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송하며 선포하며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시편 145:1-10 시편 145편은 [다윗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입니다. 다 윗은 본문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고백을 노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께 대한 자신의 고백과 결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다윗의 신관을 살펴봅시다. 본문에 드러난 다윗이 하나님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145편의 서두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명왕이었고 현군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몇가지 실책이 있었고 잘못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비밀과 흑막에 쌓인 근대정치의 암울한 정황에 비긴다면 다윗의 실수나 잘못 은 문제시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의 역대 왕들 가운데 다윗만큼 선정을 베풀고 백성 의 신임과 존경을 받은 왕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왕을 마치 국부처럼 높이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1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존경 받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은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이 있을 수 없 다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대 정치구조 안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대통령과 백성이라는 관계 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생사가 왕의 손에 달려 있었고, 소유의 여탈도 왕의 재량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능과 재량권을 송두리채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지혜와 신앙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자신이 모처럼 획득한 왕권과 통치능력을 포기해 버리 고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른다면, 손익득실 면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결 단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고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왕 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을 받고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습니까. 그것은 내가 책임진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공적인 책임을 맡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보호아래 살지 않으시렵니까? 2)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하 나님을 광대하시다라고 노래한 것은 다음의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스스로 광대하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나 어떤 힘에 의해서 광대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광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존개 자체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에 그 의 능력이나 크심도 스스로 있는 것이지 타력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영원히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정권이 길다든지 나라가 크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제한적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를 지배했던 초대강국이었던 로마도 지금은 별 볼일 없 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지는 날이 없다던 영국도 지금은 껍질만 남았습니다. 즉 이 지상에 영원히 광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말씀의 은사라는 것도 이 세상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서 누구를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병고 치는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당에는 병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도 땅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면 모두가 다 신령한 언 어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크신 팔에 나를 맡기지 않으 시렵니까? 셋째, 끝없이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소련이 제아무리 넓고 커도 끝이 있습니다. 바다가 제아무 리 깊고 넓어도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끝이 없 습니다. 광대하심 뿐만 아니라 사랑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3:19에서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했습니다. 넓고 길고 크고 높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한마디로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광대하시고 사랑도 자비도 용서도 광대 하십니다. 그 광대하심 때문에 오늘 내가 사랑받고 용서받고 축복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의 태도입니 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내 마음은 왜 그리 협소합니 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데 왜 내 사랑은 국한적이고 편협합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적인데 나의 용서는 선택적이고 부분적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의 일부분만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만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실 때 일부만 용서하신다 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하나님이 산소를 주실 때 충분한 양을 주시지 않고 일부분만 주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배웁시다. 3)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고 다윗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은 혜를 받는 다윗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으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비하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다윗은 제일 큰 자입니다. 제일 높고, 제일 강하고 제일 큰 왕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자신 을 낮춘 것입니다. 그는 은혜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야고보 4:6 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 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자들 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내용들을 8절이하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며 선대하시며 긍휼 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는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 을 보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찌어다"라고 했습 니다. 나를 높이지 말고 은혜를 구합시다. 나의 능력이나 소유를 과대포장하지 말고 은혜를 받읍시다. 그것이 평 안하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결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은 왕으로 광대하신 분으로 그리고 은혜를 주시는분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이 어데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나의 주로 높이겠다고 합니다.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높인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높이라고 권하지 않고 내가 높이 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높이면 주님이 나를 높여 주십니다. 내가 주를 낮추면 주 는 나를 지옥에 멸하십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 조이스] 는 자신이 최근에 저술한 [정 신과 의사처럼 생각하라 (Think Like a Shrink)]라는 책에서 정신역학 요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자기 방어를 포기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방어를 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세가기 유형 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력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가 수동적이며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은 감정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밑바닥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이용합니다. 상 사한테 야단 맞고난 후 분노의 감정을 피하기 위해 운다는 것입니다. 셋은 지성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핑계를 만들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 위해 지능적인 합리화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조이스에 의하면 환자가 일체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그 치료가 단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을 영적 삶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일체의 자기 과시 나 방어를 유보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고 신뢰할 때 영혼의 고통 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약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꺼번에 심장약,위장약, 간약, 췌장약, 변비 약, 설사약, 신경통약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내가 한꺼번에 많 은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은 높이고 그를 경배하 기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2)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본문 1절 -10절 사이에서 시인은 주님을 송축, 칭송, 찬양, 노래 한다는 말을 무려 일곱차례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영원히 계속 하겠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느나라 사람보다 한국사람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노 래방, 노래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노래방이 뭔가 궁금해서 어느 분에게 물었더니 30분이나 한시간 동안 악보를 받아서 칸막이 된 방에 들어가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교회에 나오면 돈도 안내고 오르간과 피아노 그리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영원히 송축합시다. 성가대에게 권합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영원히 송축하는 신앙으로 찬 양하기 바랍니다. 찬양과 송축은 호흡이 있는 생명체가 해야할 당연할 의무입니다. 시편 150:6을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라 고 했습니다. 3) 주의 능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라고 했고 6절을 보면 신관도 중요하고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찬송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선포의 신약적 의미는 선교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는 주 의 복음을 만방에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직장이, 그리고 다양한 일터와 만남이 선포의 현장 이 되어야 합니다. 에디슨은 "주님을 아낌없이 찬양하기에는 영원도 너무다 짧으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70-80년 세월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 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입을 열어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 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칭송합시다. 그리고 선포합시다. 복음선포는 우리에게 해야할 종말적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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