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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한 대답의 능력(잠언 15장 1절~10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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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한 대답의 능력(잠언 15110)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1976년 미국 대통령선거 유세 때,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 미드(Margaret Mead)여사는 지미 카터(Jimmy Carter)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연설하는 내용보다 그 스타일, 즉 어조와 말씨에 유의하십시오."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카터의 고문관들 역시 같은 내용으로 충고했습니다. 신시어러티(sincerity)--성실성이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서 대세가 판가름난다고 한결같이 충고한 것입니다.

무릇 문제는 성실성입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가슴입니다. 어조와 말씨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정신의학을 연결시켜서 태어난 새로운 학문에 메타커뮤니케이션(metacommunica- tion)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은 말이 아닌 몸짓으로, 얼굴빛으로, 눈빛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 학문은 설명합니다. 그래서 정치가나 배우, 심지어는 외판원들까지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합니다. the pitch of the voice--음성의 격조(格調)가 원리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증오가 깃들어 있든지, 근심걱정이 풍기든지, 잔뜩 수심에 쌓인 음조(音調)로는 아무리 내용 좋은 말을 해도 그대로 전달이 안됩니다.

그리고 volume of the voice, 즉 목소리가 크냐 작으냐 하는 음의 양이 중요합니다. 요새는 목소리만 크면 될 줄로 알고 소리를 지르는데 오히려 듣는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멀리 갑니다. 이것처럼 바보짓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스트레스(stress)---긴박성입니다. 이 긴박성의 정도에 따라 의사소통이 잘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합니다. 그 다음이 인토네이션(intonation)--음률입니다. 말도 음악과 같아서 이 음률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듣는 사람의 마음이 열립니다. 다음은 악센트(accent)--강세입니다. 또하나는 인텐서티(intensity)--강도입니다. 종합하면 결국 이것들은 모두가 이모셔날 시그널(emotional signal)입니다. 감정적인 신호입니다.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어조를 통하여 듣는 사람의 가슴으로 어떻게 전달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결국 말이란 그 내용보다는 가슴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격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극단적 표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충동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날마다 충격적인 사건들이 우리의 마음을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업은 아주머니가 연세대학 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뒤로는 몇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주머니의 전화통화가 좀 길었던 모양입니다. 재촉하는 뒷사람과 몇마디의 말이 오가던 끝에 그 아주머니가 그 사람이 찌른 칼에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고받던 말들이 거칠고 사나웠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끔,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고 저를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퍼렇게 멍이 들어 가지고 와서는 남편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물론 좋은 말은 없이 모두 나쁜 말만합니다. 그 때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남편이 당신을 때리기 직전에 당신은 무슨 말을 했나요?" 대답은 거의가 비슷합니다. 남편보고 "죽여라!" 소리지르며 대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 남편은 착한 분이시네요. 죽이라고 했는데 때리기만 했으니 양반이 아닙니까?" 욕도 벌어서 먹고, 매도 벌어서 맞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두고 폭행이니 폭력이니 합니다. 폭력적인 언어는 폭력이 아닙니까? 살인도 행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친 말 몇 마디 끝에 살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말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친절한 자에게 친절한 것은 보통사람이요, 친절한 자에게 불친절한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그리고 불친절한 자에게 친절한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5:46)."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랑 못 받는다고 불평하는 것, 누구는 못합니까? 정말로 어려운 것은 불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사랑이야말로 기초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부터가 원수사랑입니다. 우리가 베풀어야 할 사랑도 원수사랑입니다. 가장 쉽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 원수사랑입니다.

극치의 사랑은 친구사랑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겠다는 것, 사랑을 못 받는다고 불평하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수가 부잣집에 부름을 받고 들어가서 대문을 수리했습니다. 빗장이 떨어진 대문을 고쳐서 달고 보니 밖에다 달아야 할 빗장을 실수해서 안에다 달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들어와 보고는 "이 목수가 정신이 있나 없나? 당신, 눈은 달고 있는 거요?" 자못 격한 어조로 힐책했습니다. 목수가 대답합니다. "글쎄요. 제가 눈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눈이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요" "내가 왜 눈이 없단 말이오?" 주인이 눈을 부라립니다. 목수도 할말이 있습니다. "눈이 있다면 왜 나 같은 목수를 데려왔겠어요?" 여러분, 이쪽에서 할말이 있다면 저쪽도 할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울컥하고 소리를 지르면 저쪽은 더 할말이 많습니다. 자녀들에게 공부하라 뭐하라 하고 잔소리를 하면 그 아이들은 할말이 없을 것 같습니까? 똑똑한 아이들은 이런 답니다. "자기 자식 키우면서 말도 참 많으시네. 자기들도 우리 만할 때 공부를 시원찮게 했으면서…… 그 속에서 나온 머리니 나쁠 수밖에……"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1)." 여기에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칠십인역"분노는 슬기로운 사람조차 미치게 하느니라"라고 하는 한 절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자기 자신은 물론 지혜로운 사람까지 미치게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분노가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또 분노를…… 이렇게 자꾸 격동해 올라가면 마지막에는 터지고 맙니다. 이처럼 분노는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 격분하는 분노의 시대에 우리가 할일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이것을 쉬게 해야 합니다.

분노를 잠재워야 합니다. 창은 솜으로 막을 수 있지 창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분노를 쉬게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격한 사람들의 분노를 누가 말릴 것입니까?

우리는 자동차끼리 접촉사고가 나서 차 밖으로 나와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슬쩍 긁힌 것뿐인데도 그 싸우는 꼴을 보면 살인이 날 정도입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인 양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왜 이래야 하는지,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웃는 자 앞에서 웃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자 앞에서 웃기는 어렵습니다. 펄펄 뛰며 화를 내는 사람을 조용하게 하고 그와 함께 웃을 수 있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4)"---온유하고 선량한 혀는 생명나무와 같이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위대한 것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라고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정말 놀라운 권세입니다. 이처럼 말이란 한마디만으로도 위대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교육심리학자 블룸(Venjamin Bloom)은 가정 요건에 대하여 언어 환경과 물질적 환경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물질적 환경이란 안락하고 좋은 의주를 말합니다. 언어 환경이란 어떤 말을 주고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언어 환경입니다. 어떤 말을 하며 어떤 말을 들으며 어떤 단어를 구사하느냐, 얼마나 친절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을 주고받고 사느냐 하는 것이 행복을 좌우합니다. 그것이 가정교육의 전부라고 합니다. 좋은 집에 산다고 좋은 환경이 아니요, 언어 환경이 좋아야 좋은 환경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유순한 대답이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대답하는 자의 마음에 고요함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거친 말이 오가고, 아무리 소란해도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소망이 분명하고 믿음이 분명하고 사랑이 충만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 바로 그런 여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소화가 잘 안돼서 늘 얼굴이 찌푸려지고 신경질이 납니다.

그래서 밥만 먹으면 소화제를 찾게 됩니다"라고 환자가 하소연합니다. 의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위장병이란 약만 먹는다고 단시간에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벽은 원래 손바닥처럼 두툼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은 찬 것을 먹어도, 뜨거운 것을 먹어도, 쓴 것을 먹어도 소화를 거뜬히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가 상해서 당신처럼 위벽이 얇아진 사람은 조금만 찬 것을 먹어도 위에 무리를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위에 구멍이 나는 위천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장기간 치료를 하면서 건강한 위벽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음식의 문제입니까? 시원찮은 위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정신 건강은 어떻습니까? 가령, 여기에 박사학위가 있는 유식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누가 그에게 '이 무식한 것'이라고 한마디를 합니다. 이 말을 들어도 그 사람은 화를 안냅니다. '모르는 소리'하고는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정말로 무식한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했다가는 생명 걸고 싸우려 덤빕니다. 보십시오. 어떤 말을 주고 받았느냐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정신 건강이 어떠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신이 건강하고 그 영혼이 건강할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자기정체감이 충만할 때에는 어떤 말을 들어도 어떤 것을 보아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이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다른 사람의 분노를 보았을 때는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다짜고짜 일대일로 반응하는 반사작용을 일으킬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는 리액션(reaction)으로 살고, 지혜로운 자는 리스판스(response)로 산다고 합니다. 응답을 하되 좀더 생각을 합니다. 분노한 자의 형편을 생각합니다. 여성 여러분, 저녁에 퇴근해서 들어오는 남편이 문간에서부터 화를 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이 어려운 때에 사업한다 뭐한다 하느라 얼마나 고달플까? 무슨 사정이 있는가보지'하고 그 속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거늘 "왜 화를 내느냐"고 여유 없이 맞대들면 문 앞에서부터 싸우게 됩니다. 남자가 이런 여자와 살려면 힘듭니다. 여러분, 분노는 깊은 저쪽에 문제가 있어서 생깁니다. '저 사람은 본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따라 저러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서일 것이다'하고 좀더 깊은 데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만한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시간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냉정을 찾아야 합니다. 화를 낸다고 같이 화내면 안됩니다.

잠깐 생각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요다음이 어떻게 될까, 한 시간 후, 하루 후, 십 년 후에는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적 덕성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으로 분노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믿습니다. 이 모든 일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 순간에 문제는 해결됩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우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화를 낼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해결해줄 줄로 알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순간, 얼마든지 노()를 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이 문제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유순한 대답"이란 온유한 대답을 말합니다. 온유의 페이스(pace)를 지키는 대답을 말합니다. 이것은 첫째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의지입니다. 둘째는 열린 마음이요, 수용적 자세입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잠깐 멈추고 '이너 보이스(inner voice),' 즉 안에서 들리는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순간에 양심의 소리, 인격의 소리, 진실의 소리,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에게는 순간순간 말씀이 들려집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을 하십시다. 그러면 유순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좋은 대화가 되기 위해서 고려할 점이 여섯 가지 있습니다.

첫째, 사실성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도 알기 DTXT튄전에 화부터 내는 것, 이것은 잘못입니다. 잠언 1813절은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연을 듣고 깊이 생각을 거듭한 연후에 대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함입니다. 대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면 사실인 것은 몇 가지 안됩니다. 괜히 떠돌아다니는 말이었을 뿐입니다. 사실 여부를 진실하게 확인할 것입니다.

둘째, 자신이 하는 말이 적절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9절은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덕이 되고 은혜가 될까, 이것이 덕이 될 수 있는가, 은혜스러운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지금이 적절한 때인가, 타이밍을 생각해야 합니다. 잠언 1523절은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모름지기 말이란 때에 맞아야 합니다. 펄펄 뛰는 사람에게 전도하려고 하면 되나요? 더욱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렇게 나오면 되겠습니까?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줄 필요는 없습니다. 때에 맞는가, 지금이 적절한 시간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대체로 술집에 다니는 아가씨들이 적절한 때를 잘 파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술집 아가씨 출신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잘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남편이 화낼 때, 그 순간만은 뭐라고 얘기해도 "당신이 옳습니다"라고 말할 줄 안답니다. 그런데 소위 정숙한 여자들은 남편들이 화를 내고 나오면 자존심부터 상해가지고, 인격이 어떻고 조상이 어떻고 하며 대거리합니다.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순탄할 것을 그만 못 참고 정면충돌합니다. 이렇듯 때에 맞는 말, 적절한 시간이 중요합니다.

넷째, 자신의 태도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절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을 담아서 말하지 아니하려거든 아예 말하지 말 것이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까지는 입을 열지 말라고 말씀함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함께 인자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적절한 어휘와 단어를 골라서 사용해야 합니다. '여보'가 다르고 '당신'이 다릅니다. ''가 다르고 '우리'가 다릅니다.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를 생각하고 적절한 단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처럼 유순한 대답, 유순한 단어를 선택해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섯째, 대화에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잠언 35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말을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영이 함께해야 합니다. 마땅히 기도하고, 기도 중에 말할 것입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축복이 됩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지금 언어의 빈곤 속에 살고 있습니다. 로웰(James R. Lowel)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말 여섯 마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여섯 번째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섯 번째는 "당신이 잘했습니다"입니다. 이것은 더 위대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이 잘했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해보셨습니까? "내가 잘못했고, 당신이 잘했습니다"---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네 번째 말은 "당신의 의견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세 번째는 "if you please---가능하다면" 이라고 묻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감사합니다", 중요하고도 위대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여섯 마디 말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말은 '우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모든 잘못과 싸움은 '' '' 할 때에 생깁니다. '우리'라고 하면서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해결의 길이 복잡한 것 같아도 결국은 언어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이 격동의 시대, 격분한 세대를 누가 평화롭게 할 것입니까? 이 충동적인 공기를 누가 잠재울 것입니까? '온유한 자, 유순한 말을 할 수 있는 자, 어떤 경우에도 유순함의 본질을, 그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는 자, 그리스도의 평화로 마음을 지키고 입을 다스리는 자'---그 사람이 이 세태를 가라앉힐 것입니다. 선량한 말은 곧 생명나무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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