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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6-13)
요새 서울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우리 교인들이 한 번씩은 다 보았으면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Walk to remember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제목도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Walk to remember, 그런 영화인데, 큰 감동을 주는 신앙적인 그런 영화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딸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딸이 어렸을 때부터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딸의 소원은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기적밖에는 더 바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고 늘 그렇게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기적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 즈음까지, 그래도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남들은 옷을 반나체로 벗고 다닐 때에 이 학생은 늘 스웨터를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가까이 오면서 내가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하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좋은데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사랑하지 않기로, 사랑하지 않기로 한 후 친구가 되자고 합니다.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같이 하면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중에 점점 점점 사랑은 깊어졌습니다. 마침내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고, 사랑은 안 된다고. 끝내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사랑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백혈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 죽을는지 모른다. 많이 고민을 합니다. 열렬히 사랑을 고백합니다. 심지어는 백혈병 환자인 것을 알면서 결혼을 하자고 합니다. 이런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될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왜 젊은 나이에 이렇게 가야 하는지, 남들처럼 대학을 갈 생각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도 나는 여기서 끝내야 한다니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좀 더 살고 싶다고, 행복하고 싶다고, 하나님이 원망스럽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둘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괴로워합니다. 몇 일 후에 만났을 때에 이 여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이고, 참 사랑을 알고 참 사랑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너와 같은 착한 사람을 내게 주어서 사랑을 알게 해주셔서 이 어려운 고통과 이 고독을 쉽게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니 하나님께서 너를 선물로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을 인정합니다. Reality를 인정하는 순간, 사실대로 인정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다 축복이요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애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고비를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의 현주소가 어디입니까? 내게 주신 운명의 현실을 여러분이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내게 주어진 것,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믿음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내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 현재의 현 주소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과 의사들이 쓴 수필 가운데에, 제가 오래 전에 읽었지만, 내과 의사들이 제일 괴로운 시간이 언제인가 하면 환자를 다 진찰하고 나서 그 환자의 병이 깊었어요. 이제 진실을 말합니다. "의학적으로 당신은 6개월 밖에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며칠밖에 살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사형선고 같은 진단을 내릴 때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시간이기 때문에, 또 이 의사의 무능함을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더 괴로운 것은 이 분이 이 병을 가진 것은 대체로 보아서 3년 전에 있었던 어떤 큰 충격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3년 전부터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기는 오늘 안 것입니다. 이 환자가 진작 3년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좀 더 다른 의미로 3년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병을 고치고 안 고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3년을 얼마나 뜻있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던가. 이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럭저럭 흐지부지 이렇게 잘 못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 마지막 3년을 잘 못산 것에 대해서 그것이 너무나 괴롭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실이 어디까지입니까? 오늘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이것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뜻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Location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Attitude를 묻는 것입니다. State를 묻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아담아 네가 지금 어느 지경에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뜻을 알아야 합니다. 말뜻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시겠습니까? 알고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스스로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나는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고백해주기를 바래서 묻는 말씀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숨은 사람은 가만히 있어야죠. "어디 있느냐?"하니까 "나 여기 있습니다"하면 되겠습니까?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에 "어디 있냐?" "나 여기 있다" 그것이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합니다. 숨었다고, 세상에 숨었다는 말처럼 바보스러운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숨었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과 아담과의 대화입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얼마나 한심한 그런 만남입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스스로 알길 바라고 스스로 고백하길 바라고 스스로 정직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거역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해 주기를 바래서 그런 대답을 기다리며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하더냐? 왜 이런 것을 먹었느냐?" 잘 보십시오. 끝내 아담은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다윗처럼 정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면 두려움이라고 하는 증상은 있는데 두려움의 원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그 사실로 인하여 지금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두려움의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에 아픈 것은 알지만 병의 원인은 의사만이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과는 알면서 원인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사람들이 무려 70%가 한 번 이상 점을 본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 가운데 여러분도 많이 보았을 것 같은데, 뭐 토정비결이니 뭐니 해서 점을 들고 다니기에 그것이 무슨 짓이냐고 했더니 어떤가 해서 봤다나요.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그 뿐입니까? 그 중에 69%는 부적을 가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 학교 갈 때에 할머니가 주머니에 부적을 넣어주더랍니다. 그래서 학교를 조사해보면 아이들 주머니마다 부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들 이러는 것입니까?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운명이 두렵고, 환경이 두렵고, 세상이 두렵고, 죽음이 두렵고. 두렵다는 것은 아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습니다. 범죄했다는 말입니다. 죄 때문이요. 알거나 모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환경도 좋고 미래도 좋고 운명도 환하게 밝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거역한 죄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성경에 부끄러워하더라고 나와있습니다.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본래는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범죄함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이 생겼습니다. 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마땅히 할 것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못 했을 때에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왜? 공부할 수 있는데 안 했거든요. 부지런해야 되는데 안 했거든요. 당연히 해야할 일을 못했을 때에 부끄러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보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부끄러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만나는 것이 싫습니까? 전화하기도 싫고 전화 받기도 싫고. 가능하면 아무도 안 만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그 사람은 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반가워야 합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야 되는데 남들 다 웃을 때에 웃지도 않고, 자폐증 환자같이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며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그 원인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가 부끄러워하더라. 그것이 지금 현 주소입니다.
또 한가지는 변명과 핑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좋으련만 끝까지 그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묻게 될 때에 회개할 시간에 회개하지 못하고 정직해야 할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고 책임전가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하고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에 너무나도 안쓰러웠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드시고 하와를 하나님께서 중매해서 아담에게 인도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니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유머가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아담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너무 예뻐서, 요렇게 봐도 예쁘고 부드럽고 상냥하고 너무 좋아서 "하나님, 어떻게 이런 사람을 저에게 주셨습니까? 얼마나 예쁜지..." 이렇게 감사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예뻐야 네가 사랑하지 않겠냐?"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아담이 또 한마디를 하나님께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 사람이 맹할 때가 있거든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놈아, 그래야 너 같은 놈을 사랑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좋았는데 이제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저 여자가" 이 말의 책임이 누구입니까? "왜 저런 여자를 주어서 죄를 짓게 만듭니까?"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 "하나님의 내게 주신 저 여자가 나를 범죄케 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미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헤매다보면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그러면 책임인가는 어디에 갔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을 탓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탓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원망이란 자꾸만 상승작용을 하여 하나님께 까지 올라갑니다. 원망하다보면 세상 탓하고 조상 탓하고 나라 탓하고 환경 탓하고 마지막에 하나님까지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나의 상태가 어디에 있습니까? 절대로 변명하던가 핑계하던가 책임 전가하는 그런 초라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숨었다"고 했습니다. 정당화라는 방법으로 숨어버리고, 합리화라는 방법으로 숨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롤랜드 엘 워렌(Roland L. Warren)이라고 하는 분이 현대 사회를 대변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대 변화의 새대라. 그리고 깊은 사회면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다양한 조직과 기능이 관료화되면서 비인간화 되어가고 있다. 조직이 커지고 사회구조가 강해지면서 개인이라고 하는 인간존재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세상이라고 했고, 또 한가지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해석이 도덕적 해석에서 떠나서 임의적 해석으로 가고 있다. 절대기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해석해야 할 문제는 어느 사이에 다 없어졌고 이제는 인위적으로 상황적으로 저희들 마음대로 정치적으로 임의해석을 하고 있다. 그것이 숨어버리는 일입니다. 또한 생산 우선적 가치가 어느 사이에 소비 우선적 가치로 변화하고 있다.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현대인들, 숨어버립니다. 스스로 자기를 숨깁니다. 가끔 부정문제 때문에 검찰에 끌려가는 분들 보십시오. 검찰청 앞에서 기자들이 물으면 절대로 결백하다고. 그런데 들어갔다가 못나오더라구요. 누구 한 사람 정직하게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형을 살고 나와도 자신이 억울하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망조라는 것입니다. 제가 캐나다로 집회를 다녀오면서 히딩크 리더십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배울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어느 한 구석에 나타난 너무나 충격적이 말을 보았습니다. 그는 경기자들을, 선수들을 인도하는 가운데 이런 철학이 있습니다. "실수와 실력은 별개다." 실수했다고 해서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와 실력은 별개입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 보십시오. 번번이 실수하는 사람을 내세웁니다. 믿어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력은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번 실수했다고 하면 다 끝난 줄로 압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담이 실수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회개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다시 시작하라고 "Try again" 반드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숨어버렸습니다. 숨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실낙원이 된 것입니다.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폭력화되고 정치화되면서 계속 숨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아∼"하고 말씀하시는데 히브리말로 아담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인생'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아∼" 하면 "인생아∼"라는 말도 됩니다. "네가 어디있느냐?" 현주소를 묻습니다. 제가 이번 여행 중에 또 한 권의 책을 보았습니다.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을 써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S.R. 코비박사(Stephen R. Covey)가 요 근래에 또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Game Plan, 큰 제목으로 Game Plan이라고 했지만 부제목은 이렇습니다. Second half를 위한 작전의 성공을 위하여. 인생의 전반이 있고 후반이 있습니다. 보자하니 여러분 지금 전반은 지났습니다. 절정은 후반이 있는 것이지 전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뿐입니까? 종반에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게임으로 보지 않으셨습니까? 연장전에 골을 넣으니까 골드 골을 하나 넣으니까 끝입니다. 인생은 종반이 결정합니다. 이 후반, 종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그런 책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제 과거를 더 이상 비판하지 마십시오.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고, 후반이 중요하고 종반이 중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아 너 어디에 있느냐?" 진실하게 응답하십니다. 정직하게 응답하십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미래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숨어버리는 인간을 찾아와 부르시는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의 나된 현 주소를 알게 하시고 이 후반에 이어 종반에 이른 나의 생에 있어서 주님의 음성을 바로 듣고 바로 응답하며 정직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하사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기적 같은 은혜를 다시 힘입을 수 있는 오늘과 내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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