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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궁극적 관심(마태복음 13장 24절~30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사랑할 수 있는 양심을 주시고, 우리가 선을 알 수 있는 이성을 주시고, 우리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루소가 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모두에 하나님의 뚜렷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사랑하고, 선을 알고, 선을 선택하여 모름지기 선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심과 이성, 그리고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악을 위하여 주어진 자유가 결코 아닙니다. 방탕을 위하여 주어진 재물이 아닙니다. 사치를 위하여 주어진 번영은 더욱 아닙니다. 그 모두는 우리가 선을 이루도록, 보다 큰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경륜하시는 깊은 의지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효과적인 의지입니다. 마음에나 두시고 막연하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경륜하십니다. 때로는 강권적으로 살아 역사하시어 반드시 소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끔가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은 능력도 많으시고 전능하신 데 왜 악을 그대로 내버려두시는가? 당장 벼락이라도 내리치셔서 악을 중단시키시지 왜 방관만 하시는가?'---조급해하는 말들을 곧잘 합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못한가보다'라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물리적이거나 폭군적이지 않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은 율법적이거나 형벌적이거나, 파괴적이거나 심판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혜적이요 창조적입니다. 상징적으로 말씀하면 부성적 전능이라기보다 모성적 전능이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엄격한 아버지와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대하여 가라, 먹어라, 자라, 공부하라---일마다 해라 마라 한다고 해보십시오. 아이는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하기야 합니다마는, 억지로 하는 것이기에 마음은 점점 더 멀어져갑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처럼 강압적이지는 못하지만, 간절하게 부탁하고 눈물로도 호소합니다. 그래서 간혹 아이들이 어머니의 말을 가볍게 여겨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마는 나이가 들고 보면 전적으로 어머니의 승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의 그 간곡하고 희생적인 사랑에 감동을 받아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겨울날, 바람과 해가 내기를 합니다. "저기 지나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하자. 이렇게 해서 먼저 바람이 나섭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바람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바람이 세게 불면 불수록 그 사람은 점점 더 옷을 감아쥐고 몸을 웅크립니다. 끝내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해는 따뜻한 햇볕을 계속하여 내리쬡니다. 그 사람은 하도 더워서 마침내 옷을 훌훌 벗고 맙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이긴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그렇습니다. 전능이라고 하면 흔히 기계론적 전능을 생각하기 쉽습니다마는,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이 인격적 전능이요 사랑의 전능임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간증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곧이 들리십니까? 개중에는 십자가야말로 어리석고 나약하고 비겁한 것이다---이렇게 그리스도께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듭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이 신비로운 간증, 고백, 지식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때에 우리가 비로소 그리스도인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가라지 비유' 말씀입니다. 우주적인 의문에 주시는 명쾌한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귀한 말씀을 주시고 나서 결론을 내리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쉽습니다. 농사짓는 이야기 같은 쉽고 평범한 소재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진리는 우주적인 중요한 문제에 해답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겸손이 있는 사람---이러한 사람이라면 듣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예나 오늘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밭을 정성껏 갈아 좋은 씨만을 골라서 뿌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나가보니 싹이 나서 자라기는 합니다. 그러나 뿌리지 아니한 싹, 가라지도 나서 함께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본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묻습니다. "좋은 씨를 뿌렸는데 어디서 가라지가 생겼을까요?" 주인이 대답합니다. "원수가 와서 뿌려놓았구나."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버릴까요?" 그러자 주인이 판결을 내립니다. "가만두어라. 가을 추수 때에 가라지가 제 모습을 드러내면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고 알곡은 따로 거두어서 곳간에 넣게 하리라." 여러분,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치를 믿습니까? 이 엄연한 진리에 대하여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엄연한 진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그들 때문에 세상이 혼란합니다. 악을 심으면 악이 나고 그 악이 자손만대에까지 이어집니다.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면 언젠가는 내 눈에서 피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반드시 내 마음도 아플 것입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둡니다. 이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이 이처럼 혼란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선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왜 낙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중단해버립니다. 선을 심으면 선으로 거둔다는 이치를 불신해서 그렇습니다. 당장 보답이 있느냐 없느냐, 상급이 있느냐 없느냐, 남이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이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부지런히 선을 심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선을 거둘 것인데 말입니다. 너무 조급해한 나머지 도중에 낙심하고마는 사람들을 흔하게 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 그러므로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심은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씨를 심었으면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요, 가라지를 심었으면 가라지를 거둘 것입니다. 아무리 제 모습을 위장하려 해도 가라지는 가라지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본색이 드러나고 맙니다. 씨앗도 가라지요 뿌리도 가라지요, 자라는 중에도 가라지요 종말에도 가라지입니다.
여러분, 악은 실재합니다. 실재하여 행동하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때로 악은 스스로 제 모습을 은폐하기를 좋아합니다. 악이 아닌 것처럼 선인 것처럼 위장에 능합니다마는, 어느 때에 이르면 반드시 제 본색을 드러내고,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완전한 은폐란 불가능합니다. 완전 범죄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기간 동안은 함께 자랍니다. 본문에서 말씀한바, "함께 자라게 두어라"---함께 자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인과 종의, 좀더 깊이 해석하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점의 상이점(相異]點), 곧 시각이 다름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들은 가라지가 나서 자라는 것을 보고 놀라서 주인에게 달려옵니다. "가라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씨 뿌리지 아니한 가라지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그러나 주인은 태연합니다. "원수가 와서 뿌렸나보구나."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악의 우연성을 운위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혹가다 실수를 하거나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친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른바 사과한다는 것이, "나는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만 깜빡하여 엉뚱한 말을 해버렸다"라고 합니다. 정말로 그런 것입니까? 다윗을 생각해봅시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는 죄인입니다"---다윗의 고백이 이러했습니다.
실수가 아닌 것입니다. 죄는 우연(accident)이 아닙니다. 본디 있었던 것이 어느 기회를 타서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누누이 말씀합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하는 모순적 자기 존재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깊이 반성해봅시다. 과연 내가 행하는 악이 우연한 것입니까? 환경의 산물입니까? 다른 사람을 탓할 것도, 사회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내 속에 깊이 잠재해 있던 것이 오늘에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악의 실제를, 내 안에 있는 악의 실재를 인정할 줄 아는 데서부터 진실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종들은 이 사건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라지가 많이 났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농사를 망치겠습니다"라고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긍정적으로 봅니다. "가라지가 좀 있다고 걱정할 것 없다. 추수때까지 기다리자." 여러분, 일마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이 가라지 하나로 그만 전체를 어둡게 보고 맙니다. 주인은 더 많은, 더 좋은 씨앗을 보면서 이 농사를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조급해합니다. 당장 심판을 해서 결단을 내리려듭니다. "가서 뽑아버릴까요?" 주인에게 촉급하여 묻습니다마는, 주인은 "가만두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오래 참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체포당하시는 그 순간까지 참으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앞장을 서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무리를 몰고 오지 않습니까? 그가 어두운 가운데 예수님께로 나아와 "랍비여"하고 입을 맞추자 파송된 무리들이 유다의 군호(軍號)를 따라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 휘두릅니다. 베드로의 정신없이 휘두른 칼에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가 떨어져나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떨어진 귀를 도로 붙여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십자가를 져야 하는 판에 쓸데없이 칼을 왜 휘두르냐는 의미깊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이렇게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짓에는 당장 벼락을 내리치실 것이지 하면서 자기의 잘못에는 오래오래 참아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고 선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십니다. 고루고루 내려주십니다. 내 허물을 참아주시듯이 다른 사람의 악도 오래오래 참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만홀히 여겨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종들은 가라지에 대하여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투쟁적으로 대합니다. "뽑아버릴까요?"하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 스스로 종속감정에 휘말립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노예해방이라는 문제 하나를 놓고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 7년 여의 전쟁 동안 많은 희생이 지불되었습니다. 더욱이 링컨 대통령이 남쪽에 대하여 관대하다고 해서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문에 좀더 빨리 끝날 수도 있었던 전쟁이 길어지고, 그래서 더 많은 희생이 따랐다는 것이지요. 어느날 파티에서, 한 여성이 이 문제를 놓고 대통령을 보고 정면으로 충고합니다. "각하, 당신의 책임은 적에 대하여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이 충고를 듣고 링컨 대통령은 껄껄 웃으면서 한마디합니다. "그들을 나의 친구로 만들면 적은 자연히 진멸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악을 미워합니다. 잘하는 일입니다만 그러나 악한 사람을 가르치면서 내가 악해집니다. 악한 사람 버릇 고쳐준다고 하다가 자기가 오히려 더 악해지는 것입니다. 정의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의를 파괴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민족을 망치고 있습니다. 악한 일에 너무 마음을 집중하다보면 내가 악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린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마는, 이것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에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은 좋은 곡식을 생각합니다. 가라지 보다는 좋은 곡식에 마음을 두어 더 아끼고 사랑합니다.
또한, 가라지가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마지막에 어떻게 될 것인가---종들은 악의 존재와 악의 확산을 염려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말을 알고 있습니다. 종말에 있을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현재의 혼란을 잠시 유보시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가라지가 함께 자람으로써 곡식이 잠시 고생하게 될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당장 악을 제거함으로써, 즉시 심판함으로써 곡식에 끼칠 그 결정적인 피해에 대한 염려에 있습니다.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은 당연히 불편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 좋은 곡식이 뽑혀지면 안되겠기에 가만두라 하십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악한 사람 만 명이 망하는 것보다 의인 하나가 죄없이 희생되는 것이 하나님께는 더욱 마음아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흙을 헤치고 보면 가라지의 뿌리와 좋은 곡식의 뿌리가 서로 얽히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뽑으면 좋은 곡식까지 뽑히고마는 일이 허다합니다. 저도 어려서 농사짓는 것을 보아서 압니다마는, 가라지를 뽑느라고 뽑아보면 엉뚱하게 딴 것이 나오기 일쑤입니다. 그럴 때에 마음이 참 아픕니다. 생명을 아끼시는 주님의 마음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는 목회자로서 나이가 꽤 들었나봅니다. 전에 없이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나 후배 목회자들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일을 물어오고 고민을 토로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목회하기가 힘이 듭니다. 교회를 떠날까 하는데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나름대로 중대한 질문을 해옵니다. 개척교회를 하느라면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특별히 예배당을 짓는다거나 하는 큰 일을 좀 하려고 하면 꼭 브레이크를 걸고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사람이 조직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옵니다. 이것이 참 괴롭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쇠 귀에 경 읽기'입니다. 고집불통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다가 혹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설교를 못하겠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고충을 이야기해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교인이 몇 명이나 되는가?" "200여 명 됩니다." "그러면 그 200명을 보지 왜 그 한 사람을 보는가? 예수님께서 많지도 않은 12명의 제자를 앞에하고 설교하실 때에도 그 가운데 가룟 유다가 끼어 있지 않았는가? 훨씬 많은 200명을 보고 참고 견디게나!" 이렇게 위로하여 보냅니다마는, 그실 강대상에 서서 설교를 하다보면 그러한 일이 참 많습니다. 어쩌다보면 앞에 앉은 사람이 졸고 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면 저리 고개까지 떨군 채 조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설교가 안됩니다. 설교가 헛갈립니다. 그렇게 되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기도하고 얼른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열심히 귀기울여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옆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 고개숙이고 낙서하는 사람, 졸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 시선이 가면 그날 설교는 시쳇말로 죽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 선을 극대화함으로써 악을 막아야 합니다. 악에 촛점을 맞추어 악을 막을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악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동안에 선의 그 큰 가능성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의 많은 장점을 보고 그것을 살려나감으로써 단점을 극복해야 합니다. 단점 한두 가지를 끄집어내어 버려라 고쳐라 소란을 떨면 자칫 그많은 장점까지 다 소멸하고 말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임시이기는 합니다마는, 가라지와 좋은 곡식이 함께 자라야 하는 불편함에는 전적으로 손해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과 악이 함께 거처하다보면 악에게도 유익함이 있습니다. 물론 불편이야 따르겠습니다마는, 분명 유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산 속에 목장을 크게 짓고 수백 마리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다른 짐승들도 먹을 것이 많아서 그런 대로 조용한데, 겨울이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에 가두어놓은 양들을 노리고 여우나 이리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목장 주위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주위에 모여들어 울음소리를 내면 양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정신없이 우리 안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간혹 한두 마리씩 잡혀 먹히기도 합니다. 하는 수없이 주인은 사냥꾼을 몇 명 사서 근방에 있는 여우와 이리들을 모조리 잡아죽이게 합니다. 이제는 이리 소리도, 여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양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많이 번식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겨울만 되면 많은 양이 얼어죽는 것이었습니다.
전과 똑같은 시설인데도 얼어죽는 것이 이상하여 조사해보니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밖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에는 무서워서 벌벌 떨며 내내 우리를 돌아다녔으니 그것으로 운동이 되어 얼어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이 없어지자 그저 배불리 먹고 늘어져라 잠만 자다가 얼어죽는 것입니다. 악의 유익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더는 할말이 없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환난과 시험, 내가 감당할 만큼 주십니다.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내게 꼭 필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악인은 선인에게 인내와 온유를 가르치고, 선인은 악인에게 회개를 가르친다.'
발명왕 에디슨의 말년의 일화입니다. 나이가 많아 귀가 점점 어두워지자 큰 소리밖에는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의사가 진찰을 하고 수술을 하면 낫겠다며 수술 날짜를 받아줍니다. 그러나 그 날, 에디슨은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찾아갔을 때, 에디슨은 변함없이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큰소리로 묻습니다. "왜 수술을 안받으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에디슨이 대답합니다.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않으니 연구하기 좋구먼. 그냥 살려네." 여러분, 우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너무 많이 들으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께서 택하신 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성장에 있습니다. 악이 존재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을 불평하지 맙시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반드시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가라지가 변하여 좋은 곡식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가라지 입니다. 끝까지 가라지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좋은 곡식, 곧 알곡에 있습니다. 알곡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많은 교인들을 만나보면 만날 때마다 늘상 좋은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고, 걱정거리만 늘어놓는 분이 있습니다. "아이고 세상 끝났습니다" "왜 이리 악해만 집니까?" "정말 말세인가 봅니다"---만날 때마다 인사가 이렇습니다. 그런 분을 만나는 것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도 많은데 왜 나쁜 이야기만 늘어놓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나쁜 방향으로만 보려 하면 점점 나빠만 집니다. 옛날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더 심한 때도 많았습니다. 좀더 밝은 것을 생각합시다. 좀더 밝은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 그 종말론적 심판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살아 역사 하시는, 그 주님의 역사 안에서 보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관심, 우리의 시각을 하나님의 그것에 일치해나갈 때에 우리에게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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