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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아들이 되리라(요한복음 12장 35, 36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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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아들이 되리라(요한복음 1235, 36)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 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 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 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전전 시간에 이미 빛에 대하여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도 빛에 대하여 좀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빛의 아들이 되리라(36)"-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성경은 이 빛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두움에 대하여도 말씀합니다마는 그렇게 많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할 때, 멀리 깊은 빛이 있고, 그 빛이 우리가 좀더 잘 알 수 있도록,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까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빛에는 근본적인 빛, 본질적인 빛이 있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기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바 본질적인 빛 다음의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빛은 그 모든 빛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적인 빛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빛은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귀한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빛은 그실 정말로 중요한 빛, 근본적인 빛에 비하면 아주 작은 빛에 불과합니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환하게 전등불을 켜놓았지만, 그 빛을 햇빛에 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햇빛이 비취면 이 전등의 불빛은 힘을 잃습니다. 햇빛 아래서 이 전등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빛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가운데서는 이 작은 빛도 소중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전등의 불빛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죽은 빛입니다. 환하게 빛을 발하기만 할 뿐, 균을 죽이는 역할도 생명을 살리는 역할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요즈음에 보면 사람들이 재주가 좋아서인지 그 전등의 불빛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더러는 하더군요. 가끔 차를 타고 한밤중에 부평 근처를 지나다보면 거기에 무슨 큰 도시가 있는 것처럼 환한 언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 했더니 닭장이더군요. 한밤중인데도 닭장에 불을 환하게 켜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약기는 참 약았습니다. 닭들은 캄캄하면 밤인 줄 알고 자고, 밝으면 낮인 줄 알고 눈을 뜹니다. 사람들이 이 성질을 이용하여 일부러 캄캄하게 했다가 밝게 해서 하루를 이틀로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닭이 하루에 하나씩 낳는 달걀을 하루에 두 개씩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도 빛을 향해서 살기 때문에 닭도 어두우면 자다가도 환하면 '꼬끼오' 소리지르며 깨어나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낮에도 캄캄하게만 해주면 밤인 줄 알고 다시 잡니다. 이렇듯 작은 불빛인 등불로 움직이지 않는 동물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등불은 태양 빛에 비하면 아주 빈약합니다. 빛만 비출 수 있을 뿐, 햇빛처럼 강한 열도 주지 못하고, 화학변화도 주지 못하고, 생명력도 주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명에나 이용하는 이 빛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햇빛은 보다 근본적인 빛이요 보다 엄청난 빛입니다. 그런데 이 햇빛보다도 더 근원적인 빛이 있습니다. 더 엄청난 빛이 있습니다. 더 밝은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촛불보다는 전등불이 낫고, 전등불보다는 햇빛이 낫습니다. 그런데 이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빛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십니다. 그것은 햇빛이 있기 전의 빛입니다. 그 빛 안에 우주 삼라만상이 있습니다. 태양도 그 빛 안에 있습니다. 그 엄청난 빛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 빛 안에 다시 태양을 만드셨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촛불이라든지 전등불을 만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태양이라는 큰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보다도 더 근본적인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입니다. 말씀의 빛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빛이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오시는 생명력을 가리켜 빛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비유로 '육신을 입으셨다'라고도 표현합니다. 저리로 높이 계시는 생명력이 '하나님'이요, 그 생명력이 역사하여 우리 가운데 다가오고 투입될 때에 '그리스도'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보이지 않게 은은하게 열을 주듯이 감동을 줍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이 성령 역시 빛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삼위일체의 교리를 분명하게 정리하여야 하였습니다.

태양이 창조되기 전, 그 빛보다 먼저 근본적인 그리스도의 빛이 있었습니다. 이 빛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어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은 빛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빛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밝음이 있고,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비 생명적인 것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여러분, 햇빛만 생각해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햇빛은 생물을 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가 끊어진 생물에 대해서는 오히려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심판적인 요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4, 5)"---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어두움이 이를 이기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이 와서 세상을 환하게 비춥니다. 어두움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빛과 어두움은 상반(相反)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어두움이 있느냐 없느냐, 그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있을 때에 어두움은 물러가니까요. 반면에 빛이 약하면 어두움이 다가옵니다. 빛이 꺼지면 세상은 어두움에 뒤덮이고 맙니다. 이렇듯 빛과 어두움은 언제나 양자택일의 입장에 있습니다. 힘의 대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 빛과 어두움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품기 쉽습니다마는 그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빛이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은 있을 수 없게 마련입니다. 어두움으로 꽉 차 있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한줄기 빛이 들어감으로 어두움은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두움은 절대로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어두움은 빛과 싸울 수 있는 성격이 못됩니다.

요한복음 19, 10절은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빛이 창조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은 바 되었습니다.

창조도 빛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빛의 생명력이 창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굉장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는 이 빛 앞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 빛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또한 이 빛은 능력입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능력이 무효로 돌아갑니다. 어두운 데서 무슨 힘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삼손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은 삼손이 머리카락이 잘림으로 힘을 잃었다고 합니다마는, 눈이 뽑힘으로 힘이 없어진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사실, 눈이 뽑힘으로 빛을 잃어버린 삼손에게 힘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 힘 가지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빛이 있고야 힘이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고야 힘이 힘 될 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힘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빛이 없이 어두운 혼란 속에는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 도덕, 가치, 이성…… 모든 것으로 하여금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마음에 빛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빛을 받고야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빛이 꺼지고 어두워지는 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빛은 구원의 빛이요, 진리 안에 있는 자유의 빛입니다.

빛 안에 자유 함이 있지 않습니까? 밝기에 우리가 가고 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두우면 꼼짝을 못합니다. 그래서 전깃불이 없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밤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밝은 곳으로 밝은 곳으로 옮겨가며 살았습니다. 이 빛에는 부끄러운 행위, 잘못된 행위, 더러운 행위에 대해서는 심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63년도인가,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어느 돈 많은 미국사람의 초대를 받아서 생전처음 고급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 때 제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있습니다. 화려한 샹들리에는 다 꺼놓고 조그마한 둥그런 식탁에 빨간 유리그릇을 덮어씌운 촛불 하나만을 켜놓고는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좀더 밝았으면 좋겠다 싶고 영 재미가 없더군요. 아무리 분위기가 좋다지만 잘못하면 손가락을 베겠습디다. 본디 재가 이런 것을 보고 가만히 넘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웨이터를 불러서 물어보았습니다. "왜 저 좋은 전등은 모조리 다 꺼놓고 촛불만 덩그러니 켜놓는 것입니까? 게다가 촛불은 또 왜 유리잔으로 덮어씌워서 더 어둡게 합니까? 이렇게 어둡게 해놓고 어떻게 식사를 하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칼질하는 것이 서툰데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웨이터가 껄껄 웃으면서 말하더군요.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Don't worry about this.' 그 이유로 두 가지를 이야기합디다. "손님 나이가 벌써 삼십은 넘었겠는데 그 동안 연습한 것만으로도 절대로 남의 입에 음식을 떠 넣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음식을 남의 입에 넣거나 손가락을 벨만큼 어린아이는 아닌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입니다. 웨이터의 덧붙이는 말이 진리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불빛에서 보면 세상에 미인 아닌 여자가 없습니다. 미남 아닌 남자가 없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싶어 하릴없이 껄껄 웃고 말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시거든 불을 너무 환하게 켜놓지 마십시오. 불그스레한 전등이나 촛불만 하나 켜놓으십시오. 그런 빛 아래서는 모두가 다 미인입니다. 다 곱게 보입니다. 여자 분들 보면 화장하느라 애를 씁니다만 햇빛 속에 나가서 한번 보십시오. 못 봐줍니다. 그 시커머죽죽한 아이섀도우에 불그죽죽한 볼 터치, 정말 못 봐줍니다. 화장이라는 것이 밤에나 통하지 낮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화장은 거짓말 아닙니까? 거짓말이란 어두운 데서나 통하는 것이지 밝은 데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빛 앞에서는 어두운 것, 인간적인 것, 조잡한 것, 인위적인 것, 장식적인 것, 위선적인 것은 다 드러나고 맙니다. 거짓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주 밝은 대낮에 무슨 화장이 통하겠습니까? 소용없는 짓입니다. 빛이란 그런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빛의 아들이 되리라"-그 빛에 자신을 온전히 위탁함으로 빛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빛의 아들'을 에베소서에서는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빛의 아들' '빛의 자녀'-이 말들은 같은 뜻으로, 헬라어로는 '테크나 포토스'입니다. 참 빛을 많이 받음으로, 그 빛이 우리에게 축적되어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이 되리라." 그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문말씀에서 몇 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보십시오. "빛이 있을 동안에"-빛이 있을 동안에 빛 가운데서 살라는 시한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시각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그 시각까지의 시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그 동안에 빛을 많이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많이 받아 들여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받아들이고, 진리를 많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보면 기회가 있을 때에 열심히 성경공부 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을, 그 기회를 다 놓치고 나서야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에 가서 집회를 인도할 때에 보면 비교적 교인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모인 분들의 삼분의 일이 소망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 가운데 공통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소망교회 다닐 때에 좀더 열심히 성경공부 하고 열심히 말씀 듣고 배우고 봉사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다면 오늘날에 제가 좀더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데 말입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제가 설교한 내용을 담은 카세트 테이프를 수백 개씩 구해다가 집에다 놓고 열심히 듣습디다. 스스로들 거듭거듭 복습해가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예수님의 이 말씀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편에서 보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이라는 것이 되고 우리의 편에서 보면 건강할 때, 젊었을 때, 정신이 맑을 때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야 합니다. 흐리멍텅해진 뒤에는 믿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혼란해진 다음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 빛을 받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나이가 들수록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사그라듭니다. 예수님께서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말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이 말씀을 좇아 행할 때에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빛의 자녀가 되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첫째가, '빛을 믿으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빛을 믿으라-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의 갈릴리 청년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건강한 청년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친히 '빛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이 보기에는 내가 갈릴리의 한낱 목수의 아들로나 보이겠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내 얼굴을 보면서 내가 빛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reality, 그 빛 자체를 믿으라 하심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 빛이 육신을 입으시고 여기에 와 있다고 하는 것, 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십니다. 이적을 행하시는 것 자체가 빛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 어두움이 일시에 물러갑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던 의심, 증오, 시기, 질투…… 어두운 모든 것이 다 물러갑니다. 그리고 점점 밝아집니다. 마음이 밝아집니다. 그리함으로 예수님의 얼굴이 점점 더 분명하게 보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봅니다.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모든 사건을 통하여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는 이적을 보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뵙고, 귀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인하여 밝아지는 것들을 믿으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는, 예수님의 이적을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어느 마을을 찾아가시건 언제나 환자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하나하나 다 고쳐주십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해지고, 앉은뱅이가 일어섭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일어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다시 살아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질병과 귀신이 살지를 못하고 물러납니다. 슬픔도 탄식도 예수님 앞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을 다 물리치시고 환한 세상을 만드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아진 세계에서는 미워하던 사람, 의심하던 사람이 다 사랑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나사로의 집안은 예수님께서 찾아가 주심으로 기쁨을 회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 : 21)." 귀신이 물러가고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는 그 모습,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쫓겨나고 빛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듭거듭 '나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세상을 믿으라'고 간곡히 일러주십니다.

좀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저 앞의 운명을 볼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세계, 죽음 뒤의 세계가 예수님의 빛을 받음으로 환하게 보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과 함께 듣고 보고 배우고 한 3년 동안에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죽은 사람을 보시고 잔다고 하시는 예수님, 죽은 사람을 '나오라'하시는 한마디로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죽고 사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빛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어두움도 빛이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앞에 큰 환난과 핍박이 다가오고 순교가 다가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저 미래를, 죽음 다음의 저 세계를 환하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울겠습니까? 누구를 미워하겠습니까? 원래 승자란 슬픈 사람이 아닙니다.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승자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빛을 믿으라"-내 빛을 보면서, 내 빛을 받으면서 너희의 운명과 세계의 운명과 세계의 종말과 저 앞의 먼 미래를 환하게 바라보라 하심입니다.

두 번째는, '영접하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영접함으로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수용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빛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깨달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좋은 말인데 북한사람들이 쓰기에 우리가 잘 안쓰는 말이 있습니다. '접수한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가정집에 모여 설교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앉아서 좌담식으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설교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 불법이 아니지만, 서서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설교로 간주되어 불법이었습니다. 법적으로 여행자들은 설교를 하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설교를 할 때에는 앉아서 조용히 좌담 형식으로 합니다. 그래야만 법에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도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1시간쯤 했나, 이젠 그만했으면 좋겠다 싶은 참인데 그분들이 "좀더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연이어 2시간이나 하고 나서 ", 이젠 그만 합시다. 오늘은 그만하고 돌아갑시다"했더니 거기에 있는 교인 한 사람이, 우리로 말하면 집사 격인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오늘의 교양을 전적으로 접수합시다"라고 말하더군요. 저들에게는 설교라는 말보다는 교양이라는 말이 익숙합니다. 그래서 수용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수용, 이것은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깨닫는 것과는 다릅니다. 감정과 지식을 겸한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판단도, 아무 비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수용할 따름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보십시오. 믿는다는 것은 곧 영접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곧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영접함으로써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가, '빛에 다니라' 하는 것입니다. 빛 안에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35)." 여기서 '다니라'하는 것은 '행하라'하는 뜻입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자신이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에 다녀야 합니다. 빛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이 말씀은 조금 약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것은 명령입니다. 빛을 받는 데에서 머물지 말고 빛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빛 안에서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빛을 등지지 말아야 합니다. 수수께끼를 하나 내볼까요. '직업을 통해서 평생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진사입니다. 사진사는 빛을 등뒤로 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빛을 향하여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빛을 등져서는 안됩니다. 옆으로 비껴 받아서도 안됩니다. 빛을 향하여 정면으로 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빛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 빛 안에서 action을 취해야 합니다.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빛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밝히 보이면 이제는 일해야 합니다. 깨달았으면 이제는 뛰어야 합니다. 영접했으면 이제는 움직여야 합니다. 환한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잠만 자고 있다면, 그것이 밤이지 어떻게 낮입니까? 이제, 우리는 빛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빛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보이는 대로 행하고, 밝은 데로 향해서 뛰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빛을 의식하고 밝게 살아야 합니다. 빛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오든 은사와 충성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빛이 있을 동안, 그 빛 안에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순종해나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요한복음 8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너희는 빛 안에서 깨닫는 대로 행해야 한다, 그럴 때에 빛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 빛이 능력이 되고 동기가 되고 지혜가 되어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하심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빛에 다니는 사람은 어두움에 매이지 않는다, 빛 안에 있는 사람은 실수하지 않는다, 빛을 보고 사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빛이 힘이 되고 동기가 되어서 역사 할 때에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빛을 믿으라. 빛을 많이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 빛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빛의 자녀가 되리라' 빛을 받아들이고, 빛 안에서 행함으로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물러나는 것처럼 빛의 자녀로 말미암아 어둠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의 생활이 밝아질 뿐더러 나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방향을 찾지 못한 사람이 방향을 찾고,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 그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이 소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빛을 찾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로 가게 된 어는 선교사가 동행할 운전수를 구하려 하는데 무척 힘이 듭니다. 그곳은 회교국가가 돼놔서 도저히 기독교인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회교교인 청년 하나를 고용해서 통역관 겸, 운전수 겸, 안내원 겸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엔가 차를 타고 먼길을 가는데 사막 한가운데서 차가 덜컥 고장이 났습니다. 햇볕은 뜨겁게 내리쬐어 괴롭습니다. 선교사와 운전수가 차에 매달려 고치려고 애를 쓰지만 좀처럼 되지를 않습니다. 그 때 마침 옆으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갑니다. 손을 흔들며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그 트럭은 본체만체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 트럭에는 여러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못 본 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회교교인 운전수가 욕을 해댑니다. "이 나쁜 놈들아, 좀 도와주지 않고 이런 사막에다 그냥 두고 내뺀단 말이냐?"

땀을 뻘뻘 흘리며 차에 매달린지 여러 시간만에 드디어 차를 고쳤습니다. 다시금 가던 길을 갑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어느 트럭이 고장이 나서 길 위에 서 있습니다. 도움을 거절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 바로 그 트럭입니다. 그것을 본 회교청년은 고소하고 통쾌했던지 '네 이놈들, 아까 그냥 도망가더니 잘됐다. 그거 옹골지다'라고 중얼거리면서 계속 운전해나가는데 선교사가 차를 멈추라고 합니다. 청년이 볼멘소리를 합니다. "멈추다니요. 저런 못된 놈들은 도와줄 것 없어요. 그냥 가시지요." 선교사는 말합니다. "아니오. 우리가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어떻게 못 본 체하고 그냥 갈 수 있겠소. 해도 저물어 가는데 마땅히 도와줘야지요." 그리고는 차를 멈추고 내려서서는 그들을 도와서 차를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와 청년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한참을 가다가 그 청년이 선교사에게 조용히 한마디합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렇게 도와주는 것을 보고 나니 비로소 당신이 그 동안 내게 예수 믿으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말을 들었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고 알려 하지도 않았으며, 사실 깨달아지지도 않았는데, 이 선교사의 착한 행실 하나를 보고 나니 비로소 그가 전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다고 간증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선한 행실이 빛입니다. 밝은 얼굴이 빛입니다. 감사하는 말이 빛입니다. 소망으로 가득 찬 얼굴이 그대로 빛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 자체가 빛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크신 능력을 힘입어 마음의 빛을 얻었습니다. 많은 빛을 받았습니다. 이제, 밝은 마음이 되었습니까? 밝은 생활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됨으로 작은 빛이 되고, 작은 빛이 됨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밝아지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소망을 얻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빛의 능력과 빛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빛의 자녀 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의 아들이 되리라"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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