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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람의 모습(야고보서 3장 1절~12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구약성경 이사야 6장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는 그 순간에 이사야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외치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보는 순간에 자기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 때에 스랍 중의 하나가 제단에서 벌겋게 달아 있는 돌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을 지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이제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고 말해 줍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이사야는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 인간에게 굉장한 특권을 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름짓는 권세입니다. 사람은 자기 언어를 창조하는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을 돌이라고 부르면 돌이요, 나무라고 부르면 나무요, 심지어는 자기 자식을 낳아 아무개라고 부르면 그것이 곧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인간은 자기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즉 문화를 만들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자기 문화를 만듭니다. 그래서 언어를 허락하셨고 그 언어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인간과 대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롭고 굉장한 은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에서 쓰여지는 이 언어가 인간이 만든 것임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육신적 교리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으로 지극히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우리가 만든 언어로써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 언어로 서로 의사 소통을 합니다. 이 모든 관계에서 공통적인 것은 「말」이라고 하는 것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인간에게 부여된 특권입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는 엄청난 자유가 있습니다. 어떤 말이든 다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동시에 필요한 말만 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많은 권리를 가졌기에 그만큼 의무와 책임이 큽니다. 말하는 자에게 자유가 있고 말 듣는 자에게 자유가 있어, 무슨 말이든 들을 수가 있되 듣고 안 듣고는 내 자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엄청난 인격적인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자의 자유와 듣는 자의 자유 사이의 그 긴장된 관계 안에서 인간됨의 존재가 나타나게 됩니다. 찬양도 말이요 저주도 말입니다. 감사도 말이요 원망도 말입니다. 모두가 말로 이루어지므로 말은 곧 그 사람됨의 표현입니다. 말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에머슨은 "한마디의 말로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말 한마디를 할 때는 벌거벗은 내 인격을 내어 보이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의 철학에서, 말은 마술적인 혹은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술을 왼다든지 소원을 말하면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 사람들은 신앙적인 견지에서 축복과 저주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은 사람에게 하지만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들으며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말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잘못된 일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는 민수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이 너무 어렵고 고달파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민 14:27-28).--너희가 죽고 싶다고 했으니 죽여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할말이 있습니까?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모두가 기도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내가 하는 말의 모두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원망을 사람에게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어느 어머니가 가출한 아들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저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중에 자기의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원망까지 했습니다. 저는 더 듣기가 민망해서 한 가지 여쭤 보았습니다. "아주머니, 아들이 몹시 속썩일 때, 차라리 없어지라고 말한 적은 없었나요?" "아, 많이 했지요. 그럴 때에는 나가서 죽으라는 말도 했지요." 이 때 저는 어머니의 말이 아주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드렸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조심은 해야 합니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니까요.
어느 상인이 시장 바닥에서 지혜를 판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의 지혜가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지혜를 사기 위해 모여들었고 어서 빨리 말해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상인은 돈을 선불로 다 받아서 챙긴 다음 "말조심해" 하고는 가더랍니다. 말조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내가 말한 만큼의 운명을 살 수 있습니다. 저주하고 사는 사람은 저주스럽게 살아가고 축복하는 사람은 복된 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도 "오래 살기 원하는 자는 입을 조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속에 언제나 축복과 감사와 찬양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은 그대로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 : 36 - 37에서 예수님께서도 결정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무익한 말이란 헬라 원문대로 보면, 쓸데없이 무책임하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쉽게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한 말도 심판 날에 심문 받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한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말로 짓는 죄입니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도 말로 범하는 것이므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망령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자주 잊어버리고 원망하며 모세를 죽이겠다고 야단할 때 그는 견디다 못해 격분하여 반석 앞에서 "이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 : 10)하며 혈기를 부렸습니다. 이 한 번의 실수로, 모세는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시편 106:32-33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망령되이 말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시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일 년을 생각하며 곡식을 심고, 십 년을 생각하며 나무를 심고, 백 년을 생각하며 사람을 심고, 그리고 영원을 생각하며 말씀을 심으라." 내가 하는 말 한마디가 영원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심방을 하다 보니 교인들 사이에 서로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큰 공책을 하나 마련해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앞에 내어놓고, 당신의 불평을 여기에 적을테니 싸인을 하라고 하였답니다. 자신의 말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랬더니 불평하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기록할 정도까지 아니라고 불평을 그만두어서 40년 동안 그 공책은 깨끗하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불평은 무책임하고 쓸데없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불평은 대게 그 문제 자체의 크기보다는 마음이 좁은 데서 생기는 부산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까? 첫째,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19에 보면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을 할 때는 기도하고 깊이 생각한 후에 하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8에서는 요셉을 의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약혼자인 마리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임신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듣고도 요셉은 깊이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필경 마리아에게 말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차분하게 조용히 해결하려 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도 말하지 아니한 그 한 가지만으로도 요셉은 진정 의인입니다. 말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결과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말에 대해서 불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냥 하나를 그어서 그 결과로 많은 것이 탔을 때, 그래도 나는 성냥을 그었을 뿐이라고 무책임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이 무섭기도 합니다. 말은 한 입에서 나오는데 듣기는 수십만 명이 듣고 또 전해집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뒤쫓아 다녔습니다. 아주 살기등등하여 친히 창까지 던진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신 갔다가 빵과 칼을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도엑이 사울에게 고자질하였고, 대노한 사울은 제사장 및 그 일가족 85명을 죽여 버렸습니다. 물론 사울 왕이 나쁘지만 그들을 죽이도록 불을 그은 자는 누구입니까? 이런 경우 도엑이, 나는 조용하게 말 한마디 한 것밖에 없다고 발뺌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한 짓은 말 한마디이지만, 이 고자질 때문에 85명을 죽이는 엄청난 결과가 왔습니다. 여기서 도엑이 어떻게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말은 무서운 것이므로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말의 정확성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그 당시에 10명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은 11명이면 그것 또한 거짓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들은 말일지라도 책임 없이 전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한 말은 내 말이든 남에게 들은 말이든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들었노라고 하면서 내 말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내가 말한 것은 전부 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한 말은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로 내가 보았어도 분명치 않는 일을, 몇 사람을 거쳐서 들은 이야기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함부로 말하는 일이 있습니다. 또한 실현성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고서는 바로 그 다음 날 부인한 일은 없습니까? 간다고 말했으면 가야하고 온다고 말했으면 와야 합니다. 죽겠다고 말한 사람이 살아 있으면 되겠습니까? 내가 한 말은 그대로 실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됩니다.
둘째, 말은 진실과 정직을 요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 한 번한 것으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들이 베드로를 속인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였고 성령을 속였으며,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거짓말 한마디로 인하여 그 가문이 망하는 무서운 형벌도 받았습니다. 이것이 계명입니다. 우리는 계명 중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중요하듯이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의 중요성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예상되더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의식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때로 무의식 중에 말했다고 가볍게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실 무의식 가운데 한 말이 참말입니다. 몰랐다고 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정신이 없고 경황 중에 한 말이라고 핑계할 수 없고 내가 한 말은 다 내 말입니다.
넷째, 덕을 세우는 말만 골라서 해야 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너를 쉬게 한다고 잠언 15:6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격분한 사람에게 내가 말함으로 그 격분이 반감되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내가 위로함으로 그 슬픔이 감해질 수 있도록 말하자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만 만나면 좋았던 기분이 나빠지고 찬물만 끼얹는다는 그런 덕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으로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입조심해서 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신중하게 골라서 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사랑하는 친구를 중매해서 잘살고 있는데, 그의 장모님을 뵈었더니 사위한테 상당한 섭섭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위가 당신에게 어머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소원인데 늘 장모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어른이 원하시는 대로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의 어머님이면 곧 내 어머니요, 내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이면 내 친구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룻처럼 당신의 어머니가 내 어머니요 당신의 나라가 내 나라라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말은 잘 골라서 써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극장에서 음악회가 열렸는데, 막이 열려야 할 순간에 큰 모자를 쓴 할머니가 객석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매니저가 발견했습니다. 매니저는 그가 모자를 벗어 주기를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다가 시간이 촉박하여 마이크를 들고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당 극장에는 나이 많으신 어른께는 모자 쓰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할머니는 모자를 벗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모자 좀 벗어 주세요"라는 말과 매니저가 한 말을 비교해 본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기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재치 있게 하면 그 말의 효과는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나는 좋은 말을 듣기 원하면서 남에게는 기분 나쁜 말을 해서 되겠습니까? 특히 우리들의 말버릇 중에 고쳐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아침에 아이들에게 일찍 일어나서 빨리 학교에 가라는 말을 재촉할 때, "안 일어나니? 학교에 안 가니? 밥 안 먹니?"하고 가시 돋힌 말을 하곤 합니다. 좀 선택해서 보다 유순하고 부드럽고 유익하게 말할 수 없습니까? 상대방을 콕콕 찌르는 말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낫습니다.
다섯째, 입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축복과 위로, 칭찬과 격려하는 데만 쓰여져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나이 오십이 넘으신 분들은 정말 이제부터 말조심해야 합니다. 앞으로 회개하고 고쳐가며 살아갈 시간이 없으니까요.
이제부터는 덕스러운 말만 하다가 가야 합니다. 임종이 가까워 오는데 남의 욕을 해서 되겠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유명한 성 글라라 수녀는 젊었을 때 상당히 사치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녀가 된 다음에 그 생활을 뉘우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쇠사슬로 된 목거리와 팔찌를 하고 험한 옷을 입으며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고행을 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며 그의 고행을 높이 말하는데, 때로는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글라라 수녀는 이 비난을 참고 참다가 한번은 맞대고 욕을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또 마음이 아파 회개하면서 잘못을 저지른 혀를 바늘로 찔러 며칠 동안 말도 못하고 밥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후회되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를 위하여 복을 빌라"하셨습니다. 만약 그가 복받을 사람이면 복을 받고, 받지 못할 사람이면 그 복이 내게로 돌아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하겠습니까? 복받지 못할 사람을 위해 복을 빌면 그 복이 다 내게로 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경우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그를 저주했는데 그가 저주받을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저주는 내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평생에 복을 많이 빌고 베풀어야 그 생애가 복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그 아픔이 바로 자신의 운명으로 되돌아옴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말한대로 살아가고 그 생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은 축복과 찬양과 위로와 복음 전하는 데만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거룩한 입을 다른 좋지 못한 일에 써서는 안 되겠습니다. 감사하라는 것도 명령이요, 찬송하라는 것도 명령입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 감사할 수도 있지만, 감사함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찬송함으로 찬송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온전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혀를 잘 길들여서 후회할 말을 하지 않고, 무의식중에라도 찬송과 감사와 축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제단의 숯불로 입을 지져서 이제 남은 시간의 언어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사랑의 언어만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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