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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령하나님3(빌립보서 1 : 3 ~ 1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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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하나님3(빌립보서 1 : 3 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 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함은 성도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한 고백은 문맥으로 보아 성령에 대한 고백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신령한 교제입니다. 사업상의 교제나 인간적인 친교가 아니라 신령한 교제이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교제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깊은 교제입니다.

물질로 하는 교제는 덧없이 물질과 운명을 같이합니다. 인간적인 친교도 이권으로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단순히 자기 필요에 따라 주고받는 교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성령이 맺어주는 교제이기 때문에 속깊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혼에 속한 사람이 있고,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에 의해서만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교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비참한 교제입니다. 이는 동숙자(同宿者)로서, 다만 같이 산다는 것이지 교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혼의 교제가 있습니다. 이성도 통하고 지식도 통하고 대화도 잘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교제일 뿐입니다. 영적인 교제가 참된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육의 교제, 혼의 교제, 영적 교제가 어우러져서 가장 깊이 맺어지는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믿습니다. 거룩한 공회인 교회가 성도의 교제의 근거가 됩니다.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을 전제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가진 사명, 교회의 기능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케리그마(kerygma)' '디아코니아(diakonia)'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케리그마'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 '전도'입니다. 예배도 이 기능에 해당합니다. '디아코니아''봉사', '코이노니아'는 친교입니다. 이 세 가지가 교회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친교, 교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펠로우십(fellowship)이지만 교회에서 말할 때는 '커뮤니언(communion)'입니다. 이는 좀더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고독을 정죄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혼자 도를 닦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정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직장을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바른 관계 안에 들어감으로 이루어집니다.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바로 잡는 데에 기독교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 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것, 본래적인 관계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관계를 끊어버린다든가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 가운데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코이노니아를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믿음을 토대로 성도의 교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이 말은 아주 다양하게 쓰입니다. 첫째, 헬라사람들은 '결혼'을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 결혼하면 두 사람이 운명을 같이합니다. 영적 생활도 함께 합니다. 한 사람이 행복하면 다른 한 사람도 행복합니다.

행복은 물론이요 고통도 함께 하는 것이 부부관계이고 보면 코이노니아의 의미는 족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사업상으로 이루어지는 동업관계를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 동업관계에서는 돈을 벌어도 같이 법니다. 한 사람이 망하면 다른 한 사람도 망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성공하면 다른 한 사람도 성공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권과 소득이 같다는 말입니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십(partnership)'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교육상의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동창관계, 동급생(classmate)관계입니다. 이것 또한 보통으로 친밀한 관계가 아닙니다. 같은 책으로 같은 선생님 밑에서 배웠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성격은 다를 수 있지만 한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은 혼의 결합을 이루는 좋은 친교의 기회가 되고, 졸업을 한 뒤에도 계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교육이 친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쪽은 교육 정도가 높아 대학원 출신이고 한쪽은 교육 정도가 낮아 국민학교도 못나왔다고 해봅시다. 이 두 사람이 친교를 하다가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다른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구역예배를 함께 하고 친교도 봉사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과 정신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가끔 교인들이 제게 질문을 해옵니다. "다른 교회는 구역예배도 드리고 구역조직도 하고 심방도 많이 하는데 소망교회에서는 그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친교가 됩니까?" 또는 "교인이 많아서는 친교가 어렵습니다. 교인이 적어야 서로를 알고 친하게 지낼 수 있지 소망교회처럼 교인이 많아서야 친교가 되겠습니까?" 그럴 때에 저는 나름대로의 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대학원을 나왔고 한 사람은 국민학교도 못나왔는데, 서로 이웃에 살면서 10년 동안 구역예배를 함께 드렸으나 친교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을 10년만에 교회에서 만났다 하면 그들 사이에는 금새 친교가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교육 수준이 다르면 10년간 만나도 남남인 채로인데 동창관계에서는 1년에 단 한 번만 만나도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나서 옛날이야기 한마디면 되는 것입니다. 백 번을 만나면 뭐합니까? 한 번을 만나도 완전히 가까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창이라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관계입니다. 같이 앉아 있다고 친교가 아닙니다. 교육상에서 오는 친교, 클라스메이트로 함께 공부했다는 것이 가까운 관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넷째, 사회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친교가 또한 코이노니아입니다. 시민생활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사회 속에 살면서 여러 가지 공동생활이나 모임에 참여합니다. 여자들이 잘하는 계() 모임도 하나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다섯째, 정치적인 친교도 코이노니아입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동질의식으로 나누는 친교가 코이노니아입니다. 국내에서는 심상하게 느끼다가도 국외에 나가 태극기를 본다던가 애국가를 들으면 마음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립니다. 남의 나라에서 내 동족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것이 바로 민족의식입니다. 씨족관계 혹은 같은 문화권에서 이루어진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국제적으로는 국가와 국가의 동맹관계도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어떤 코이노니아보다도 가장 귀하게 쓰이는 것은 종교적 코이노니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민족이라든가 동창이라든가 부부, 친구 관계는 제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코이노니아가 아니라면 필경은 남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도 예수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의 관계는 남남입니다. 한 사람은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고 한 사람은 술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면 둘 사이에 참된 친교가 이루어지겠습니까? 한 사람은 천국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어디를 바라보는지조차 모릅니다. 이들 사이에 어떻게 친교가 이루어지겠습니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나머지 한 사람도 예수를 믿어야 그들 사이에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집니다.

일례로 우리 교인 가운데 며느리는 교회에 나오는데 시어머니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며느리가 날마다 시어머니께 교회에 같이 나가자고 권하는데도 오히려 시어머니는 며느리더러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합니다. 나가느니 못 나가느니 하면서 싸우다가 마침내 시어머니가 백기를 들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시어머니가 교회에 나오게 된 사연인즉, 가만히 보니 아무리 억지를 써봐도 죽은 다음에 제사 받아먹기는 틀렸다 싶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교회에 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대개 부모는 자식들을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같은 신앙을 가져야만 바람직한 고부간의 관계도 이루어집니다. 신앙이 다르면 물리적으로만 한집에서 살뿐이지 코이노니아의 관계라고 할 것이 못됩니다. 지식이 같고, 경제력이 같고, 함께 살고, 아이를 낳아도 소용없습니다. 진정한 교제는 성도의 교제요,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두 사람이 손을 모아 함께 기도하는 것,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교제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아름다운 교제가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교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5)." 복음 안에서 교제한다----이 교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6절의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제를 만들어주십니다.

교제는 몇 가지 연유에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과거적 원인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친할 이유가 없으나 과거에 친했기 때문에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동창관계가 그렇고, 동향사람이 그렇고, 소꿉동무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거'에서 비롯된 이러한 교제는 온전한 친교가 못됩니다. 둘째로 현재적 원인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직장에 있다거나 함께 산다는 것으로 해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셋째인 미래지향적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오늘은 서로 다르더라도 앞에 있을 운명이 같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운명이 하나일 때, 그 친교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또한 완전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고향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듣습니다. 군민회다 동향 모임이다 하여 초대장이 많이 오는데, 대개가 주일입니다. 저들은 주일에 시간 내기가 편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마는, 제게는 주일이야말로 가장 바쁜 날입니다. 그래서 못 갑니다. 자연히 고향사람들한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섭섭하다고들 합니다.

나쁘게는 건방지다고까지 합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제게는 미래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미래에 나와 함께 할 사람, 그러기에소망교인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교제도 정신차리고 할 것입니다. 운명이 어디에 걸려 있나 보고서 말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코이노니아가 중요합니다. 한번보고 말게 될 친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끊어질 수 없는 인연, 피할 길 없는 운명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 가신바 그 과거에 주신 은총에 의하여 오늘의 내가 있으며, 한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를 맺으며 예배를 드리고, 앞으로 천국에 가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이것이 완전한 교제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맺어지는 그 어떤 관계도 신령한 교제보다 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친교의 원인에는 객관적인 원인이 있고 주관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내가 맺고 싶으면 맺고, 맺고 싶지 않으면 맺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부부 사이가 실제로는 남남이 된 지 오래인데도 둘 사이에 낳은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럭저럭 함께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네 옛 어른들은 더 심했습니다. 둘이 좋아서 만나고 함께 살고 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정해준 대로 만나고 가문의 체통 때문에 함께 살고 자식 때문에 함께 살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객관적 원인에 의한 코이노니아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취향대로 맺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버지를 선택하여 태어났습니까? 내가 어머니를 골라잡았습니까?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 집에 태어남으로 부모자식의 관계가 되고 형제자매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피로 맺어지는 이러한 관계와 같이, 일반적으로 객관적 원인에 의한 코이노니아는 주관적 원인에 의한 코이노니아보다 견실한 편입니다. 주관적 원인에 의한 코이노니아는 변화가 심합니다. 깊이가 없고 일시적이기 쉽습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도 주관적 원인에 의한 코이노니아가 아닙니다. 네 마음대로 맺는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은혜로 맺어진 영원한 교제, 완전한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구속된, 같은 구주를 고백하는 형제들입니다. 어려운 표현으로는 종말론적 공동체라고 합니다. 종말론적 공동체, 영원히 이어갈 공동체입니다. 성령께서 이를 보증하십니다. 상징적으로 성찬예식을 들 수 있습니다. 성찬예식에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식탁에서 한 구주를 가운데 모시고, 한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한 운명의 사람들이 한 음식을 나누는 신령한 교제의 자리가 성찬예식의 자리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일본의 누군가는 '천국은 같이 먹는 곳이다'라고도 말했습디다. 한 식탁에 둘러앉으면 '그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영원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가정에서도 체험합니다.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쁘게 지내다가도 식사시간이면 한 상에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는 모습이야말로 세상의 어떠한 모습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만합니다. 여기서야말로 '가정'이라는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끼리는 모름지기 되도록 자주 식탁을 함께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그다지 시원치는 않습니다 마는,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한 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서 아버지는 목사, 어머니는 전도사가 되어 경건하게 기도하고 식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양사람들처럼 촛불까지 켜놓고 분위기를 제대로 갖추면 더욱 좋습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 손님이라도 한 사람 초대하여 동석한다면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없는 외국사람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모름지기 생활 속에서 성도의 교제가 구체화하여야 하겠습니다. 차 한잔씩이라도 함께 마시며 교제를 나누라 합니다마는, 그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처음에는 교인이 3, 40명밖에 안되어 참 좋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죽 둘러앉아서 차를 한잔씩 나누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의 수가 많아지면서 어려워집디다. 이제는 몇 가정씩이 한자리에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주일마다 두세 가정이 함께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일은 이 가정과, 다음 주일은 저 가정과, 이렇게 차례차례 모여서 친교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행전 244절에 "서로 통용하고"라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유무상통 했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6절에는 "함께 고통을 받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유무상통 하는 것,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구체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코이노니아를 가진 사람은 그로 해서 형제와의 구체적인 교제를 가진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합니다.

서로 친합니다. 친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러한 교제가 곧 성도의 교제인 것입니다.

저러한 측면에서 보면 성도의 교제는 그실 부부간, 부자간, 형제간의 코이노니아보다도 더 친밀한 관계입니다. 어쩌다 상가에 가서 좋지 않은 장면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는데 유산 가지고 싸웁니다. 여러분,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 누가 나를 위로해줄 것 같습니까? 어떤 상갓집에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는데, 어떤 상갓집에는 우리 교회에서 간 교인 말고는 조문객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인이 살아 생전에 문상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상도 '품앗이'를 해야 됩니다. 내가 부지런히 다녀야 내가 죽을 때에 그들도 오는 것입니다. 내가 안 갔는데 그들이 오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기도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가장 귀한 교제 상대는 자식도 아니요 친척도 아닙니다. 성도입니다. 이 교제를 가장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식과의 관계보다 더 가깝고 더 절실한 것이 성도간의 관계입니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도 가장 깊은 것은 기도로써 맺어진 관계입니다.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교인이 수술을 받는다고 하자 성도들이 수술 받는 그 시간에 교회에 모여 그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때로는 아예 병원에 가서 기도실이나 병실에서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야말로 아름다운 교제요 신령한 교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고독은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면 병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면 병든 것입니다. 일에 짜증이 났다면 병든 것입니다. 기도할 마음까지 없어졌다면 위독한 상태입니다. 심령이 위독한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잘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 만나는 것이 덮어놓고 반갑게 마련입니다. 친척을 만나건 형제를 만나건 교회에 와서 교인들을 만나건, 만나는 사람마다가 무조건 반갑기만 합니다. 사람 만나기가 싫거나, 더욱이 사람을 보아도 똑바로 보지 않고 옆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단히 병에 걸린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앞에 나와 앉는 것이 좋습니다. 앞에 앉은 분들이 가장 예뻐 보입니다. 멀찌가니 앉아서 팔짱이나 끼고 있는 사람은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서로 눈과 눈을 마주하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사람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가장 행복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 자체가 기뻐야 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아침에 일어나면 찬송이 나오고 저녁에 들어가면 감사가 우러나와야 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저 좋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일에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심지어 이 일을 하다가 오늘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잘 믿는 생활입니다.

나아가 기도가 열려야 합니다. 기도의 문이 열려 있고, 듣는 마음이 열려 있어야 교제가 이어지는 법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갑이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말을 한없이 듣고 싶은 것이 교제입니다. 일전에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났을 때, 인사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분이 다가와서 설교를 더 길게 해달라고 합디다.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가 즐거워서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어져야 합니다. 이래야 진정한 교제가 자리할 수 있습니다. 싫증이 나서 자꾸 시계를 보게 되고, 설교가 좀 길어지면 ", 그 목사 참 설교를 길게도 하는구만"하고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면 교제는 끊어진 것입니다. 무릇 남의 말이 재미있게 들려야 참된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의 말 듣기가 지겨워서 어서 끝나기만 기다린다면 그와는 별수 없이 남남입니다. 진정한 교제는 듣고 싶어하는 마음(hearing heart)에서 가능합니다.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때에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도 밤새껏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래도 끝없이 듣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 어찌어찌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하면 상대의 말이 듣기 싫어집니다. 이제 교제는 끝장입니다. 설령 결혼해서 같이 산다 해도 그런 상태로는 그저 한 집에 사는 것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누고 싶은 마음(sharing heart)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같이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저쪽이 울면 같이 울고 싶고, 저쪽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그저 돕고 싶고 주고 싶어집니다. 진정한 교제라면 당연히 따르는 마음입니다.

행복이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주고 싶은 데 있습니다.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고 주기도 싫다면 서로는 상관없는 남남인 것입니다. 철학이네 뭐네 하면서 어렵게 따지고 들것도 없습니다. 요점은 간단합니다. 사랑은 항상 보고 싶고 듣고 싶고 주고 싶은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저 늘 하나님이 뵙고 싶고, 말씀이 듣고 싶고, 드리고 싶은 사람-이런 사람이 잘 믿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요, 참된 코이노니아를 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죄악입니다.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고독이 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코이노니아'-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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