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감사할까?
김명도 목사
서론:
오늘은 금년 추수감사주일로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매년 한번씩 11월 네 번째 목요일에 추수감사절 절기를 지킵니다. 추수감사절 하면 흔히 머리에 뗘 오르는 것은 칠면조 고기를 먹으면서 미식 축구시합을 구경하는 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추수 감사절의 의의는 아닙니다. 오늘은 본문 시편 103편 1절에서 5절까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감사 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을 감사할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저 합니다.
오늘 네가지로 대지를 나누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구원의 은혜를 감사 합시다
II. 우리의 병고쳐 주셨으므로 감사합시다.
III.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씨우신 은혜를 감사 합시다
IV. 우리에게 믿음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 합시다
I. 구원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송축하라” 고 세 번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많습니다. 우선 3절에서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에게 감사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신 일입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가장 첫째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신 일은 엄청난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 받는다는 감격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절은 먹고 노는 날로 착각하며 살 아 갑니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 바로 안다면 이 감사절에 더욱더 하나님에게 감사할 마음이 불일 듯 일어 날것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는 그 죄에서 용서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기에 죄가 무엇인지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 있다면 죄입니다. 죄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범죄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면 죄가 됩니다.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면 죄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고차원적이며 근본적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실수를 하는 이유가 따지고 보면 우리 심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죄는 원래 속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이 썩었으므로 겉으로 그런 썩은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렘 17:9에서 “만물보다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알리요”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악한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고 악한 생각에서 악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마음을 다스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잠언 4:23에서도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위보다 마음이 앞서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고 가정합시다. 같은 태양의 빛을 받으며 같은 땅위에서 같은 수분을 받으면서 나란히 자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 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는데 다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뿌리에 문제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뿌리가 좋지 못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편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그 뿌리가 좋은 탓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뿌리가 문제가 됩니다. “마음 밭” 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흐려진 인간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좋지 못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삽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요?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요? 성경은 “죄의 값은 죽음” 이라고 로마인서 6:23에 가르쳐 줍니다. 죄를 지으면 죄를 지은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심지어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죄에 대해서 민감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죄가 무엇인가요? 죄란 요한일서 3:4에 “죄는 불법” 이라고 했습니다. “불법”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죄” 라는 말의 원어 “하마르티아” 라는 말이 “과녁을 맞추지 못한 상태” 라는 의미 이고 보면, 하나님의 법을 “과녁”이라고 볼 때, 하나님의 법을 모두 지키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를 안 짓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로마인서 3:11에서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고 했고, 로마인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고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합니다. 아담도 죄를 지은 까달게 죽었고,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는 누구나 예외 없이 모두 죽는 것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요 표상이기 때문에 아담안에서 모든 인류는 죽은 것입니다. 육신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에 이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살아 움직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은 몇몇을 택해 주셔서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4에는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시어 택해 주셨다 고 했으며 에베소서 2:8에는 그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믿응을 선물로 주시어 은혜로 구원해 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후 3:2에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해 주셨다” 는 말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악을 모두 남김없이 용서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몇가지의 죄를 지어야 지옥에 내려갑니까? 단 한가지의 죄라도 우리를 지옥에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말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셔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죽을 대신 죽어 주신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은혜 때문입니다. 내가 다 지키지 못할 하나님의 율법을 대신 온전히 지켜주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은혜대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지옥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벌레도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시편 103절 3절에서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라고 하면서 죄를 용서함 받았으니 그로 인하여 “여호와를 송촉하고 내속에 있는 것들아 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감사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내 죄를 용서함 받고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시는 그런 은혜만큼 감사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합니까? (마 16:26). 그렇습니다. 감사할 이유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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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데 인색한 이유는 구원의 반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반대인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안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하루에도 수천 번 울어 나올 것입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 16장 19절 이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지옥의 형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천국은 요즘 빗나가는 어느 신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허구가 아닙니다.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 입니다. 중세의 단테 (Dante) 라는 사람이 쓴 “신곡 (神曲)” 을 보면,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사야 66:24절에 “벌레가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 곳” 이라 하였고, 마가복음 9:48에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21:8절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지옥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이런 지옥의 형벌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이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 중에도 아직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이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도 은혜의 날이요 구원을 얻을 날이니 지금
회개하여 하나님에게 나아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 무서운 지옥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오늘 시편 103편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으므로 그의 성호를 송축하라” 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았으니 이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감사 하십시다.
II. 우리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감사 합시다.
이 감사절에 감사할 이유는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셨으므로 감사합시다. 여기서 말하는 병은 육신의 병 보다도 “영혼의 병” 을 말합니다. 요즘은 이른바 현세적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라는 운동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뉴욕의 Norman Vincent Peale 이라는 목사가 그런 운동을 많이 했지만 요즘은 Robert Schuller 목사와 Kenneth Copeland, Charles Cabbs, Napoleon Hill 목사, Joel Osteen, Rick Warren,
Bruce Wilkinson 목사 등이 주동이 되어 활동하는 신학운동입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오래 살고 많은 재물을 얻어 사는 것” 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운동에서는 육신의 병 고치는 일을 중요시 합니다. 소위 “은사 집회” 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목사들이 최면술 (mesmerism)을 써서 사람을 넘어 트리고 병을 고쳤다고 하기도 합니다. 혹은 목사가 그 부인과 공모하여 작은 전자장치로 내통하면서 환자의 모든 과거를 미리 알고 기도로 환자의 병을 고친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 지식이 없어서 속아 넘어 가기 일수입니다. 요즘은 속임수가 한창 유행하고 있습니다. 속지 않으려면 성경을 알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베르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등에 정통해야
합니다.
만일, 기독교의 진리가 이 세상에서 병나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돈을 많이 벌며 사는 것이라면 그 처럼 모순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결국은 죽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가 맞는다면 사람이 죽지 말고 항상 건강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고 사람은 질병으로 시달리며 가난합니다. 그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요한 칼빈이나 프란시스 튜러틴 (Francis Turretin) 이나 George Gillspie 같은 분이 믿음이 우리보다 못해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신앙의 사람 사도 바울도 몸에 “육신의 가시” 가 있어서 하나님에게 세 번이나 기도했어도 그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 육신의 가시를 갖고서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육신의 가시를 제거받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는 것 보다 낫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약한 때에 강함이 된다” 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신앙고백 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병”이 무엇인가요? 본문에서 “고친다”는 말은 “라파” 인데 이 말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주로 “영혼의 병을 고침”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9에서 말하는 병입니다. 이사야 61:1에서 말하는 “병고침” 입니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죄로 물든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고쳐 주심을 감사 한다” 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전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던 못된 마음, 하나님 없이 세상을 제 멋대로 바라보던 잘못된 인생관, 세계관의 병, 이런 병들이 고쳐졌다는 말입니다. 이전엔 주님을 모르고 세상 사람이 사는 방식으로 세상 물결따라 흘러가던 생활철학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변하여 새로워 졌다는 말이니 구약 에스겔서 36:26절 이하에 보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회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합니다. 신앙인격의 병이 고쳐졌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병, 생각의 병을 고쳐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 합시다. 이러한 마음의 병을 고침 받아 새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니 시편 103편4절에 “파멸에서 우리를 구속했다” 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감사절에 우리의 인격의 병을 고쳐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 합시다.
III.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씨우신 은혜를 감사 합니다.
본문 4절에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씨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까지 발자취를 더듬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아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행한 대로 갚았다면 저나 여러분이나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은 오늘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늘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낭떨어지를 걸어갈 때 주의 손이 나를 붙들어 주시어 오늘까지 무사히 살아온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도, 단 한 시간도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버러지 같은 인생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하십시다.
그 옛날 청교도들은 어려운 중에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 주심을 알고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았고 그 감사의 정신으로 이 땅에 먼 훗날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는가요? 여호수아 1:5, 히브리 13:5 에는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라고 신실하게 약속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욥 5장18에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도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도 그 손으로 고치신다” 고 하였습니다.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자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옛날 청교도들에게 같이 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이민 생활에 시달리는 우리에게도 같이 하십니다. 오늘까지 낯선 아메리카 땅에서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방에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죽을 고비를 거치며 어려운 일들이 많았으나 그때마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와 같이 하셨으니 이 은혜로 인하여 감사합시다.
IV.우리에게 믿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 합시다.
이 감사절에 무엇을 감사할까? 끝으로, 본문 5절에서 시편 기자는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너희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성장케 하시는 은혜를 인하여 감사 합니다 우리의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한다고 했다. 어찌 독수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0:31에도 “주를 앙모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 같을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렇듯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특징은:
1) 높이 오릅니다. 땅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바라봅니다. 여호와의 말 씀을 청종하여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사 55:2하).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날마다 그날의 영광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걸어 갑니다.
2) 먼 곳을 바라봅니다. 원시안적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일만 생각하고 눈앞에 닥치는 일만 생각합니다. 너무 근시안적입니다. 너무 현세 중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 곳을 바라보라 고 합니다. 잠언서 6장에 나오는 개미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개미는 수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건만 개미는 열심히 일을 합니다.” 왜요? 일할 수 없는, 양식을 얻을 수 없는 겨울이 닥쳐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개미에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잠 6:6). 먼 곳을 바라보며 삽시다.
그 옛날 청교도들은 믿음의 자유를 위하여 영국 국교의 횡포를 볼 수 없어서 1620년 미국의 동북부 Massachusettes 주 Cape Cod 라는 반도의 최북단인 Provincetown 이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고 하여 그 마을의 이름을 그렇게 Provincetown 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 후 청교도들은 다시 배를 타고 보스톤 근처에 상륙하여 그곳 이름을 Plymouth 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영국에서 배를 타던 곳의 이름이 Plymouth 였으므로 신대륙 아메리카에 와서 그들이 상륙한 곳을 Plymouth 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들 청교도들은 배를 정박시켜 놓고 거기서 본격적으로 이민 생활을 시작합니다. 고생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을 수 있는 기쁨 때문에 고생을 고생으로 생각치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습니다. 인디안들 과의 충돌이 많았고, 겨울철 날씨가 너무 추어서 많은 사람이 얼어 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신앙을 잘 지켜 나갔습니다. 인디안들에게 농사를 배워 그 이듬해에는 풍성한 수확을 얻어 인디안 들과 함께 하나님에게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Plymouth를 찾는 사람은 바닷가에 정박되어 있는 Mayflower의 모형인 배를 볼 수 있고, Plymouth Rock 이라는 불리는 1620년 이라고 쓴 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처음에 도착했던 Provincetown에는 Ted Roosevelt 대통령이 세운 Pilgrims' Monument 라는 큰 탑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미국 건국의 초석이 된 사람들이요 미국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손자 대에 와서는 신앙이 해이해서 Jonathan Edwards 나 Jacob Frelinghuysen 같은 분을 통해서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들 이민 1세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참으로 신앙을 잘 지켰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나 미국의 헌법이 모두 이런 개혁주의 적 청교도들의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곳 수륙만리 미국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는 어떤 역경을 당해도 청교도들의 역경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감사절을 맞으면서 감사할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감사절 예배룰 드리면서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구원의 하나님에게 감사 합시다. 우리의 모든 심령의 병을 고쳐주시어 인격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에게 감사 합시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관을 씨우시어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 신앙이 독수리처럼 성장하도록 인도하시는 그 언약의 하나님에게 감사 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해도 이 땅에 건너왔던 청교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생하는 중에서도 청교도처럼 신앙으로 살아가시며 자녀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합시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이때, 하루에도 어떤 일들이 생길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 우리 자손들을 보호하는 일은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믿음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이 잘못되면 이민 온 보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개혁주의 믿음의 유산을 자손만대에 물려줍시다.
옛날 희랍의 철학자 Diogenes (디오게네스)는 감사할 이유를 세 가지 발견하여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세 가지를 감사하는데 첫째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둘째 내가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셋째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고 했는데 여러분 우리가 감사할 이유가 세 가지뿐이겠습니까?
이 감사절에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맙시다. 그는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하시며 우리를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로 관을 씨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런 시편 116편 12절의 신앙고백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어 이번 감사절에 주님의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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