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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의 윤리(누가복음 14:7-1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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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의 윤리(누가복음 14:7-14)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가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느 날 자기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편지를 뜯어보니 그 속에는 청구서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머니 심부름을 한 값에 대한 청구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이것을 보시고 마음으로 웃으면서 아들에게 회답을 썼습니다. 편지 내용 가운데에 어머니도 청구서를 덧붙였습니다. 내가 너를 낳아준 것은 무료, 젖먹인 값 무료, 옷 값 무료, 이렇게 써서 아들에게 주자 아들은 편지를 보고 비로소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어머니께 사과를 했답니다.

여기 현대 윤리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지나치게 타산적이라 조그마한 일에도 이유와 조건이 있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개인주의, 합리주의, 상대주의에 빠져있고 철저하게 실리주의요, 타산적이며, 계산적인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결혼 주례를 자주합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실속을 앞에 놓고 결혼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원하는 좋은 선물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파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사랑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같이 이기적이며 타산적이 되어서 내게 돌아오는 이익에 급급해 인간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공부를 하는 데도 공부를 위한 공부, 학문을 위한 공부는 옛날 이야기이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공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면 주고받는 일에 균형을 잡아야 하고 개인적이요, 합리적인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남에게 주었으면 받아야 하고 수고했으면 대가를 찾습니다. 또 그런가 하면 주지 않았으면 나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똑똑한 사람이고 분명한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질투와 시기로 가득차 있을 때에 그들의 발을 손수 씻기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서 차례차례 씻어 가다가 베드로의 순서에 오자 베드로는 난처했습니다. 소위 자기는 수제자로서 진작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어야 하는데 생각도 못했으니 도저히 예수님 앞에 발을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단호히 사양을 합니다. 똑똑한 사람인고로 주지 않았으니 받지도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은혜란 초합리적인 것입니다. 이치를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 복을 받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죄인이 복을 받아야 진정 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격이 있는 자에게 은총이 내려지는 것은 타당하지만 무자격자에게 은총이 주어지면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만일 공부 잘한다고 사랑하고 못하면 쫓아내는 가정이 있다면 이런 가정에서 어떻게 아이들이 살 수 있습니까?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건강하면 건강해서 사랑 받고, 약하면 약하니까 더욱 사랑 받고 이래야 사랑이 귀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세대는 개인적이요, 합리적이고 타산적이기에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실리주의에 살고 있기에 우리의 선행, 혹은 윤리적인 행위 전체가 보상을 요구하고, 갚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에도 꼭같은 방법으로 적용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몇 년을 예수 믿었는데 왜 사업이 안 되느냐? 내가 금식하고 철야 기도 등 기도를 많이 하는데 왜 응답이 없느냐? 하고 따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줄로 아느니라", 즉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기도를 공로화해 버립니다. 은혜로 생각지 않고 타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봉사와 헌금하는 것도 다 공로화하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모릅니다. 현대인은 받고자 하는 마음, 계산적인 생각이 너무 빠르며 합리적인 보상을 항상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지불하는 것도 없이, 땀 흘리지 않고 얻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종의 불한당이며 현대 윤리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수고한 대가 그대로 얻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보상을 급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좀 느긋하게 자기의 수고가 10년 후, 20년 후 혹은 먼 훗날에 주어지는 것은 가치가 없고 당장 대가가 나와야 한다고 조급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백령도에 위문 전도 강연을 갔었습니다. 그곳의 교회 앞에 조그마한 기념비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미국 사람이 수고를 많이 했기에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했습니다. 처음에 이 기념비를 세우려고 했더니 그 미국 사람이 절대로 반대를 해서 그 분이 떠난 다음에 조그마하게 세운 것이라 했습니다. 그 분이 반대하시는 이유 중에 하나가 자기 나라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거의 없다고 했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까지 세웠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 또 부숴 버리느라고 바쁩니다. 좀 선한 일을 했으면, 그 분이 죽고 난 다음 한 100년쯤 있다가 동상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렇게 조금하게 기념비부터 세운다고 야단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조급하게 알아주기를 원하고 조급하게 성공하기를 원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심지어 어린 아기를 놓고 효자 되라고 합니다. 아이는 아직 ''자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조급한 보상, 대가를 바라는 생각들이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자세히 보면 생각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어떤 날 바리새인 교인 집에 예수님이 초청되었습니다. 무슨 동기로 초청했는지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비록 대접은 받으셨지만 그 분위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14:1에 보면 사람을 청해 놓고 "저희들이 엿보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상좌 다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신경을 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잔치집에 초청을 받거든 아래 자리에 앉으라"고 실질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높아지려고 하고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 차서 잔치 분위기를 좋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분위기가 못마땅해서 또 직선적으로 주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손님을 청하려거든 부자 친척이나 친구를 청하지 말고 전혀 갚음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 병든 자를 청해야 복이 있다"고 솔직하고 직선적인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여섯 가지의 덕이 있습니다. 첫째가 공부하는 것으로 계속 배워야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환자를 방문하는 것, 셋째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 넷째는 기도하고 명상하는 것, 다섯째는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 여섯째는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는 것이 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세 번째가 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보기 힘든 일이 되었지만 대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12에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라 했고 옛날 아브라함은 손님을 부지런히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일반적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기준과 동기와 관례가 어떠한지 살펴보면 대략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잘 아는 사람을 청하게 됩니다. 즉 자기 친척, 이웃 등 관계가 깊은 사람을 청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능한 한 높은 사람을 청합니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이면 친척이건 잘 아는 사람이건 초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체가 높은 사람을 청하는 심리적 이유는 그래야만 자기가 함께 높아지는 듯 느끼기 때문입니다. 높은 손님이 오시면 나도 같이 높아지는 것 같이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기 선심을 과시하고 또는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깊은 잠재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는, 즉 적은 봉사를 하고많은 대가를 얻는 실리가 있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종합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자기 중심적인 선행 행위입니다. 어쨌든 자기 중심적인 행위는 배제되어야 합니다. 대가와 갚음을 요구하는 것으로, 주었으면 받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적게 주고 많이 받겠다는 것입니다. 내게 돌아오는 이익만 바라보는 사람은 피곤할 뿐입니다. 소매상 하는 상인들은 손님이 가게에 들어서면 우선 관상부터 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물건을 사러 왔나, 보러 왔나 하는 관상부터 보고, 두 번째로는 많이 깎을 사람인지 적게 깎을 사람인가를 판단하고 가격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내게 오는 이익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가 이래야 됩니까? 존경과 명예와 칭찬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이익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까?

때로는 도덕적 향락주의자도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중심하고 자기를 위하는 마음에서 오는 사랑과 봉사로써 위선과 외식과 원망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에서 불한당을 만난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갔는데 마지막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왜 제사장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갔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제사 드리는 것이 바빠서 그냥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불한당 만난 사람이 예루살렘 길거리에 누워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팔을 걷어 부치고 많은 사람을 의식하면서 봉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시위를 했을 것으로 상상이 됩니다. 그러나 여리고 골짜기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구해 주어도 알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떤 사람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미리 신문기자 불러놓고, 광고부터 하고 선한 일을 합니다. 이렇게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기억해 주길 바라고 칭찬해 주길 바라는 자기 중심의 행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위하여 이웃을 생각하는 선행입니다. 내가 도와주어야 할 사람--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쓰러지는 그 사람을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봉사로서 아름다운 봉사입니다. 구역예배 시간에 제가 주부들만 모인 곳에서 이런 우스운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들은 아 내 앞에서 네 살밖에 안될 정도로 마음이 어리고 약하니까 좀 칭찬해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꼭 "나는 당신의 아내가 된 것이 참 행복하고 잘한 것이다'라고 남편에게 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런 말 했다가 남편이 좋아하는 꼴을 어떻게 봅니까?"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일이면 좀 적극적으로 해야지, 남편이 좋아하는 것이 보기 싫어서 안 한단 말입니까? 이런 자세로 어찌 행복하길 바랍니까? 상대방이 좋아하고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해서 나도 그 기쁨에 동참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선행은 곧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초대하는 선행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6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셨습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것은 강아지도 하는 일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야 무슨 대단한 이야기입니까? 내가 미움받으면서 사랑하는 것이 사랑다운 이야기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신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셨고 원수를 사랑하셨으니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여기에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Give and Take"가 아닙니다. 배척받고 사랑하고, 미움받고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즉 갚을 것이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깨끗한 사랑입니까? 모든 불평은 받고자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지, 주는 자에게는 불평이 없습니다.

랍비들의 교훈 가운데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말 선행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내가 누구에게 주든지 받는 자를 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고도 누구에게 주었는지 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받는 쪽에서도 누가 나를 주었는지 주는 자를 몰라야 합니다. 그 사람을 알면 찾아가게 되고 고맙다고 인사하면 선행이 안됩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서로 몰라야 하는 것입니다. 몇십 년 전에 한 번 선한 일을 한 것을 두고 두고 기억하려 합니다. 내가 준 것, 선한 일을 한 기억을 다 잊어버려야 그 때부터 비로소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받은 것에 감사, 감격해서 이웃에게 선행하는 행위입니다.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된 특권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세 번째,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선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니 이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고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를 보는 그러한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철저한 부탁입니까? 만일에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칭찬을 했다며 이미 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원문의 뜻으로는 지불 완료란 뜻입니다. 이미 계산이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할 때는 깨끗한 마음, 주는 마음, 오직 선한 마음으로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부터 복이 있고 의인들의 부활 시에 복이 있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종말론적으로 의인들의 부활 시에 하나님 앞에 가서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아무 것도 바라지 말자는 것입니다. 모처럼의 선행에 왜 피곤이 있고 낙심이 있고 원망이 있어야 합니까? 동기를 살펴봅시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했는가를, 내 마음속에 순수한 동기가 무엇이었나를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적으로 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겸손하고 진실한 동기로 임해야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선행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 은혜를 얻고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 : 자비로우신 주님, 이 삭막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는 일없이 받기를 바라고 또 작은 선행에 받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앞서기에 원망과 불평으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정말 선행다운 선행을 하고 사랑다운 사랑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선행을 통하여 생의 보람을 얻고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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