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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를 보느냐(누가복음 7장 40절~50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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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를 보느냐(누가복음 740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두 유형의 인간상을 대표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시몬과 마리아입니다. 시몬은 당시의 종교계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깨끗하고 거룩하고 특별히 성결하다고 하는 바리새인입니다. 의로운 자로 대표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마리아,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마는, 이 여자는 죄인의 대표입니다. 드러난 죄인입니다. 여인에게 순결은 생명이나 같습니다. 아마도 본문의 이 여인 마리아는 순결을 잃은, 전설에 따르면 부정한 자, 곧 창녀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죄인으로 취급받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극과 극의 두 사람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극과 극의 두 사람, 곧 시몬과 마리아가 그리스도 앞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인 시몬이 어떠한 이유로 예수님을 자기집에 초대하였는지를 확실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본문의 맥락으로 보아 진정으로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거나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집으로 초대한 것에는 다분히 예수님을 초청함으로써 자기영광을 얻으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의 인품과 덕행,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동리에 오신 귀한 손님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풍속을 보면 경건한 유대인으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여섯 가지의 덕행이 있었습니다. 이 여섯 가지의 덕행을 항상 마음에 두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스스로 덕이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며 노력한 것입니다.

그 여섯 가지 덕행의 첫째는 공부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이 덕이었습니다. 둘째는 환자를 심방하는 것입니다. 세째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아는 손님이건 모르는 손님이건 가리지 않고 대접합니다. 특별히 높은 신분의 손님을 자기 집에서 영접하면 자기의 격도 그 손님만큼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기도입니다. 다섯째는 자녀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칭찬입니다. 남의 장점을 들어 칭찬하는 것이 덕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덕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남을 비난하거나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과 행동은 자신을 위해서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이 사는 동리에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예수님께서 들어오시자 시몬은 생각합니다. '저분을 누가 영접할 것인가? 이 마을의 대표자인 내가 영접해야 한다'-----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했습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었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마리아라는 이 여인의 경우를 보십시다. 이 여인은 본디가 죄인입니다. 본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나 뵈었고 예수님께로서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께 죄사함받은 그 기쁨을 가지고 무엇으로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오늘이 시몬의 집에 불청객으로 와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집인지, 누가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거기 계시기에 따라 들어갔을 뿐입니다. 따라 들어가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란 물질적인 것도 아니요 병고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사해주신 것, 저를 사람대접 해주신 것, 하나님의 딸로 영접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순수한 동기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기의 정성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는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에 하는 특별한 행위가 있었습니다. 먼저, 주인이 손님의 어깨에 손을 얹고 평화의 키스를 합니다. 서로 어깨에 손을 얹고 볼에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환영한다는 마음을 나타내는 지극한 표현입니다. 서양사람들을 보면, 그리 반갑거나 친근한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만나기만 하면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고는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손님을 영접하는 행위입니다. 둘째, 먼 길을 오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시원한 물로 손수 씻겨야 합니다. 영접하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본인이 직접 씻기거나 또 자기의 아내로 하여금 씻겨주게 하면 더욱 훌륭한 대접이 됩니다. 세째, 그다지 위생적이라 할만한 환경이 아니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손님을 영접하게 되면 집안에 향을 피우든가 그 손님의 머리에 고급 향유를 뿌려서 방안에 향기가 가득하게 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행위가 주인으로 손님에게 행하는 가장 성대한 환영예식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바리새인인 시몬이 이 예식을 모르는 사람이 아닐 터인데도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이 세 가지의 일을 다 생략해버립니다. 정성 없이 자기중심, 자기본위적으로 영접해서 음식만 대접한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접받으시는 순간, 아주 과감하게 그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고 내게 입맞추지도 아니하였으며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여인을 칭찬하십니다.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눈물은 회개요 그 소중한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는 것은 겸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겸손입니다. 죄송합니다마는, 이 가운데 결혼하신 분들, 아내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같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면 모르긴 해도 대부분의 여자들이 안 살겠다고 당장 보따리를 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상상이나 해봅시다.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는다---굉장한 장면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참회와 함께 머리털로 발을 닦는 귀한 예식을 이 여인은 행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고백이 이 정도입니다.

그런가하면 발에 입을 맞춥니다. 눈물로 발을 적시었다고는 하지만 물로 닦은 발이 아니니 깨끗할 리가 없습니다. 발에 입을 맞춘 것은 더 없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볼에 맞춘 것이 아니요, 손등에 맞춘 것도 아닙니다. '나는 이 정도의 인간밖에 되지 못합니다'라고 자기를 지극히 낮추면서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향유도 머리에 붓지 않고 발에 부었습니다. 감히 머리 위에까지 손을 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발에 향유를 부어 온 방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번지게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라는 단어가 세 번나옵니다. 눈물로 발을 적시고, 발에 입을 맞추고 발에 향유를 부었다---''이라는 말을 거듭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참 겸손과 높은 데에 계신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존경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 감격의 순간에 시몬은 이 행위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마리아의 거룩한 행위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알 리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을 대조해봅시다. 시몬이 영적인 죄인이라면 마리아는 육적인 죄인입니다. 시몬은 분명히 내적인 인격면에서 죄인입니다. 곧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미 드러난 죄인입니다. 외적인 죄인입니다. 시몬은 저가 죄인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의인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제 거기에 플러스 알파(plus α),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의와 덕을 추가하려고 합니다. 이만큼 자기를 높이 보고 있는 시몬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시몬의 죄가 'the sin of omission,' 곧 부작위적인 죄인 것에 비하여 마리아의 죄는 'the sin of commission,' 곧 작위적인 죄인 것입니다.

시몬이 행동으로 죄를 지은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마는, 소극적이요 태만합니다. 그러므로 내적 깊숙이에 죄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거듭 말씀드리는바, 겉으로 드러난 죄인입니다. 그러나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 DTXT?황에서 시몬은 마리아를 비판합니다. 내적으로 죄인이요 겉으로는 의인인 사람이 겉으로 죄인이요 내적으로는 의인인 사람을 비판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위선자가 세상 규례에 의한 외적 죄인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무디(D.L. Moody)는 전직이 구두 직공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은혜를 받고 훌륭한 부흥사가 되어 큰 역사를 이루고 있을 때입니다. 어느날 어느 마을에서 수천 명을 앞에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 때에 참석해 있던 한 대학교수가 가까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만, 목사님께서는 15분 동안 설교하시면서 16번의 문법적으로 잘못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만 없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것이 거슬려서 저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에 무디 목사는 대답합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이라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무식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애를 씁니다. 당신은 그 많은 지식으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디 목사의 이 말에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언제나 선한 일에는 비판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바리새인인 시몬은 마리아의 과거를 보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그를 보고 죄인으로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현재를 보셨습니다. 과거를 보시지 않고 미래를 열어주셨습니다. DTXT제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나아가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갈 환한 미래를 열어주시고, 그 미래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용서와 수용의 마음으로 구원받은 죄인, 용서받은 여자를 보시면서 그 미래를 내다보시고 계십니다. 미래를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주된 관심사는 심판과 정죄입니다. 죄스러운 과거를 보고 이 여자를 가혹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늘 행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행위마저 정죄하고 있습니다. 선행까지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 아름다운 선행임에도 이것까지 정죄해버립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높이 칭찬하시고 시몬을 아주 낮추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는 네 마음대로 이 여자를 보고, 네 규례대로 비판하려 하지 말고 내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여자를 보아야 할 것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시는 줄로 압니다. 이 여자의 회개와 겸손과 사랑, 그리고 약속된 미래와 아름다운 인간과 중생한 인간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말이 없습니다. 많은 비난속에서도 말이 없습니다. 어쩌다 우리가 선한 일을 좀 하려고 하면 꼭 비난이 따릅니다. 분수에 넘치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돈도 없는 것이 별것을 다한다느니, 무식한 것이 뭘 한다느니, 죄인 주제에라느니---아주 비난이 많습니다. 선한 일 치고 비난 받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침묵할 뿐입니다.

성 마카리우스라는 분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까?" "공동묘지에 가서 '이 나쁜 놈들아!'라고 욕을 해보아라." 제자들이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훌륭한 분들이여'라고 칭찬을 해보아라." 또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답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그것이 죽은 사람이니라." 예수믿는 사람은 모진 비난을 받아도, 극진한 칭찬을 들어도 말이 없다, 죄인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세상에 대하여 죽은,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요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여인은 무서운 비난 속에서도 말이 없습니다. 침묵과 사랑의 행위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세 가지의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두려움이 없이 신령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평화와 용서를 받았기에 죄에서 해방된 가운데 살아갑니다. 죄의 가책이나 저주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인간으로 삽니다. 1830, 조지 윌슨이라는 사람이 우편물을 훔친 죄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앤드루 잭슨(Jackson, Andrew) 대통령이 정상을 참작하여 그에게 사면장을 내렸습니다마는, 그는 정중히 그것을 거절합니다.

석방할 수도 없고 처벌할 수도 없고 하여 당국에서는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존 마샬이라고 하는 대법원 판사에게 결정권을 맡깁니다. 이리하여 마샬 판사가 판결을 내립니다. "사면장이란 한낱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본인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를 사형에 처하라." 여러분, 용서한다는 말을 감사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마리아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수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면 나도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용서하셨는데 일생동안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아서 문제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를 용서합니다. 이제는 죄인이 아닙니다. 죄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사람으로 살아납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째로, 고난 중에도 그분의 임재를 알며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기에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에 어떠한 고난을 당해도 저주가 아닙니다. 병들어도 저주가 아니요, 사업의 실패도 죄 때문이 아닙니다. 바르게 예수믿는 사람은 고난도 내게 주시는 사랑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의 증거요, 또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구체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수용하는 이 사람이 진정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있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있다, 둘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이 탕감해주었느니라."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은 전적인 타락을 말씀함입니다. 여기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직 주인이 탕감해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의 의로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 고(故事)에서 나온 '오십소백(五十笑百)'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나라 혜왕이 맹자에게 정사(政事)에 관하여 물었을 때에 맹자가 대답한 말입니다. 전쟁에서 패하여 어떤 사람은 오십 보를, 어떤 사람은 백 보를 패주하였습니다.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 백 보 도망간 사람을 보고 비겁하다고 비웃었다는 말입니다. 오십 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백 보를 도망간 사람이나 도망가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조금 더 도망가서 비겁하고 덜 도망가서 의롭습니까? 의인이면 얼마나 의롭고 죄인이면 얼마나 큰 죄인이겠습니까? 모름지기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고, 안다면 얼마나 압니까?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교만죄 만큼 무서운 죄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오직 은혜로 살 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클 것도 작을 것도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우리가 모두 죄인이지만, 우리 가운데 시몬 형의 교인이 있고 마리아 형의 교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턱없이 교만한 시몬같은 바리새인,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물을 것도 없습니다. 그는 워낙에 죄인이므로 더 큰 사랑을 받았고, 더 열심히 사랑하는 나머지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을 맨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밀한 사랑, 비밀한 감격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비밀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 오직 침묵, 그리고 오직 헌신과 감사와 찬송이 있을 뿐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이 귀한 축복을 이 여인이 누리게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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