아 있어요. 그러면 뇌세포가 다 죽어버리고 말아요. 자꾸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서 말을 해야 됩니다. 말을 많이 들어야 됩니다. 이렇게 저렇게 자꾸 뇌를 써야 됩니다. 뇌도 써야 발달하지요, 책도 자꾸 야 보게 되지요. 벌써 책 안본 지 몇십 년 되는데 뭘 보나, 하면 끝난 것예요.
정말 치매 와요.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육체도 써야 되고, 머리도 써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은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다 감당해야 됩니다. 자꾸 써야 돼요 여러분, 우물의 물은 자꾸 퍼서 써야 됩니다. 자꾸 퍼서 길어내면 점점 더 좋은 물이 나는 거예요. 물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그 우물은 못쓰게 되고 말아요. 썩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100% 다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은사에 대해서는 생각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릇 은사란 어떤 재능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기회일 수도 있고, 지혜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위치나 자기에게 주어지는 또 한 가지, 은사는 응용해야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 다음 것을 계발하고, 그 다음으로 자꾸 발전시켜나가야 됩니다. 무엇보다 그 마음속에 깊이 생각할 문제가 하나 있어요. 바로 은사를 특권으로 아는 것입니다. privilege 이것은 내게 주어진 특권이다--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늘 은사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감사해야 됩니다. 그럴 때에 새로운 은혜의,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공무라는 사람과 자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 다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관리였습니다. 나중에 공자는 두 사람을 앞에 놓고 물었습니다. "자네들이 지금까지 관리생활을 해오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이에 공무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잃어버린 것만 많습니다.
공무에 쫓기느라고 일하느라고 독서할 시간이 없어서 공부도 못하고, 봉급은 적어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도 힘들었고, 바빠서 친구들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방문하지 못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방문하지 못해서 점점 친구들과 멀어지고, 급기야 친구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보니 참으로 다 잃어버린 것밖에 없군요." 그런데 자천은 반대로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많습니다. 실제로 관리생활을 하면서 이제껏 배운 것을 실천하게 되고, 그러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됐습니다. 비록 봉급은 적었지만 식구들과 같이 먹고살기에는 넉넉했고, 또 다소나마 친척들을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공무에도 무척 바빴지마는 그 바쁜 중에도 오히려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됐습니다. 비록 옛 친구는 잃었지만, 관리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지요.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잃어버린 것은 없고 얻은 것만 많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자천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자천, 자네는 정녕 군자로구먼. 노나라에 자네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노나라의 복일세"
보세요. 똑같이 일을 했는데 한 사람은 얻은 것은 없다 다 잃어버렸다고 하고, 한 사람은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런고로 시간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일, 그 은사를 다하여 일할 때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일하게 하시니 감사하고, 이런 기회를 주시니 감사하고… 가령 여러분이 누구에게 무엇을 베풀고 봉사할 때에는 받은 자가 되지 않고 주는 자가 되는 것을 감사하세요. 병원을 방문했을 때에는 누워서 방문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방문하는 사람이 됐으니 감사하세요. 정말 그렇지 않아요? 순간 순간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 늘 감사하는 마음, 은사에 대한 감사, 그 감격이 먼저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은사를 다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나니(4절)"-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다, 주인은 하나요, 목적도 같지마는 직분은 다 다르다, 은혜는 같으나 은사는 다르다, 이렇듯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다양한 기능 속에서 내게 맡겨진 일을 할 것이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보듯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서로 지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서로 지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협력해야 합니다. 내가 아프면 저도 아프고, 저가 불편하면 내가 불편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7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디아코니아'를 말합니다.
'service'입니다. 헬라어로 이 말씀은 '디아코니안 앤 테 디아코니아'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섬기는 일로'라는 말입니다. 아주 귀한 뜻이에요. 이것은 바로 섬길 때에는 오로지 섬기라 함입니다. 흔히들 처음에는 섬기다가 그 다음에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섬기는 일은 끝까지 섬기는 일로, 끝까지 봉사로 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그런 경우가 많아요. 처음에는 봉사하는 마음, 주는 마음으로 잘 시작했다가 얼마 지나서는 섭섭하다고 그래요. 본디 섬기기로 한 것인데, 섬겼으면 그만이지 뭐 그리 말이 많아요? 그렇지 않아요? 섬기는 일은 섬기는 일로, 그것으로 끝내라는 말이에요. 처음 시작했던 마음 그대로 가야 해요. 중간에 동기 변화가 와서는 안돼요. 목적이 바뀌어도 안돼요. 생각이 달라지면 안되는 거예요. 섬기는 일은 섬기는 일로--특별히 교회라는 것은 섬기기 위한 것 아니에요? 봉사하는 거예요.
끝까지 봉사해야지 이 봉사가 수단이 되든가, 여기에 다른 목적이 있든가, 다른 동기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처음부터 섬기기로 시작했으니까 섬기는 것으로 끝내야 된다-이렇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는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7절)"-이것 또 한 재미있는 말씀이에요. 진리를 가르치면 진리를 설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분수를 넘어서 가르치면서 자기를 말하고 있어요. 여기서 잘못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뿐이에요. 그런데 내가 진리를 창작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때에는 내가 진리를 창조하려고 들어요. 이게 잘못이에요. 가르치는 자는 오직 가르치는 일로 끝까지 가르치는 거예요. 그것으로 끝을 내야 합니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진리 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교육이란 마치 생선을 졸이든가 굽는 것과 같다' 여러분, 생선을 졸일 때에 어떻게 합니까? 신선한 생선에 이런 양념 저런 양념을 다 한 다음에 불 위에다 올려놓습니다. 이때에 아주 불을 약하게 해 가지고 천천히 익혀야 합니다. 그런데 성미급한 아낙네들은 이렇게 뒤적였다 저렇게 뒤적였다 해요. 그러면 마지막에는 생선이 다 부서지고 말아요. 아예 '짬뽕'이 되어버려요. 원형이 없어져요. 그래서 이게 원래 무슨 물고기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이것이 잘못하는 거예요. 그런고로 원형은 놓아두고 그것이 잘 익도록 불만 살살 때야 하는데, 그냥 휘저어 가지고 원형을 이지러뜨리면 안되다, 그 말이에요. 교육이란 그 사람이 가진 본래적인 잠재력이 있고, 본래적인 인격이 있어요. 그것을 그대로 계발해나갈 수 있도록 내가 돕고 있는 거예요. 잘 알아듣도록, 이렇게 저렇게 자기 스스로 깨달아나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게 뭐냐, 라고 쥐어박다 보니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원형을 잃어버렸어요. 가르친다고 하다가 아이들 울리는 수가 많아요. 울면서 무슨 공부가 됩니까? 그런고로 그대로 놓아두고 내가 할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잘 알도록 내가 돕는 것이지,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내 제자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돼요. 내 사람 만들려고 해도 안돼요.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오직 이것이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8절)"-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을 권위할 때에도 사실 힘만 주는 거예요. 비판해서 권위 하는 일은 권위 하는 일로-오히려 본인이 그렇게 말하더라도 이쪽에서는 이렇게 말해야지요. "몇 번 빠졌다고 지옥 가겠어요? 열심을 내세요"해야지요. 그런데 어디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합니까? 안 그래요? 그래 어쨌든 할 수 없이 제가 뒤따라 말했어요. "한 달 빠졌다고 하나님께서 천당 못 들어오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열심을 내십시다." 권위 하는 일은 권위로-절대로 비판해서는 안돼요.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8절)"-여기에 '성실'이라는 말을 원문 그대로 그 뜻을 살피면 simplicity, 단순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제할 때에 정말 단순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구제해서, 이 사람이 이것을 받으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잘살까 못살까, 사람 구실 하겠나… 이런 생각 다하고 들면 구제 못해요. 요새도 그런 일이 많아요. 북한에 쌀을 주자, 하니까 '쌀 주면 전쟁 준비를 해서 쳐내려오지 않을까?'-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못 줘요. 이 생각 저 생각 다하면 안되지요.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할 일만 내가 하는 것입니다. 구제할 때에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배고프니까 먹이는 것이에요. 목마르니까 마시게 하는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사람이 될는지, 예수를 믿어줄는지 안믿어줄는지… 그것은 알 바 아니예요. 그것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구제하는 자는 단순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또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8절)"-권력을 쥐면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언제나 구 위치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또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8절)"-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베풀 때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길 때, 억지로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빼앗기는 것입니까, 주는 것입니까? 기쁨으로 주어야 합니다. 억지로 주면 빼앗기는 것이지 구제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런고로 기쁜 마음으로,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제할 때, 이렇듯 긍휼히 여길 때에만 긍휼이 긍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오늘의 본문은 이렇듯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주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바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언제나 지혜롭게 생각하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알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나의 나됨을 바로 알고, 성실히 섬기라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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