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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사랑의 진실성(고린도후서 8장 8절~15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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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실성(고린도후서 8815)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困苦)하게 하려는 것이 이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裕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미국의 한 의사가 보고한 것을 보면 미국사람의 3분의 2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18세에서 21세의 사망원인 가운데 세 번째가 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합니다. 또한 21세에서 24세의 사망원인 가운데 네 번째도 자살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18세에서 24, 얼마나 좋은 나이입니까? 얼마나 행복해야 할 나이입니까? 그런데 이 나이에 있는 사람의 사망 원인 가운데 서너 번째가 자살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인이 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한 사람이 자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희망적인 나이에 있는 청년들이, 가장 행복해야 할 청년들이 자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래야만 합니까?

언젠가 병원의 침상에 누워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교인을 방문했더니 그 환자는 저를 보자 대뜸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에 놓고 가만히 생각 해보니 지난날 저는 죽고 싶다는 말을 너무도 많이 했습니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죽음의 시각이 다가오니 죽고 싶지 않군요. 하지만 목사님, 저는 이 죽음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너무나도 쉽게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죽고 싶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살았습니까?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생각했습니까? 우리 주위에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어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되기를 포기해버린, 살기를 포기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그런 유혹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 사랑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란 말처럼 흔해빠진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유행가 가사도 전부가 사랑타령이요, 소설이나 연속극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는 몇 가지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진실성이 없습니다. 둘째, 소통이 없습니다. 사랑의 discommunication--사랑의 소통이 안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에게 사랑의 언어가 잘 전달되어가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합니다.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님의 언행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의 소통이 없습니다. 단절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고 맙니다.

사랑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소통이 어느 때에 가능하냐, 어느 때에 효과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소통이 어느 때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까? 건강할 때입니까, 아니면 병들었을 때입니까? 부할 때입니까, 아니면 가난할 때입니까? 분명한 점은 매우 어려운 고통 중에 사랑의 언어가 가장 효과적으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끼리는 아주 작은 물질을 주고받는데도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한 사람, 높은 사람들은 이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가장 어려울 때에 밥 한 그릇을 가지고도 서로 상대에게 한술 더 뜨라고 권면하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웬만큼 살게 된 지금은 어떻습니까? 외식이다 여행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습니다마는 옛날에 비하여 사랑은 질적으로 아주 떨어졌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없습니다. 가슴을 뜨겁게 할만한 사랑의 소통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사랑에 거짓이 많습니다. 사랑의 허위, 사랑의 허상, 이 거짓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입니까? 물질적 여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는 화려한 것들에 끌릴 때에 사랑이 거짓됩니다. 참사랑이란 오히려 고난 중에 가능하며 더 순수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프롬(Fromm, Erich)은 다음과 같은 도식적 원리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이것은 미숙한 사랑이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성숙한 사랑이다. 미숙한 사랑--I love you.

Because I need you.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랑--I need you. Because I love you. 나에게는 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대체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소유만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입니다.

소유와 행복이 정비례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많은 돈을 가졌으니 사랑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출세를 했으니 남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사랑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내게 많은 소유가 있으니 행복하리라고 오해하지도 말 것입니다. 행복과 소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소유만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만큼, 사랑을 아는 만큼, 사랑을 하는 만큼만 행복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용기와 강함이 지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그가 지닌 지식만큼 강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느끼는 만큼 강한 것입니다. 사람의 용기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고 있는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질량은 같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진실만큼 행복한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감정의 차원이 아닙니다. 의지의 차원입니다. 사랑을 느낌이라고 보는 것은 풋내기들의 이야기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의지입니다. 그 차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980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어느 날 영국의 방송기자와 만나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방송기자는 테레사 수녀에게 "당신은 죽어 가는 사람들과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이제그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신이 버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해주는 것이 저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단 몇 시간이라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해주는 것, 이것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차원입니다. 사랑은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지혜요 사랑만이 용기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면서만 사람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8)."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교인들도 예외 없이 이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이 무렵,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근방을 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예루살렘과는 달리 풍요롭게 잘삽니다. 너무나 먹을 것이 많고 잘살아서인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문제가 많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방탕하고 음란하며 죄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꾸 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그곳에 고린도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모아놓고 "당신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각,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다"라고 말씀하고 헌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선뜻 헌금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크게 감격하여 다른 마을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헌금을 하기 시작합니다.

고린도후서 91, 2절을 읽어가느라면 "많은 사람을 격동시켰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예루살렘사람들을 위하여 헌금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 받고 감동해서 헌금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을 무렵,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헌금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헌금하기로 작정만 해놓고 실제로는 안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사도 바울은 마음이 아파서 오늘의 본문말씀을 편지에 쓰게 됩니다.

어째서 헌금을 중단하게 되었는지,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이제와서 왜 피곤해졌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하여 아름다운 일, 착한 일, 선한 일이 이렇게 중단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의 진실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본문은 진실한 사랑이란 자원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 강요당해서 하는 것이라면 사랑이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적이고 자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불가피성을 띠어서도 안됩니다.

간혹 교인의 가정에 심방을 가보면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누렇게 퇴색한 결혼사진을 벽에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하고 30년이 지난 지금, 부부가 마주앉아 이야기하면서 서로 "당신, 30년 전에는 참 예뻤었지, 참 잘났었지"라고 말한다면 어찌될까 하고 생각해봅니다마는 사실 이처럼 비참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현재가 중요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참 좋았다, 당신과 결혼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살았다, 자식도 낳았으니 할 수 없이 키웠다, 어찌하다보니 내 팔자가 이리되었다--안될 말입니다.

 

언제든지 사랑이란 과거에 의해서 강요당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현재입니다. 현재 그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어떤 결과나 이유로든지 책임감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늘 현재적으로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사랑하십시오.

나아가 타인주도적 동기로 하는 사랑도 사랑이랄 수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요, 체면 때문이요, 무슨 관계 때문이요---이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순수하게 직선적으로 일대 일로 하는 자발적인 사랑이어야만 참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말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행위가 당연히 수반됩니다.

진실한 사랑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사랑하면서 자신을 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교만, 내 지식, 내 명예, 내 체면 같은 것은 모조리 사라지고 저 사람만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렇듯 자신이 망각되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만이 소중해질 때에 비로소 참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참사랑에는 자기희생이 수반됩니다. 사랑할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게 됩니다. 사랑으로 해서 내게 오는 불이익이 많아도 손해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사랑뿐입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얼마전, 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에 페테르스부르그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구소련 당시 레닌그라드로 불렸던 도시인데 아직도 우리는 '페테르스부르그'보다는 '레닌그라드'에 익숙해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곳을 방문했을 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을 구경했습니다. 그 미술관은 너무나도 큰 규모로, 이름난 그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안내하는 분에게 이 많은 그림을 다 보고 감상할 시간이 없으니 여기 오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제일 훌륭하다고 하는 명화를 몇 편 골라서 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어느 그림 앞으로 저를 안내하더군요. 그 그림은 바로 다윗과 요나단이 만나서 서로 끌어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입니다. 친구끼리 서로 사랑하는 장면을 그린 그 큰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서서 한참씩 감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안내해준 그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제가 보기에 너무도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돌아와서 인화해보니 사진이 잘 나와서 제 방에 걸어놓았습니다. 그 그림은 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딸이 아버지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죄수입니다. 사형수가 되어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목말라 죽어 가는 아버지에게 딸이 젖을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승맞게 도덕성은 묻지 마십시오. 그 딸이 볼 때에 아버지는 죄인이 아닙니다. 불량한 아버지도 아니요 나쁜 아버지도 아닙니다. 아버지가 내게 어떻게 해주었는가, 앞으로 나는 어찌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목말라 죽어 가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젖을 먹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 그림은 제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참사랑은 count cost를 표하지 않습니다. 댓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단순하고 깨끗할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 조그만 사랑에 대해서 무엇을 그렇게 계산합니까? 효과가 있느니 없느니, 돌아올 보상이 있느니 없느니…… 이것은 사랑이라고 부를 가치조차도 없는 쓸데없는것입니다. 모름지기 진실한 사랑에는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이 따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거듭 가르쳐주는 중요한 원리도 신앙적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라는 5절의 말씀뿐만 아니라 본문말씀의 전반을 통하여 줄곧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로 사랑하고, 은혜로 주고, 은혜로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사랑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 남녀가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젊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또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그 전부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부정하고 보면 사랑의 원리가 무너집니다. 수직적 관계에 의하여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주는 것, 사랑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이 사랑에는 중요한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를 평균(平均)하게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14)"----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give and take'로 평균케 한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논리를 말할 때에 이 평균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는 평균, 이것은 혁명입니다. 자원성이 없는 분배, 이것은 폭력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서 평균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원리가 싹트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평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있는 자가 주고, 없는 자가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있는 자가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물질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본문은 있을 때에 주고, 후에 없을 때에 받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것이 평균입니다. 여러분, 항상 가지지는 못합니다.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있다고 교만할 것도 아니요 없다고 비굴해질 것도 아닙니다. 있을 때에 주고, 언젠가 없을 때에 받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주고, 늙었을 때에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리입니다. 나는 주는 자만 되었다고 교만할 것도 아닙니다. 나는 항상 주는 자의 위치에만 설 것이라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여러분,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거든 주십시오. 언젠가는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 가지고는 있지만 더 많이 벌어서 주겠다고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경계하여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12)"--꼭 많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있는 대로 주면 된다고 사랑의 원리를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 우리는 물질과 정신의 문제에 대한 평균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을 주고 정신적인 것으로 받는가 하면 지혜를 주고 물질로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기만 했다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물질을 주고 지혜로 받습니다.

많은 영적인 것을 주고 물질적인 것으로 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균케 하십니다. 이 평균의 원리를 올바로 이해할 때에 우리는 주고받는 일에 있어 다함께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원리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느 신사가 직장에 나갈 때마다 다리에 앉아 있는 불쌍한 거지를 만납니다. 그 거지는 불구자로 매일 매일을 구걸하여 먹고삽니다. 그 신사는 거지 앞을 지날 때마다 한푼씩 돈을 줍니다. 매일같이 빼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 앞에 가 서서 주머니를 뒤져보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신사는 "형제여, 대단히 죄송합니다. 오늘은 내 주머니가 비었습니다. 오늘은 돈을 못 주어서 미안합니다"라고 거지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그 거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은 제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한 날입니다. 돈은 못 받았지만 당신이 저를 형제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 사랑이 어떻게 물질로만 표현되겠습니까? 여기에 사랑을 담고, 정신을 담고, 마음을 담고, 정성을 담아 진정으로 주고받는 행위를 할 때에 비로소 참사랑의 행복을 함께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15)"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렸을 때에도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원리입니다. 앞으로 가져갈 사람도 없으며, 남길 사람도 없습니다. 다같이 두고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랑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사랑뿐입니다. 여러분, 피곤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절망을 하는 것입니까?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왜 낙심을 하는 것입니까? 사랑의 진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사랑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뵐 수 없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요, 내가 아직도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없는 것은 증오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확증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살아갈 때에 나는 새로운 생명력, 새로운 인생의 가치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밥만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삽니다. 여기에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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