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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구제(마 6:1~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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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구제(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1에서부터 18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의 보상 동기에 관한 문제를 공부하게 됩니다. 이 본문을 위시하여 18절까지에는 "하나님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6: 4, 6:6, 6:18) ,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갚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요즘 기복사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또한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구속과 은혜의 교리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극히 회의적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복을 받을 것임을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들면 마태복음 5:12에서 핍박당하는 자에게 는 하늘의 복이 있다 하셨고, 또 마태복음 10:41절에서는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내 이름으로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좋은 마음으로 하는 구제에는 보상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 :14이하에 있는 달란트 비유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맡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충성에 대한 댓가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적지 않게 보상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공로설의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공로설이란 축복이나 보상의 문제가 아니고, 이만한 죄는 이만한 선행으로 사함을 받으니,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들면, 도둑질을 한 사람은 구제를 해야 하고, 살인을 했으면 고행을 해서 그 죄를 사함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죄사함 받는 문제는 인간의 공로로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죄인이 많은 공로를 세워도 죄는 그대로이며, 죄인이 선행을 행해도 그것으로 죄가 보상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이 죄사함을 받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 교리와는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죄를 지은 자는 그 보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인과응보설을 이야기합니다만 기독교에서는 그런 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지는 공로설에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선행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선행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억된 바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이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한 일과 악한 일은 결코 같이 취급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자의 행위와 악한 자의 행위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인정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똑같이 죽음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행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감히 주장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선악간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잘 아는 대로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말등 이런 죄를 많이 짓습니다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는 사람만이 범하기 쉬운 죄가 별도로 있습니다. 그 첫째가 원망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으므로 원망하지 않지만, 믿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원망하고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기 때문에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원망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죄를 지은 것이 원망죄입니다. 이것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추호라도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는 교만죄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신앙적인 교만을 갖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우리에게 "너는 특별히 잘 믿는다" 또는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보다 너의 기도를 잘 들으신다"고 속삭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속삭임에 우리는 자기의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교만에 빠져 허덕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과 그의 제자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인의 가장 높은 덕이 무엇입니까?"

"겸손이다"

"둘째로 높은 덕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의 가장 큰 덕이 첫째도 둘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들에게 해결되지 못한 교만이 있습니까? 한 계단만 내려서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교만에서 생기므로 교만하지 않도록 특히 신앙의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셋째는 위선이요, 외식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지만 도중에 그만 뜻이 바뀌어 집니다. 그래서 위선자(hypocrite)가 되는 것입니다. 영어의 위선이라는 글은 재미있게도 가면을 쓰는 배우나 가면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배우들은 재주가 좋아 슬프지 않아도 잘 울고 기쁘지 않아도 잘 웃습니다. 만약에 신앙생활이 배우요, 선행이 배우라고 한다면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입니까?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위선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계속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세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행하는 행위도 하나님께 행하는 자세로 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만약, 여기서 하나님을 빼어버리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한다면 무신론자요,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보상 문제에 대해 본문을 통해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이 보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물질적인 보상 이야기가 몇 군데 나와 있습니다. 욥기 4 : 7에 보면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욥의 친구가 욥을 괴롭히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얼핏보기에는 "죄없이 망한 자가 어디 있는가" 할 때에, 진리같이 들립니다. 말은 바른 말이나 이것이 시험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 없이 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 없이도 고통 당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없이 망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시험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욥기 8 :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고 욥의 친구들의 권면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욥에게는 권면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말들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구절은 시편 37 : 25에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이것은 시편기자의 신앙고백으로 의롭게 살면 그 자손이 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구약에는 물질적인 보상에 대한 말씀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나타난 이 본문의 내용은 물질적이거나 현세적인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보상을 바라고 선행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상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문맥을 자세히 보면, 보상이 동기가 되어서 선행을 행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에게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까? 전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자에게 보상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보상을 바라고 선행을 하는 자의 행위는 선행이 아니요,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행한 선행만 선행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좋은 일을 행한 다음에는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칭찬받기 위해서 선한 일을 했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선행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보상을 원하는 선행은 율법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고, 보상을 전혀 바라지 않는 순수한 동기에서의 선행은 은혜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선행으로 보이지만 율법적 관계와 은혜의 관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은총적인 윤리관에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요, 주고도 모자라고, 희생하고도 부족한 마음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듯이 종일 죽임을 당하여도 갚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내가 받은 바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느냐는 은총적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만이 있고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율법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적 관계에서는 내가 이렇게 선한 일을 했는데 누가 좀 알아주지 않나, 또는 내가 남보다 더 수고했는데 왜 저 사람에게만 상을 주나 하는 불평 불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이 문제를 잘 나타내고 있는 포도원과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습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9, 12, 3, 5시에 각각 일꾼들을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날이 저물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주시오"하고 일렀습니다. 제일 나중에 온 일꾼부터 한 데나리온씩을 받자, 맨 처음부터 일한 일꾼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생각했지만 그들 역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기를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 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합니까?"하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대답하기를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져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약속했소.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하고 꾸짖었습니다. 주인과 일꾼은 직선적인 관계요, 종적인 관계요, 은총의 관계입니다만 옆 사람과의 관계는 윤리적이고 율법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무조건 은혜의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는 가끔 사랑이란 전체의 흥정이지, 여기에 부분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주고 다 받는 것이지 얼마를 주고 얼마를 내라는 식은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동기이어야 하고 시작도 끝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랑으로 시작을 했는데, 가다가 변질되어 원망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왕 주기로 시작했으면 다 주고, 이왕 희생하기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희생해야지, 중간에 가서 무얼 좀 얻겠다고 처음 동기를 저버려서야 될 말입니까? 그러나, 때로는 동기가 변질되는 수가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크기도 전에 효도부터 하라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나면, 끝에 가서 자녀들이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라기도 전에 효도부터 하라고 재촉이니 무슨 효도를 어떻게 받겠다는 것입니까? 사랑은 오직 사랑만이 동기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동기, 혹은 신령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행은 하늘로부터 보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보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첫째는 만족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마음, 그리스도의 역사에 동참했다고 하는 기쁨으로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떠난 일은 아무리 수고해도 마지막에는 허무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행한 일에는 항상 만족이 뒤따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이 만족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만족입니다.

둘째는 더 큰 역사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 : 14이하에 보면 착하고 진실한 종에게 돈을 더 맡겼습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가능성, 더 많은 책임을 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적은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는 열심히 한 그 보상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음악 하는 사람이 재주를 가지고 더 열심히 하면 그 열심 위에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을 주시어 더 많은 일에 종사하도록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나에게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내가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일하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더 큰 일을 맡기시고 더 많은 일을 맡기시는 것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셋째로 하나님과 연합하는 하늘나라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기쁨이요, 최고의 영광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말라"는 말씀으로 보아, 나쁜 동기로 선행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기가 문제입니다. 형식적으로나 혹은 현상으로 나타난 결과가 선행일지라도 동기가 좋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동기가 좋지 않은 선행이 있는가 하면, 동기는 분명히 좋았는데 도중에 변질되는 선행도 있습니다. 선행 뒤에 불평이 있으면, 이것이 바로 중간에 동기가 변질된 것입니다. 동기가 좋지 않거나 중간에 변질되면 피곤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상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본문 2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는 사람들로부터 이미 영광을 받았으므로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이미 상을 받았다는 말은 '헬라케인'으로 상업용어인데 지불완료, 즉 영수증이란 뜻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한 일을 하고 칭찬 받았으면 이미 상을 다 받은 것이므로 무엇을 더 기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불완료로써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선행을 행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칭찬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누가 알 것을 두려워하고 칭찬 올 것을 조심하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아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칭찬받으면 하나님 앞에는 적자요, 그 선행은 무효입니다.

이제, 이 본문에 나타난 구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행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데, 첫째가 구제요, 둘째가 기도이며, 세째는 고행입니다. 이상 세 가지가 제일 큰 공로로 인정을 받았는데 여기서는 구제에 대한 것만 공부하겠습니다. 랍비의 교훈에 의하면, "구제하는 자가 제사드리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구제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구제를 하되,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는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가끔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여리고로 가는 한산한 길에서가 아닌, 큰길가에서 쓰러졌다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봅니다. 정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쓰러져 있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사람이 과연 그대로 지나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람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지 구경꾼이 많았다면 보라는 듯이 잘 간호하고 보살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제사장이나 레위사람들이 외식하는 자요, 위선자라고 여러 번 지적하셨으니까요.

본문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6 : 3-4)고 하나님만 보는 데서 구제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겠습니까? 그 정도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한 중에 구제하라는 말입니다. 랍비의 교훈 중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는 구제할 때에 뒤로 돌아서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누가 받는가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누구를 구제했다는 것을 알면 벌써 마음이 달라지고 순수하게 구제하는 마음에 티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구제할 때에 받는 사람이 부끄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는 귀한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으로부터 구제 받는다고 할 때에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구제 받는 자의 입장까지 생각하면서 주었다는 지혜가 놀랍습니다. 사실 내가 구제한 사람을 알고 나면, 먼 훗날이라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구제에 대한 보상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가령, 나에게 구제 받은 일이 있는 어느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든지, 나를 섭섭하게 하면, 내가 너를 도와주었는데 그럴 수가 있나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를 구제했는지 모르게 하기 위하여 뒤로 구제했다는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랍비들이 구제할 때에 순수한 동기로 순수한 결과를 맺도록 노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옛날에 구제할 때에 거리에서 나팔을 불면서 구제한 사실들이 더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교회에서 리어카에 쌀가마니를 싣고 젊은 청년들이 북을 치면서 이집 저집 가난한 집들을 구제한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물론 개인이 구제한 것과 교회가 구제한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인이 구제하면서 온 동리가 시끄럽게 내가 너에게 이만큼 준다고 소문내는 것은 정말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구제 방법으로 전해지는 것은 구제할 때에,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오" 즉 내가 너를 구제하니, 너는 나를 축복하라(Bless me)고 주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돈을 얼마나 주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지 말라고 은밀한 구제를 교훈 하신 것입니다. 구제할 때에 정말 하나님만 보시도록,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해야만 하나님께서 그 구제를 기억하시고 갚으시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자의 입장도 생각해 주는 구제는 차원 있는 구제입니다. 그래서 필자 생각으로는 구제할 때에, 그냥 주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선물로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서 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받는 자의 입장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옛날 중국의 파송된 한 미국 선교사가 전도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홍수를 만나 물에 빠졌다고 합니다. 중국은 대륙이라 홍수가 자주 일어납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중국인이 물에 떠내려가는 선교사를 건져 주었습니다. 선교사는 목숨을 건져준 은인에게 너무 고마워서 이름을 알려주면 일생동안 기억하며 살겠다고 말했답니다. 그 중국 사람은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까?" 하며 그냥 떠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지 그의 이름이 없습니다. 도와준 자와 도움을 받은 자의 사이에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이루어져야, 선한 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길을 지나가는데 불쌍한 거지가 도와달라고 했답니다. 목사님이 주머니를 뒤지니 십전짜리는 없고 일원짜리가 딱 한 장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백원을 주고 싶었는데 천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 만지다가 아무래도 일원은 너무 많은 것 같아 '에잇'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집에 가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일원이라도 줄 것을 하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목사님이 목욕하러 갔다가 목욕을 하고 나오니 지갑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그래 잘 가져갔다"고 혼자 생각을 하셨답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앞에 주어진 기회를 미루지 말고 외식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만 보시는 구제에 기꺼이 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제의 동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야 구제할 수 있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구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제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제는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아야 아들이 할 수 있고, 어머니가 하는 것을 보아야 딸이 합니다. 랍비의 교훈에 보면, 구제할 때에 꼭 아이들의 손을 통해서 구제하여 구제의 실천을 경험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년에 몇 번씩 빈민굴로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구제하고 돌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상으로는 구제가 절대 의무에 속하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제는 반드시 하되 빚진 자의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구제를 특권으로 알아야 합니다.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다같은 사람인데 나는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굉장한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내가 먹기보다는 남을 먹이고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참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까? 언제나 주면서 기뻐하고 주는 것 자체를 큰 영광으로, 특권으로, 아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구제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도 모르게 주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런 동기에서 구제할 때 첫째 하늘나라에서 상이 있고, 둘째 오늘 우리 자신에게 오는 상이 있으며, 셋째는 그 후손에게 내리는 상이 있습니다. 수천대까지 그 상이 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의 자식이 걸식함을 보지 못한다는 시편 기자의 간증을 빌지 않더라도 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고로 언제나 우리는 선한 일에 있어서 동기에서부터 방법과 결과까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순수한 구제에만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갚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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