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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령하나님5(요한복음 14 : 1 ~ 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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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5(요한복음 14 : 1 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은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부터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 그리고 성령께 대한 고백의 세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어떠한 신앙고백도 다 이 골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여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영생에 대한 고백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본능은 영생인 줄로 압니다.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혹은 풍속적으로 볼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영생을 얻으려고 애를 써왔는지 모릅니다. 죽지 않기 위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몸부림을 쳐왔습니다. 그러나 소용없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욕망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임에도 사도신경에서는 이 영생에 대한 고백이 맨 마지막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복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신다'라는 고백이 있다면, 그 고백은 단연코 맨 마지막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생을 바라고 나왔습니다.

참되고 진실한 고백으로 영생을 바랍니다. 그러므로 맨 마지막 고백이 '영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저마다 욕망을 가집니다. 이 욕망에 대한 기도는 전체 가운데 맨 마지막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보면 그것이 맨 앞으로 나옵니다.

혹시나 잊어버리고 빼놓을까 싶어 그것으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후로는 참된 기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가운데 인간의 본능적 관심사는 영생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끝에 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성도의 교제, 사죄와 부활을 고백하고, 다음으로 영생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영생에 대한 고백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요, 생명 지속에 대한 본능에 따른 것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죄와 부활이 전제된다는 것입니다.

죄 된 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저주 아래 있는 생은 영생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죄 사함 받은 생명,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과정을 거친, 그 결과로 오는 영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같은 의미를 가진 두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구원이요, 하나는 영생입니다. 구원은 다소 소극적인 데 반하여 영생은 사뭇 적극적입니다. 구원은 과거로부터의 구원이요, 영생은 구원의 미래적 형태입니다. 영생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요점 몇 가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영생에 대한 교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중대한 교리이므로 앞으로도 두고두고 설명할 내용입니다 마는, 우선적으로 영생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점 몇 가지를 들어 말씀드립니다. 언제나 공부에서는 가르치는 사람도 요령 있게 가르쳐야 하고 듣는 사람도 요령 있게 들어야 합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를 때에 보면 대개가 요령이 없습디다. 어디서 듣기는 많이 들은 모양인데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학생은 저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녹음까지 해다가 열심히 들었습니다. 이번에만은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공부했는데, 85점이니 왜 그렇습니까?" 제가 집에 돌아와서 그 학생의 시험 답안지를 찾아 분석을 해보니 그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디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공부해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긴 시간 강의를 듣게 될 때에도 예화 같은 것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요점이 무엇인가, 말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노트해 두었다가 이삼 일이 지난 뒤에 다시 펼쳐보아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복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영생이 무엇입니까? 먼저 영생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견해가 무엇인지 보십시다. 첫째로, 영생을 심리적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죄악이 만연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영생이다, 불교적 용어로는 영생을 해탈된 니르바나의 경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으로는 영생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괴로움, 배고픔, 미움, 슬픔, 탄식--수없이 많은 번뇌가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거론해서 죄송합니다마는, 불상을 보십시오. 부처의 머리카락이 라면처럼 곱슬곱슬합니다. 저는 그것이 왜 그런지 퍽 궁금했습니다. 서양사람도 아닌데 왜 곱슬머릴까? 나중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마는, 그것이 달팽이라고 합디다. 머리 위에 달팽이가 잔뜩 앉아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곧 번뇌로 가득 차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 고통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는 상징으로 달팽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니르바나는 무엇입니까? 해탈, 다시 말해서 번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괴로운 생각, 미운 마음, 배고픈 느낌들이 마음으로부터 깨끗이 사라질 때,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에 흔히 열반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범어로 니르바나(Nirvana)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은 심리적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마음으로부터 고뇌를 잊고 해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좀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고통에 대한 냉정한 자세도 영생이 아닙니다. 흔히 슬픈 일이 있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감정에 치우쳐 울고불고하다가 이제 냉정을 되찾습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 아닌가? 기왕 죽을 바에야 일찍 죽었으니 잘된 거지.' 죽음에 대하여, 삶의 고뇌에 대하여 냉정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까? 또한 수용적 자세를 가집니다.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고통도 받아들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이 곧잘 말합니다. '인간은 고통의 존재이다. 고통의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이 자세도 영생은 아닙니다. 성경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참된 영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리적 현상이나 도를 닦는다는 식의 영생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흔히 우리는 'immortality' 곧 영혼불멸과 영생을 혼동하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종교학에서 말하는 영혼불멸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영혼불멸설은 '몸은 죽으나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라는 전제하에서 전개됩니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영은 살아남는다, 영은 영원하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존적으로 설명하자면 정신만이 가치가 있으며 육체적인 생활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영혼불멸설의 골자요 가치관입니다. 정신적인 것에만 의미가 있으며,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속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을 믿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부활과 영생의 교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과 육을 합친 완전한 인격의 부활인 것입니다.

셋째로, 다소 어려운 용어입니다 마는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쉬올(sheol)'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혹 죽음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약성경에서는 쉬올이나 죽음에 대하여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욥기 1414절에 보면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한번 죽으면 그만이 아니냐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의인이건 악인이건 할 것 없이 죽음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자칫 '구약성경에는 영생이 없다, 영생에 대한 교리가 희박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깊이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영생이 있고 부활사상이 있습니다. 표현이 좀 다를 뿐입니다. 쉬올은 죽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반드시 죽음의 상태를 통과해야 합니다. 죽음 없는 영생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영생입니다. 죽음을 함께 말씀합니다. 죽지 않고 사는 영생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혹 성경을 많이 보신 분은 의문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생애 안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지 않고 덧입기를 바란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의 고통은 겪지 않고 그대로 주님을 맞이하겠다는 말이지 썩어질 이 몸 이대로 주님을 맞이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한 영생을 고백합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사망의 언덕을 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저주스러운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마치 이쪽 문을 열고 저쪽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가볍게 죽음의 문을 통과합니다. 피곤에 지쳐 잠시 눈을 감고 쉬는 것처럼, 하루일 을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편안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저는 교역자가 된 탓에 많은 임종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성도의 죽음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죽지 않고 이대로 천년만년 사는 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천하없는 보약을 먹어도 소용없습니다. 처음부터 갈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죽지 않는 영생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죽고서 영생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건너느냐 쉽게 건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음 없는 영생을 생각하고 오래 살려고 아등바등 애를 씁디다마는, 별로 보기 좋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적당한 때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죽음을 저주나 죄의 댓가로 생각하려 들어서도 안됩니다. 죽음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공히 주어지는 생의 과정입니다.

넷째로,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세를 긍정하려고 합니다. 이론적으로야 가능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고는 내세를 긍정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영생의 교리를 듣기 위하여 이 자리에 나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저 하는 일이 잘되고 편하면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부정, 이 세대에 대한 부정과 함께, 오는 세대에 대한 긍정이 이루어짐을 아십시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의 유토피아니즘을 배제합니다. 알고 보면 공산주의도 일종의 유토피아니즘입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낙원을 만들겠다, 모든 사람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공산주의는 그 깊은 곳에 이러한 유토피아적 종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러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희생하라, 네가 수고하라, 네가 영웅이 되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의 유토피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의학이 발달합니다. 기름 대신 물로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농사 짓지 않고 공기로부터 식량을 얻습니다.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해도 성경은 이 땅에서의 영생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 세대와 오는 세대, 'this age''the age to come'의 두 세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영생이라는 뜻의 헬라어 '아이온'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양적 생명이 아닌 질적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양적 생명이 아닌 질적 생명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질의 생명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십시다. 성경은 '영생은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볼 때, 영생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고, 극기하고, 적선을 하고, 고행을 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경험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고행을 하고 적선을 하고 도를 닦는다 해도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네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디도서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하나님의 약속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23절도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모두가 하나님께로서 온 선물입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요한일서 511절에도 그러한 의미의 말씀이 나옵니다. 영생은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쟁취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영생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절대적으로 관계된, 연합한 생명을 말씀합니다. 앞서 본 로마서 623절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 회개하는 강도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모양으로 가게 될는지, 몇 사람이나 가게 될는지, 거기서는 어떻게 사는지, 심지어 결혼은 하는지 궁금해하지 맙시다. 묻지 맙시다. 알지 아니하기로 합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살다가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부활하사 이루신 그 생명과 같은 변화를 우리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적 변화, 이것이 영생입니다.

빌립보서 123, 24절에 사도 바울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하루빨리 천국에서 살고 싶으나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과 유익한 것 가운데 무엇을 가질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기다리느라면 둘 다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복음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며, 이 세상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사도 바울의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자격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성경은 영생에 대하여 질적 요소를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73절을 보면 주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알아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인격적인 측면에서는 소유가 곧 아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귀한 보화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손에 딱 쥐고 있기는 한데 이것이 보화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보화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흙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게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몸 어느 구석에 박혀 있어도 의식 속에 없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다고 모두 내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안다는 것은 소유의 문제에서 참으로 중요합니다.

안다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지식이요, 하나는 원인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는 실제적인 지식이요, 하나는 추상적인 지식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성경 자체가 내 손안에 있습니다. 성경을 압니다.

남한테 들은 것도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아는 것과 사건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무엇에 대하여 아는 것과 그것 자체를 아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쉽게 설명을 해보십시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눈물의 씨앗이라느니 뭐라느니 별의별 소리를 다 합니다마는,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모릅니다. 연애소설은 많이 읽었습니다. 영화도 보았습니다.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것입니다. 해봐야 아는 것이 사랑입니다. 결혼도 해봐야 압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생 한번도 사랑을 못해보았습니다. 그저 같이 살기만 했습니다. 사랑을 해보고서 아는 것과 사랑에 대해서 원리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창세기 41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마는, 안다는 문제를 깊은 관계로 설명할 때가 많습니다. 마태복음 1장 끝절에 보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동침치 아니하다'라는 말을 영어성경에서 보면 '알지 아니하였다'입니다.

헬라 원문에서도 '기노스코(알지 아니하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씌어진 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일 것입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알지 않았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자기 아내인 것도 알고, 생일도 알고, 나이도 압니다. 약혼녀인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알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관계와 같은 철저한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정신과 몸이 완전하게 합쳐지는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연합, 실제적인 체험이 있고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본 것과는 다릅니다. 내가 교회에 나간다, 내가 신학교를 나왔다----이것으로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내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나를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나를 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대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1)"---- 'To live is Christ'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안다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복음사건을 대응적으로, 감동과 지식을 합친 완전한 앎을 그리스도는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압니다. 알고 또 압니다. 날이 갈수록 더 깊이 압니다. 십자가의 오묘한 뜻을 압니다. 이것이 영생이요, 그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요구됩니다. 알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지 않으면 지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안 믿으면 그만입니다.

밖에 불이 났다고 해도 안 믿으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1945,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앞서 미국은 며칠간에 걸쳐 일본에 전단을 뿌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미국은 가공할 원자탄을 만들었다. 하나만 떨어져도 일시에 수십만 명이 죽는다. 항복하라.'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라느니 협박이라느니 공갈이라느니 하였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만 것이지요. 끝난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으면 내 것이요, 믿으면 내 안에서 사건이 해결됩니다.

'historical event''faith event,' 곧 역사적 사건과 신앙적 사건으로 구별할 때에 신앙적 사건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제아무리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해도 내가 안 믿으면 내게는 신앙적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 의식 속에, 내 인격 속에서는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이 사랑이요 확증이라는 것을 안 믿을 때에는 그 사건과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목이 곧고 무지몽매하고 굽힐 줄을 모른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믿음에 영생이 있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과 524절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헬라 원문에서 보면 '영생을 가졌다'입니다. 영어로 'have'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현재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요한복음 640절과 47, 요한일서 513, 디모데전서 116절에서 보는 대로 믿음은 받아들이는 마음이요, 순종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종합하여 상징적으로 '성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어렵고도 신비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어야 하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마치 육체가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는 것 같은, 우리의 영과 그리스도의 생명과의 관계를 말씀하심입니다.

생명적인 절실한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해야만, 그리고 그 말씀을 끊임없이 받아야만 내 생명은 삽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약속은 선물입니다. 내 공로와 내 고행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해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여기에 따르는 윤리적인 행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알기에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고독한 길로 갑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 얻는 자의 윤리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생은 죽음을 통한 영생이요, 그 시작은 바로 지금입니다. 죽은 다음부터가 아니라 지금이 영생의 시작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오늘, 여기서부 영생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생활, 죄를 이기는 생활,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생활 자체가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 안에 살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영생의 교리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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