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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자유인의 행로! (민 14:20-25)

by 【고동엽】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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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행로! (민 14:20-25)

 

어떠한 조류학자가 깊은 산 속에 서 그의 조류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 며 또 현지를 답사하
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깊은 산 속에서 앵무새 둥지 하나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학
자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 는 앵무새 그 새끼 한 마리를 새장 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서
자기 집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 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 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침마다 앵무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
는 기쁘다.'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아 침, 저녁으로 앵무새 먹이를 주면서 키웠는데 며칠 후
에 앵무새 어미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끼를 위해서 어미가 부 지런
히 모이를 물어다 먹이는 겁니 다. 그걸 보고
"참 잘 됐다. 내가 모이 줄 것도 없고 이젠 어미 새가 모이를 날라다 먹이니깐 그저 나는
두고 보기만 하면 되고 앵무새 소리 만 즐기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습 니다. 며칠 후에 보니까 새장에 있 는 앵무새 새끼가 죽었습니다. 웬 일인
가 해서 그는 조류학자로서 전 문가적으로 깊이 연구하고 사인을 살펴보았더니 어미 앵무새
가 새끼에 게 독이 있는 그 독 과일을 먹인 겁 니다. 그러니까 어미새가 새장 속 에 있는
새끼를 일부러 죽인 겁니 다. 그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습 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겠
죠.
"네가 그 속에 갇혀서 한평생 고생 하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래서 어미 새는 새장 속 에 있는 자기 새끼를 독 과일을 먹 여서 죽인 것이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자유를 외친 사람들이 많은데 앵무새는 이 것을 벌써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애 굽 땅에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담 부지역을 하는 그 고생
하는 모습을 보시고 400년의 노예생활에서 이스 라엘 백성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큰 기적으
로. 여러분 아시는 대로 열가지 재앙을 내려가면서 애굽을 치고 이스라엘을 건졌습니다. 완
악 하고 강팍한 바로의 마음을 꺾어서 기어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했 습니다. 더더욱
홍해를 가르는 큰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졌습니 다. 홍해를 건너왔을 때에 이스라 엘
백성들은 너무 감격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유의 노래를 불렀습 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온 백성이 함께 천지가 진동하게 그 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감된 것은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렇 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태반 이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
다.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이스라엘 은, 남은 이스라엘은 다시 이제 요 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인데도 불구 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회전하라"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다시 광 야에서 40년을 훈련시
킵니다. 그 다음에야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셨습 니다. 여러분 여기에 엄청난 하나 님의 말씀
이 있습니다. 물리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자유,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루즈벨트 대
통령 은 유명한 자유에 대한 말씀을 하십 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이 경 제적 자유를 말
합니다.
"가난한 자 는 자유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명 언을 했습니다. 사실로 절대 빈곤 에 빠진 사람, 이 빵 하나를 위해서 라면 무
슨 짓이라고 하겠다고 하는 그런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는 사실 자유가 없습니다.
창조주 가 주신 그 소중한 자유를 아무에게 나 헐값에 팔아 넘기고 그리고 다시 노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 니다"
이 경제적 자유를 소중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안으로 부터의 자유, 이건 도덕적 자
유를 말합니다.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 다. 죄가 있어서 형사에게 쫓기는 사람, 내 손가방
에 몇 억의 돈이 있 어도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 하늘아래 어디 가도 그는 자유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도덕적 자 유, 양심의 자유, 예배의 자유, 이 자유가 기본적으로 자유
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건 정치적 자유입니다. 정 치적으로
한 번 잘못되기 시작하면 이 구조적인 악에서 벗어나지를 못 합니다. 구 러시아가 그랬고
중국 이 그랬고 세계가 그랬고 공산주의 지하에서 고생하던 민족들을 만나보 면 하나같이
아차 하는 가운데에 공 산주의자들에게 먹혀들어 갔다는 거 죠. 속았다는 거죠. 한 번 끌려
들 어간 다음에 헤어날 수가 없어서 수 십년 동안을 이렇게 억압 속에 시달 려야 했고, 지
금도 정치적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민족들,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 습니까? 그런고로 정치적 자유가 아주 소중합니다. 공포로부터의 자 유,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그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와 자유인의 문제입
니다. 자유가 주어졌다고 자 유가 아닙니다. 자유인이 되어야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주어졌
다는 한 가지만 가지고는 절대로 자유로 울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
자유인이 된 다음에, 자유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써 자유 가 자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분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인이 되기 까지는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
이 아닙니다. 자유인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가 그 정체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은 우리 다 같이 느끼는 일이기에
오늘은 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한 때 군사 정권을 대항해서 무진하게 싸워왔습 니다. 군
사정권, 독재. 독재를 반 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대모를 했고 지성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많은 세월 군사 독재로부터 벗어나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외치고 감옥이 메일 정도로 많
은 사람이 끌려가서 수욕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억에 아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렇게 해서 우리는 문민정부를 세 웠습니다. 요새는 국민정부를 세웠 답니다. 지내보니 어떻
습니까? 그 래 문민정부, 국민정부 세우니까 자 유가 있습디까? 무엇이 나아진 것 이 있습
니까? 오죽 답답한 얘기입 니까? 많은 사람들 많은 지성인들 이 말합니다. 차라리 그 때가
좋았 다고……. 그래서 설문조사를 해 보니까 우리가 지금 이 젊은이들까 지 제일 존경하는
정치적인 지도자 가 박정희 대통령이랍니다. 이 말 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어떻게 우 리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그래 오늘 좀 어렵다고 해서 다시
"차라리 군사 정권이 났지",
"독재 정권이 났지",
"막 밀어붙이는 그 때가 더 좋았다"
이렇게 꼭 말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사실입니 까? 여기에 우리의 혼란이 있는 것
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참 자유! 말 한 마디만 삐꺽해도 감옥 에 들어가던 그 때,
어찌 그 때를 지금 동경하고 있는 겁니까? 비록 어렵긴 하지만은 말입니다. 그 때 는 많이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러 나 그래서 얼마의 자유를 얻어냈다 고 생각하십니까? 자유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그 은총적 계획이, 자유케 하시는
목적, 그 숭고한 뜻 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 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 족
을 자유케하신 그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거는 결 코 자유인일 수가 없습
니다. 노예 적인 세계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식민지적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그
리고 돈 좀 벌었다고 우리가 민주주의적 투표를 했다고 해서 그 것이 자유인 것처럼 생각해
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참 절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셨으니 그러 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 를 매지
말라"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여러분 갈라디아 5장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원망은 자유가 아닙니다. 말이야 무슨
말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러나 원망하는 자의 마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원망하 는 사람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처럼 나와서 가나안에 못 들어
간 죄목이 있다면, 한 마디로 말하라면 원망죄입니다. 그 원망은 일차적으 로 하나님의 능력
에 대한 불신입니 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자 유가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 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그 귀중한 믿 음, 그리고 하나님의 약
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실 속 에서 그리 조그마한 어려운 일을 당 하면서
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 번도 더 넘 게 많은 권능을, 권능을, 엄
청난 능 력을 눈으로 보면서도 아직도 하나 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은 불신앙입 니다.
또 하나는 어떤 원망이든지 원망 뒤에는 무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가 려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내가 못 사는 건 저 사람 때 문이고, 내가 잘못된 것도 누구 때 문이라는 거
죠. 그래 어떤 짓궂은 사람은 남편하고 아내하고 다투다가 남편이 하도 벌컥벌컥 화를 내니
까 아내가 조용히 말하기를
"왜 당신은 요새 와서 그렇게 자꾸 화를 내는 거요?"
그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아 십니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 닌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 다."
저 성격 나빠진 거 제 탓이지 그게 누구 탓입니까?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
요. 벌 써 자기 자유를 남에게 반납해 버린 사람이에요. 아내가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라간
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이 아 닙니까? 이런 시시한 인간에겐 자
유가 없는 거예요.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니에요. 내 책임은 내 가 지는 거예요. 자유에
는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이요, 내가 선택하 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거 예요. 그
래서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까지 내가 질 때, 나라고 하는 존재의 영역이 그만큼 넓
어지 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 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그런 미련한 인간 은 자기도 모르게 벌써 노예성을 지 닌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표방하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북녘 땅에 서 남쪽으로 참 구사일생 어려운 가 운데서 탈출해 오신
분들이 많습니 다. 여기 저기 보니까 뭐 음식점도 많이 생겼고 요 바로 앞에도 옥류관 이
생기고 뭐 그랬더라고요. 평양 에서 옥류관 제가 몇 번 가보았는데 여기 거기 그림으로 딱
붙였더만요 옥류관을. 뭐 어쨌든 이 분들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은 상당수가 불 평이 많
습니다. 못살겠답니다. 차 라리 북쪽으로 가는 게 났겠답니다. 아 거기서는 어름어름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러면 되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벌어
먹어야지, 자기가 교육 비를 해야지, 자기가 뭐 해야지……. 책임이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
그래 요. 그럴 거예요. 처음부터 자유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죠. 자 유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죠. 자 유는 곧 책임입니다. 이스라엘 백 성들 좀 오늘 현재 조금 어렵다고 해서
곧 하는 말이
"그 옛날에 애굽 에서 비록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 은 고기가마 옆에 앉아서 갈고리로 끌
어서 도적질해서 먹고서 그 때가 좋았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제대로 말을 한다면
"거기서 배불리 먹기보다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게 났다."
뭐 그래야 되 는 거 아니요. 어째서 인간들이 이 모양이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이
자유를 하찮은 물질에, 하찮은 정욕에 빼앗기겠다는 겁니 까? 더구나 우리 과거에 있었던
일, 참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모세를 죽이겠대요. 아 여보
세요,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람들 애굽에서 나 올 때, 물론 모세가 나오자고 했지? 하나님
의 명령을 받들어서 다들 나 갑시다 하긴 했지만은 그걸 따르고 좋게 여기면서 여기까지 나
온 건 자 기가 선택한 거지 이제 와서 고생스 러우니까 한다는 소리가
"모세 너 왜 우리들 데리고 나와서……. 애 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더냐? 왜 여기까지 데리
고 나와서 죽이려느 냐?"
원망하면서도 그 사람들 농담 을 잘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 요 예? 내가 선택해서 내가
온 것 이지 그래 모세가 오래서 왔어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것을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
고 모세를 때려죽인다 고 해결이 되는 겁니까? 바로 이 원망의 극치가 하나님 앞에 큰 진노
를 산 것이에요. 모세를 죽이겠다 고 하기 때문에. 무책임한 소리요. 과거, 깨끗이 청산되어
야 하는데 노 예적 과거, 노예적 상처, 노예적 성 격, 노예적 세계관, 깨끗이 씻지를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번번이 이렇 게 어리석은 원망을 하게 됐고 하나 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자유인 은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압니다. 현재가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가
있는 한 그건 소중 한 것입니다. 노예적인 번영보다 자유적인 가난이 좋은 겁니다. 죄 와 더
불어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차 라리 의와 함께 가난과 고통을 선택 하는 것이 자유인의 모습
입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찬송 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기뻐할 줄 아는 자만이,
자유를 기뻐할 줄 하 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과거에 되어졌던 일,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의
은혜였고 앞으로 되어질 운명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것이요. 그런고로 믿고 오늘은 어
떤 고난 속 에 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나리 오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요, 하 나님의
사랑의 경륜 속에 있음을 알 고 감사하게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 이에요. 그리고 순종하는
것이에요. 서로 돕는 것이에요. 이것이 자유 인이요 자유인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하
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복을 허락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라고 하는 유명한 작 가의 '스칼렛 레터(Scarlet
Letter)' 라고 하는 '주홍글씨' 라고 하는 소 설은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 주
홍글씨 내용 가운데 헤 스터 프린이라고 하는 여자가 어떤 날 특별한 분과의 관계에서 간음
을 합니다. 이 간음함으로 인해서 그 가 아이를 가집니다. 이제 이로 인 하여 재판을 받게
되나 내가 누구와 관계했고 누구의 아이라는 말을 하 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아버 지
의 이름을 대지 못하면 그 마을에 서는 그를 아주 허술한 여자, 창녀 취급을 합니다. 그 때
간음죄가 성 립이 됩니다. 그래서 재판을 하고 너는 간음한 여자다 해서 앞과 뒤 에, 가슴과
등에다가 A자를 크게 붉은 글자로 써서 붙이게 됐습니다. Adultery, 간음이란 뜻입니다. 간
음 한 여자다 그래서 A자를 앞과 뒤에 이렇게 항상 붙이고 다니게 돼있습 니다. 그는 괴로
웠습니다 만은 그 는 자유로웠습니다. '나는 죄인 되 어서 죄인이란 말을 듣는데 그게 뭘
잘못이냐.'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 서 자유로웠습니다. 가장 고통스러 운 것은 그를 재판하
고 있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입 니다. 그는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만은 그
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딸을 낳아 가지고 귀하게 키웁니다. 갖은 비난을 다
받으면 서도, 조롱 속에서도 그저 자유롭습 니다. 다 드러낸 처지에서 평안하 게 그저 갖은
비방을 다 받아가며 아이를 잘 키워서 10년이 됐습니다. 또 돈을 벌리는 대로 불쌍한 사람
들,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들 많이 구제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했습 니다. 착한 사람으로 나
타났습니다. 10년 후에 동네 아이들이 자기 엄마 보고 물어봅니다.
"엄마, 엄마 저 옆집에 있는 아주머니는 그 예쁜 딸 하고 사는데 왜 이상하게 옷에 앞과 뒤
에 A자를 새겨 가지고 있는데 그 거 무슨 뜻입니까?"
그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그거 모르겠 냐? 그건 엔젤(Angel), 천사란 뜻 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누가 자유인입니까? 어 떤 자유를 원하십니까? 바로 이 사 람은 자유인이요, 자유로
승리한 것 입니다. 신앙에 동기가 많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하 나님을 따르
는 사람, 혹은 하나님으 로부터 복을 받겠다고 기복적인 신 앙을 가지고 복 달라고 비는 사
람, 이 두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자유인 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공경 하고 사랑하고 믿
고 신뢰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에 그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떻게 대하 시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을 즐겨 따 라갑니다. 여러분 인간은 무의식 속에 욕망이 있습니다. 무의식
적인 욕망 속에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욕 망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자유로워 지면서도 한편
으로 노예가 되고 싶 어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분 에게 자기 자신을 다 맡겨버려. 생
각도, 지혜도, 판단도, 운명도 다 맡 겨버리고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노예 되 어 살고 싶어요. 사랑의 노예가 되 어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요.
우리는 이제 하나님, 하나님 앞 에 완전히 자유의 노예가 될 때 내 자유를 다 반납해 버리
고 자유의 노 예가 되는 순간 거기에 진정한 자유 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생각합시다. 나는 얼마의 자유를 누리고있습니까? 나는 얼마 더 광야 생활을 해야 자유인이
될 것입니까?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깨끗한 자유인이 될 수 있겠 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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