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선택과 운명(창 13:6~13)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치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제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인생은 선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극히 제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으로 제한을 받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미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내것이 아닙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은 먹은 것만 내 것입니다. 손에 쥐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먹어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옷이 많다고 다 내 것일 수 있습니까? 죽으면 그저 한 벌만 입고 가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제한을 받고 삽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없습니다. 정치적 한정 안에서만 오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제한을 받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단일 문화권에 살기 때문에 이 제한에 대해 잊어버릴 때가 있지만 외국여행을 하면 쉽게 느끼는 문제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풍속이 다르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를 죽이겠다고 해도 모릅니다. 이렇게 문화의 장벽이 꽉 막힐 때에는 감옥 아닌 감옥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삽니다. 제한되긴 했지만 그 속에서 선택의 자유는 있습니다. 옷을 입어도 두 벌이 있으면 어느 옷을 입을 것인가 하고 선택을 합니다. 오늘도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의 결과는 책임으로 남습니다. 고로 선택에는 하나의 고민이 따릅니다. 선택의 결과로 남는 책임은 내가 일생동안 져야 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운명적이고, 결정적이고, 심판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였기에 혹 원치 않을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 결과는 내가 감수해야 합니다. 만약 옷을 입을 때 첫 단추 하나를 잘못 잠그면 다음 단추들은 다 틀리게 됩니다. 풀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선택에는 왕복 거리가 필요합니다.
원점으로 돌아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선택은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순간적인 선택의 잘못은 왕복 거리의 수고를 합니다.
회개에도 왕복거리가 필요합니다. 한 번 잘못 되면 잘못 된 만큼의 거리에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얼마나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선택은 신중하게 바로 해야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인천에 가면서 실수로 부산행 기차를 탔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 경치가 틀려 깜짝 놀라 중간에 내려서 다시 돌아오는데 시간이 모자라 무척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때 저는 스스로 혼자서 인생철학을 내 놓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차는 바로 타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선택은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롯이란 사람은 선택을 잘못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본래 주체의식이 부족하고 종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너와 제 친척이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날 때 조카 롯이 따라갑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어서도 아니고, 자기 생각이 뚜렷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삼촌이 좋았고 독립적인 의식이 없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결정적인 시간이 왔습니다. 살림이 너무 커져서 도저히 두 집 살림을 할 수 없어 나누게 됩니다. 물론, 롯도 아브라함과 함께 지낼 때에 좋은 점도 있었지만 불편한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고 싶지 않는 길도 삼촌이 가자고 하면 그저 묵묵히 따랐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삼촌의 속박에서 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결정적인 시간은 왔습니다. "너는 이제 나를 떠나 살아라" 살림을 따로 내게 됩니다. 롯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고 선택이 있고 독립이 있습니다. 그리고 허락이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얼마든지 주장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조카 롯에게 양보를 합니다. 사랑이 중요하고 화목이 중요하기 때문에 다소간의 물질이나 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넓은 세상을 보이면서 조카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 할 것이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를 택하리라. 네가 동쪽을 택하면 나는 서쪽을 택하리라." 롯에게 먼저 선택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롯은 결정적인 실수를 합니다. 누구에게나 선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 기준이 그 사람의 철학이요 운명입니다.
여러분은 결혼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지금 그 사람을 선택했습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었습니까? 이것만 있으면 된다 라는 그 기준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동양인과 서양인이 선택 기준이 다릅니다. 서양인은 선택이 있어서 변화를 좋아하고 변화를 우선합니다. TV 광고를 놓고 보더라도 그들의 선전은 하나 같이 "이것은 새 것입니다" 또는 "이것은 신발매품입니다"라고 새로운 것임을 강조하고 또 그래야 잘 팔린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물건이든 이것은 몇 십년 전통이다 라고 해야 많이 팔립니다. 왜냐하면 새 것에 대해선 믿질 않습니다. 두고봐야 한다고 새 것에는 일단 의혹을 가집니다.
대단히 보수적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어디라도 갑니다. 갈 곳의 방향을 몰라도 갑니다. 아브라함의 선택 기준은 오직 신앙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좋고 예배드리기에 적절한 곳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롯의 선택 기준은 달랐습니다. 본문에 보면 롯은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본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보는 대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롯은 넉넉한 물을 보고 즉, 자원이 풍부한 것을 보고 이것을 택했습니다. 선택의 기준을 보는 대로하면 속보다 겉을 보기 쉽습니다. 또한 미래보다 현재를 중시하게 됩니다. 롯은 겉으로 나타나는 자연적인 물만 보았지 그 속의 도덕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 기준은 어떠합니까? 롯은 보았고 풍부한 그곳을 택했습니다. 본다는 문제는 참 중요합니다. 교도소에 가면 6범 7범의 전과자들이 많습니다. 한 번은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왜 이렇게 여러 번씩 들어오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감옥을 나갈 때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길거리에 다녀보면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이 훤하게 보인답니다.
남의 집 담 너머로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 다 보인답니다. 내 물건을 내가 두고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속히 깊숙이 들어 있는 남의 물건이 보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담으로 모세를 멍청한 지도자라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할 때 이왕이면 기름 많이 나는 사우디 쪽으로 인도할 것이지 물도 제대로 없는 팔레스타인 쪽으로 인도를 해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냐는 것입니다. 옳다고 수궁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연 자원이 풍부한 나라 중에 제대로 사는 나라가 없습니다. 게을러서 무엇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항상 식민지적인 낙후된 생을 면하지 못합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 사람되고 민족이 만족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택하고 있습니까? 롯은 소유를 택했고, 현재를 택했고, 물질을 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있는 사람의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보여집니까? 보는 대로 가고 보여지는 대로 운명이 결정됩니다. 사람은 보고 듣는 대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따른 운명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가야 합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볼 때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니 마치 축복받은 땅으로 보인다는 종교적인 각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쪽을 택한 것입니다.
롯의 돌이킬 수 없는 또 하나의 실수는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정말 멍청하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겨 가다가 소돔 한 가운데까지 들어갔단 말입니다. 여러분, 한 번 선택하셨습니까?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물어 보십시다. 나의 선택이 바로 된 것이냐구요. 다시 물어보고 비판하고 또 물어서 이대로 가도 과연 좋은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는 길도 물어가야 합니다. 지금 하는 일도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이대로 따라가도 좋은지, 이대로 죽어도 좋은지 물어야겠습니다. 멍청하게 따라가다가는 내 운명이 어찌되겠습니까? 과연 지금 이대로 끝나도 좋은지 물어 보십시다. 바른 선택에서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까?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향락대로 장막을 옮기면 소돔 고모라까지 가게됩니다. 무비판이 문제입니다. 향락에 끌려갔고, 육체에 끌려갔고, 감정에, 기분에 끌려갔습니다.
한 편으로 롯의 생애를 보면 아주 모자라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城)이 망한다는 하나님 사자의 말을 듣고 이것을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사자를 숨겨 줍니다. 롯의 깊은 곳에서는 생각이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가책을 받으면서도 그곳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1년만 더, 한 달만 더, 하루만 더 하면서 성이 망할 줄을 알면서도 모험 속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험한 곳에서 순간적으로 찰나적으로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엄청난 일을 당합니다. 본문에서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큰 죄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롯은 큰 죄인임을 알았고 장차 멸망할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빠져 나오지를 못합니다. 벌써 동화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성이 여기서 나옵니다.
롯의 의식 속에, 생활 속에, 문화 속에, 도덕 속에 벌써 소돔 사람이 돼버린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가 그처럼 원했고, 그처럼 사랑했던 재물과 풍부한 자연자원을 다 잃게 됩니다. 가져갔던 재산은 물론, 아내까지도 멸망되는 소돔 고모라를 바라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밉니다. 두 딸과 롯이 간신히 살아서 알거지가 되어 산중에서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름다운 강, 그 풍요한 것들이 누구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선택은 모든 것을 다 잃게 했습니다. 소유도 꿈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하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선택에 따른 운명은 내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 여사는 참으로 답답한 육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남긴 말은 "내 인생은 참 아름다웠다"고 웃으면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이긴 자입니다. 마지막에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상당히 고명하신 분이 입원을 해서 문병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게 이런 순간이 있는 것을 진작 알았었더라면 내 생애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잘못된 그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성령을 선택해서 마지막에 나의 인생은 정말 아름다웠노라고 유감없이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롯과 같이 어리석은 길을 가는 저희를 돌이켜 주의 전으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과 뜻과 중심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가나안 땅에 있도록 인도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마음을 주시고 주의 말씀을 따라 선택하고 순종하여 주님의 가신 길을 가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시는 축복과 그 약속을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오늘이 되고 그리고 마지막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의 탄식 (롬 8:22~28) (0) | 2024.03.19 |
---|---|
성령의 능력 (행 4:5~12) (0) | 2024.03.19 |
선지자의 눈물(렘 4:19~22) (0) | 2024.03.19 |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태복음 27장 32절~44절) (0) | 2024.03.19 |
선택받은 자의 감사(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7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