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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전파하는 증인(사도행전 9:19~2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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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전파하는 증인(사도행전 9:1922)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 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91절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마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일단 스데 반을 죽인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 거의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이 사람이 이제 이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저 다메섹까지 피하여 간 사람들, 피난간 사람들을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추적합니다. 요샛말로 하면 공문은 하나의 구속영장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제 다메섹까지 쫓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그 사람들을 잡아다가 말살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일행과 함께 지금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만나주시고 저를 불러주 십니다. 이로써 그는 예수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사울의 이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의 인간의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사건입니다. 사울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변명할 시간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강권적으로 붙드시고 거꾸러뜨리시고 강제로 인도하셨습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내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사울은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피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됩니다.

자기가 체포하려 했던 바로 아나니아를 만나서 이제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세례를 주고 위로함으로 이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사울의 입장은 말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보더라도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갈 때에 기세가 등등하고 살기가 등등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등등했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초라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고, 주는 음식을 먹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제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더불어 며칠을 머무르게 됩니다. 그 때에 그가 이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오직 한마디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설명이 붙었을 것입니다. 그 예수를 내가 만났다, 그 예수는 부활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예수는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그 예수를 내가 노상에서 만났다, 그는 메시야요 그리스도다, 라고 증거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회심(回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회심의 과정을 종교심리학적으로 연구하여 분석하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급진적 회심----- sudden crisis conversion입니다. 급격하게 회심하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습니다. 1978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천 명을 상대로 조사하여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인 천 명 가운데 33퍼센트가 회심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회심을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 없이 덜렁덜렁 따라다니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저 교회에 다닐 뿐이지요. 아직까지 회심이라고 하는 것을 똑바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회심을 경험하는 사람은 33퍼센트 가운에 18퍼센트가 급진적 회심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어느 순간에 확 바뀌는,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 통계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우리 교인 가운데 한 5퍼센트 정도가 급진적 회심을 경험한 것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외국의 통계이지만 우리의 경우도 별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많은 교인들이 나와 있지만 한번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전체 교인 수에 비하여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나오는 신도 수가 한 이만여 명되는데 지금 여기에 나온 분은 한 삼천여 명됩니다. 이만 명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수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말로 영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33퍼센트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것은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18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체 교인 가운데 약 5퍼센트가 급진적 회심을 경험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통계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점진적 회심----gradual conversion이 있습니다. 급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고 천천히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1, 2, 어떤 때에는 10년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깨닫고, 그러면서 달라지고, 그러면서 그리스도적 인간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이런 의미의 변화는 80퍼센트에 달한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의 등록하는 것을 봐도 그래요. 10년씩이나 교회에 나온 뒤에 등록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지간히 굼뜹니다. 진작 등록하면 안됩니까? 뒤늦게 딸 시집갈 때나 되어서야 등록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이런 골치 아픈 일을 겪었습니다. 교회 다닌 지는 10년이 나 되었는데 아직껏 세례를 안 받은 분이 있었습니다. 세례 안 받은 사람에게는 결혼 주례를 서주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그 때에 와서야 세례 받겠다고 하는데 "안됩니다. 세례 받은 후 적어도 6개월이 지나야 합니다" 했더니 '아이구, 큰일났다' 합니다. "제가 실은 예수 믿은 지가 10년이나 됩니다"하는데, 보니까 저도 알만한 얼굴입니다. 많이 본 사람인데 이 사람 아직도 세례를 안 받았어요. 이것이 꼭 무엇과 같은고 하니 결혼식 안하고 사는 부부와 같습니다. 아이 낳고 살면서 아직도 결혼식을 안 했어요. 호적에도 안올리고……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천천히, 어지간히 천천히 변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변하긴 변합니다. 끝에 가서는 변합디다.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에 세례를 받은 사람 한 분이 저를 만나 인사를 하기에 제가 "세례 받은 것을 축하합니다" 했더니 그분 대답인즉 "저 예수 믿은 지 30년 되었습니다" 합디다. 그래서 제가 "그럼 그 동안에 교회는 안 다녔습니까?"라고 물어보니 "다니기는 이 교회 저 교회 다녔습니다" 하더군요. 그분 대답에 약간은 어이가 없기도 해서 "좀더 다녀보시지 그래요" 했더니 "여기서 정착하렵니다. 그래서 세례 받았지요"라고 대답하더군요. 이것이 다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이러한 점진적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많습니다. 1, 2, 10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이런 경험도 하고, 저런 말씀도 듣고 하면서 차차 변화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무의식적 회심----unconscious conversion이 있습니다. 소위 모태교인을 보십시오. 이건 어디서부터 변하는지 자기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교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 다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교인 아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교인 아닌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습니까? 비 교인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 와서는 비록 신통한 교인이 아니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분명한 교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생활이 평소 문화화해 있기 때문에 교회생활에서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시쳇말로 화끈한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살 때에 그는 타락을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한계 이상의 타락은 하지 못합니다. 죄를 지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이상의 죄는 짓지 못합니다.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출석하는 것은 비록 시원찮아도 그러나 그는 크리스찬입니다. 비기독교인하고 만났을 때는 엄연히 교인입니다. 더구나 죽을 때는 틀림없이 교인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꼭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적 교인입니다. 자기도 자기가 교인인 줄 모릅니다. 자기도 자기가 중생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변화는 되어 있습니다.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무의식적 회심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재통합적 회심----reintegration conversion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인데 그것이 확실치 않습니다. 어떤 때는 교인이고, 어떤 때는 교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때에 가서 획기적 경험과 함께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born again입니다.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가서 비로소 깨닫고, 비로소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획기적인 시간과 함께 참 교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것을 재통합적 회심이라고 합니다.

물론 교인이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온적인 상태에 있다가 어떤 계기로 참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그 계기는 고난일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에 실패했다던가, 병들었다던가, 큰 어려움을 당했다던가 하는 시련을 겪는 순간에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하면서 생각이 확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획기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소위 중생이라고 하는, born again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계획된 회심-----programmed conversion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지적이요 인위적인 변화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 빌리 그래이엄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나온 분들 가운데 그 목사님이 "Come to Jesus Christ"라고 외치자 뜨겁게 느끼고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온 분들이 많습니다. 그 때는 결심이 돼 가지고 나옵니다. 이것은 계획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렇게 나와서 꿇어앉아 가지고 ', 이제 나는 참 교인이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얼마는 남고 얼마는 돌아갑니다. 계획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의지적인 데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어느 특별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중생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부흥회를 열 때에 회심한 사람 손들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손 번쩍 들고 나오기도 합니다마는, 아무래도 그것을 100퍼센트 다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100퍼센트로 굳어지지도 않고, 결심되지도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을 가리켜서 계획된 회심이라고 이름 붙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요 의지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말 신비로 운 역사가 있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이 변해서 예수 믿고 바울이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도 바울이 경험한 사건은 어떤 것입니까? 급진적인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인 가운데 약 5퍼센트만이 급진적 회심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화끈한 경험이 없다고 해서 중생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천천히 달라진 사람도 있고, 그대로 미온적으로 있다가 어떤 계기에 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회심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바울과 같은 급진적 경험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같이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바울같이 환상을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이런 급진적 경험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이런 경험을 안 가지고도 중생한 사람이 많을 뿐더러 훌륭하게 중생된 인격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너무 급진적인 면만 추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회심을 통한 그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변화 양상에 대하여 그 변화 중심적으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체험적인 변화입니다. 생각으로는 막연히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 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중생이 어떻고 …… 알기는 곧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맹숭맹숭합니다. 지극히 지적인 교인, 지성적인 교인, 미온적인 교인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렇듯 지적으로, 지식적으로만 받아들이고 나가다가 어느 순간에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강한 체험에 부딪히게 될 때에 중생함으로 지적인 교인에서 체험적인 교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적인 것이라든가, 깨닫는다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체험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가운데 이런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 목회 한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교회가 부흥이 안됩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항상 윤리적이고 지적입니다. 많은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사회가 어떻고, 윤리가 어떻고, 세계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부흥 안될 수밖에요. 그러던 중 그분이 폐렴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못 고친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큰일 났어요. 산에 들어가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분의 말을 들어보니 그 때에 온몸이 불덩어리에 던져지는 것처럼 어떻게 뜨거운지 좌우 간 다른 소리는 안나오더랍니다. 뜨겁다고, 타죽는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끝나자 은혜스럽게도 병균이 다 죽어 건강해졌습니다. 그 뒤에 그분은 일류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확 달라졌습니다. 저는 부흥회 여러 곳을 다녀보았지만 성가대가 성가 하면서 손뼉 치는 것 아직까지 못 봤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연합 부흥회에서 그분이 있는 교회 성가대가 나와서 성가를 부르는데 박수를 막 치면서 부르는 것입니다. 정말로 화끈하게 하더군요.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그 목사님이 그것을 좋아하거든요. 그 동안에는 학문적이고 지적이고 했지만 이제는 그것 다 쓸어버리고 체험밖에는 모릅니다. 내가 체험했으니까요.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체험적 변화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마는, 어쨌든 그 목사님은 체험이 없는 교인으로 지적인 것만 추구하다가 이제는 체험과 함께 변화한 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체험 지향적, 좀더 종교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감정 지향적 변화가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성적 변화가 있습니다. 그저 교회 나오라니까 꼭 나와야 할 것 같아서 나오고,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기 괜찮아서 나오고, 분위기 따라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서 나옵니다마는, 이해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깨달음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성경만 손에 쥐면 잠만 오고 말이지요. 영 모르겠어요.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미온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심으로 깨닫기 시작합니다. 깨달으면서 는 구절 구절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도 나를 위한 말씀이요, 요것도 나를 위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목사님 설교도 꼭 나보고 하는 이야기만 같습니다. "목사님은 참 머리도 좋으십니다"하는 인사를 참 많이 받습니다. 어떻게 자기 비밀을 다 알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날 그날의 자신의 마음까지 다 알아 가지고 그렇게 설교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말씀이 이제는 네게 주시는 말씀으로 깨달아집니다. 전에는 아무리 봐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리 들어도 깨달음이 없었는데 이젠 깨달음이 생깁니다. 깨달음 쪽으로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물론 깨달으면서 생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변화입니다.

세 번째로 도덕적 변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의지가 부족한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담배를 끊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못 끊습니다. 나쁜 버릇이 있어 이것을 꼭 버려야 하겠다고 하면서도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게을러서 매일 저녁 새벽기도에 나가야지 하 고 결심을 해놓고도 매번 못나옵니다. 의지가 약하다는 말입니다. 저녁에는 꼭 나가야 하겠다고 해놓고는 다시 아침이 되어서는 내일부터 하지 합니다. 이렇게 반복되기를 30년입니다. 이것은 의지박약입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또는 모든 일에서 욕심을 버려야 하겠다 하면서도 못 버립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성령의 강한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부터 욕심이 없어집니다. 도덕적 의지가 생겨납니다. 전에는 도저히 줄래야 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까워서요. 그러나 지금은 얼마든지 줄 수가 있습니다. 전에는 도저히 자기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쉽게 참을 수도 있고, 쉽게 이길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한마디만 좋지 않은 말을 들으면 열 마디로 싸웠습니다. 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얼마든지 져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승리요, 도덕적 변화요, 도덕적 의지의 변화인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중생에서 오는 변화, 사회적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감성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다른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옛날의 친구들에 쏠려 다닐 때에는 친구를 잃어버리면 꼭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생하고 보니 저 친구들은 아무래도 나하고는 방향이 다릅니다. 그들과 더는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제는 교회에 들어와서 다시 친구를 찾게 됩니다. 사회학적으로 크리스찬은 전에 있던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되 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속이 달라집니다. 사회학적으로 소속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울의 경우 확실히 체험적입니다. 그리고 체험됨과 동시에 그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전에 알았던 성경을 십자가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흔히 'Christianize the old Testament'라고 말합니다. 구약을 신약화해서 십자가 중심 적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체험한 중생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체험했고 이렇게 깨달았지만 아직 성서적으로, 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는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신학화(theologizing)하지를 못했습니다. 아직 체계화하지를 못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로부터 배우고 그 즉시로 회당에 나아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라비아로 갑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아라비아에 가서 3년을 지냅니다. 여기서 체험한 바를 다시 성서적으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으로 왔다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런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과정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체험과 동시에 그리스도적 이해가 확 바뀌게 됩니다. 이해가 확 달라지면서 그는 그리스도적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장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머리가 깨끗해졌습니다. 여기서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는 목적이란 것이 있고, 방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방법은 문화화한 자기를 말하는 것이요, 목적은 생의 가치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적은 순간적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죽을 때가지 오랜 시간을 두고 바뀌게 됩니다. 가령 한 여자가 시집을 간다고 해봅시다. 전에는 자기 혼자서 혹은 친정식구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음식을 만들어도 자기를 위해서 혹은 친정식구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가면서 이제 그 목적이 바뀝니다. 이제는 시집식구들을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음식솜씨는 여전합니다. 친정에서 배운 그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변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시집왔다고 해서 그 당장 시집식구들의 식성이라든가 생활습관에 맞춰 자기 생활 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가졌던 자신의 생활습관을 아직은 버릴 수 없습니다. 상당한 기간 동안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목적은 순간적으로 바꾸어지는 데 비하여 방법은 좀처럼 쉽게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당을 섬기던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좀 시끄럽게 믿습니다. 무당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방법이 무당이지 그 목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그런가하면 불교 믿던 사람은 예수 믿으면 조용하게 믿으려 합니다. 염불하던 솜씨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방법입니다. 그리고 유교의 율법을 엄격히 따르던 사람을 기독교를 상당히 계율적으로 믿으려고 합니다.

이것도 그의 방법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확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수 믿는 방법은 상당히 율법적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상당히 율법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율법적 표현들은 모두 사도 바울 나름의 구약적 방법론입니다.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한참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듯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그 중심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참으로 위대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목적을 바꾸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흔히 지난날의 자신의 습관을 바꾸거나 버릴 때에 좀 창피해하고 쑥스러워합니다. 울다가 웃으려고 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울다가도 쉽게 웃고, 웃다가도 쉽게 우는데 어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좀 쑥스럽거든요. 이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사실 울 일이 있으면 울고, 웃을 일이 있으면 웃어야지 왜 못 웃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깨끗한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함에 조금도 유감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변명도 없었을 뿐더러 자기가 지난날에 속했던 그 공동체에 대하여 증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을 전도해서 예수 믿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훌륭했습니다.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괴로워했고, 저 사람들에게 속아 가지고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잘못하면 지옥 갈 뻔했구나, 따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위대하게 만드는 면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를 오해할까봐 걱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왔던 사람이 돌아서서 예수를 전도하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그는 조금도 자기변 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할 뿐이었습니다. 여기게 또한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전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특징이 있습니다. 회심은 이렇게 즉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는 체험하고 깨닫고, 그 즉시로 증거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그 한밤중에 즉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그 예수님을 자기들이 만났음을 증거 합니다. 서둘러야죠. 하룻밤 자고 갈 수 없습니다. 바울도 이렇게 깨닫고 체험한 즉시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성적으로 체계화하지 못했습니다. 학문화하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의심이 많고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체험한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리적인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확신에서 합리적인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에 보면 이치가 이렇고 저렇고 하는데, 그것 백번 얘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상대방에게는 이미 확신이 있습니다. 이제 그 확신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대방의 이론을 통하여 내 마음에 확신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가서 정 이론이 딸리면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맙니다. 내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전도하면서 변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변론은 오히려 마음을 다치게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합리적인 이론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확신이 있을 뿐입니다. 체험을 통해서 얻은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합리적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확신에서 합리적 이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체험한 확실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합리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2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증거 함으로 핍박이 생기자, 그는 더욱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가만히 두면 희미해지고 나중에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말을 하면 점점 강해집니다. 게다가 상대방이 반대를 해오면 더욱 강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증거 했기 때문에 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증거 하면서 점점 더 확실해졌다는 것입니다. 더 힘을 얻어서, 더 큰 힘을 얻어서 증거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22)." 그렇습니다. 이제 바울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체험했으니 당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지식이 있으니 당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철저하게 구약적 이론에 통달한 방법론이 있으니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용기가 있으니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에 생명을 바친 사람이기에 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서 바울은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바친 사람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1:2224)." 사울이 잔해하던 그 그리스도를 지금 그가 돌변해서 전한다 하는 말을 듣고, 엄청난 변화를 보고, 굉장한 사건을 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회심은 자기만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증거할 때에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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