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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로 나가는 약대(마가복음 10장 23절~27절)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 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 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하신 오늘의 잠언말씀은 제가 수십 년을 두고 생각해오는 말씀입니다 마는 근자에 와서는 특별히 새롭게 느끼는 바가 많은 말씀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일평생을 두고 생각을 해도 그 깊은 뜻을 다 알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비사적(比辭的) 잠언입니다.
그리고 과장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각다귀는 걸러먹고 약대는 통으로 삼킨다'라든가, '내 눈에 있는 들보' 같은 표현이 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간다'라고 하는 이 표현과 같은 유의 과장이라 하겠습니다. 들보가 어떻게 눈에 들어가며, 낙타가 어떻게 바늘귀로 나가며 사람 입에 통째로 삼켜진다는 말입니까? 엄청난 과장인 동시에 해학적이기도 한 잠언입니다. 아주 많이 비웃는 것만 같은, 세상을 비웃고 부자를 비웃는 것만 같은 내용이 아닙니까? 아주 깊은 데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약대(낙타)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짐승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프리카에 가면 코끼리를 볼 수가 있고 옛날에는 맘모스라고 하는 거대한 짐승이 있었는가 하면 엄청난 고래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마는 그런 것보다는 쉽게 볼 수 있는 짐승이 약대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동물원에나 가야 보지만 사막 가까이에 있는 이스라엘나라, 팔레스타인 근방에서는 늘상 낙타를 볼 수 있고 또 가장 커 보이는 짐승입니다. 바늘귀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구멍 중에서 제일 작은 구멍인 셈입니다. 가장 작은 것을 말할 때에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를 들어 말하는 것처럼 가장 작은 구멍으로 바늘귀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대와 바늘구멍'은 말하자면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의 대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할 것은,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져야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뜻입니다. 바늘귀로 들어가려면 바늘귀보다 작아야 되는 것이지요. 같아도 안되고 커도 안됩니다. 우리가 바늘귀에 실을 꿸 때에도 실을 가늘게 가늘게 비벼가지고 꿰지 않습니까? 바늘귀보다 실이 가늘어야 들어갑니다.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져야 문제의 해결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큰 짐승이 가장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려면 작아지고 작아지고, 아주 홀가분해질 정도로 더 작아져야만,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져야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십시다. 이 성경에는 어떤 부자라고도 하고 한 청년이라고도 하고 한 율법사라고도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복음서마다 다르게 표기하고 있으니 종합하면 결국 젊은 부자 율법사입니다. 이 사람이 모처럼 기회를 얻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생각하면 예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우리도 한번 만나 뵙고 싶지만 2천 년 후에 살기 때문에 못만나뵙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이라고 해도 다 만나뵙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생에 한번, 아니 우주에 한번 있었던 사건인데, 그런 귀한 때에 예수님 앞에 찾아옵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 속에서가 아니라 일대 일로 만나 뵙는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야말로 더없이 소중한 기회이거든요.
제가 가끔 중국에 가보면 참 이상한 일이 있어요. 예고도 없이 가는데도 도착하고 보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흑룡강성 같은 먼 곳에 있는 분인데, 이분이 매일 새벽마다 방송으로 제 목소리를 들으면서 필기해온 것입니다. 이런 분을 기약한 바도 없이 호텔에서 맞닥뜨리는데 서로가 얼굴을 알 턱이 없습니다. 제 음성만 듣고 알아보는 것입니다. 지나치는 제 음성만 듣고서 다가와 "곽목사님이시죠?" 합니다. "어떻게 알아요?" 제가 묻습니다. "아, 매일 아침 목사님의 음성을 듣는데요." 그는 대답합니다. 그러고는 말할 수 없이 반가워합니다. 손을 잡고 막 울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12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온 것입니다. 성경책과 제 설교 테이프를 얻으러 호텔에 달려온 것입니다. 어쨌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런 식으로 서로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청년 부자 율법사는 예수님을 일대 일로, 개인적으로 뵙습니다. 이게 보통 일입니까? 귀한 기회입니다. 귀한 마음입니다. 병든 사람이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병들었으니까, 아쉬우니까 나온 것입니다. 이렇듯 병든 사람이 병 고치러 오는 것과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과는 이야기가 질적으로 다릅니다. 한쪽은 병 고치러 나왔고 다른 한쪽은 영생을 얻으러 나온 것입니다.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마는 다같이 예수를 믿어도, 가난하고 병든 자가 잘 믿는 것과 부자가 잘 믿는 것과는 달라요. 부자가 잘 믿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똑같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해도 아쉬운 사정이 있어서, 이를테면 고3학생이 있어서 나오는 것과 아쉬운 것 없는데도 나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기도제목이 없는데도 나오는 것, 이것이 진짜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잘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젊은데다 부자요 율법사로 존경받는 이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서 예수님 앞에 나옵니까? 그 마음이 일단은 고귀한 마음입니다. 그 동기가 아름답습니다. 게다가 나아오는 자세도 좋아요.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17절)" 끓어 앉았습니다.
귀한 자세입니다. 귀한 시간입니다. 게다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여쭙니다. 구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돈이 아니고 명예가 아니고 치유가 아니고 부귀 영화가 아닙니다. 영생을 구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아서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이렇듯 시작은 좋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마지막이 나빴어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발길을 돌립니다. 안됐어요.
참으로 안됐어요. 재물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 귀한 잠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처럼 영생을 얻으려고 왔다가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갔다, 왜 그랬더냐, 이유는 오직 하나, 재물이었다 -아주 적절한 소재요, 현장성 있는 교훈입니다. 바로 그 시간을 딱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기가 막힌 시간입니다. 자, 보아라, 저 사람 좀 보아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결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적절한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어요. 보아라, 저 사람에게는 천당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겠다 하십니다.
문제는 재물입니다. 재물과 구원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부와 믿음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재물관, 물질관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딱 한마디로 찍어 말씀하시는 아주 귀한, 함축성 있는, 심오한 잠언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어느 학자는 예수님의 비유가 복음서에 얼추 서른여덟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중 16가지. 약 4할이 재물과 관계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는 비유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 비유의 40퍼센트가 재물과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서의 교훈을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10절 중에 3절, 즉 3할이 돈과 관련된 교훈이라고 그는 정리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기독교는 가장 실질적으로 물질적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물질에 얽힌 문제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바로 처리하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주제가 구원이면서 동시에 재물에 대한 교훈입니다. 구원과 재물을 나란히 언급합니다. 구원과 재물, 재물과 구원 -구원 얻으려면 재물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겠는가, 구원 얻는 사람은 재물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무릇 재물에 대해서 오해하는 바가 있습니다. 재물의 능력을 너무 과장합니다. 너무 크게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재물과 구원은 별개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이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재물이 없다고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행복과도 별개입니다. 재물이 있다고 행복하고 재물이 없다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의 세계관으로 볼 때에는 행복과 재물은 별개입니다. 이만큼은 생각하고야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재물과 의(義)도 별개입니다. 부자는 곧 의인이요, 가난하면 저주받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돈이 벌리었다고 '축복이다'하고 돈이 없어졌다고 해서 '불행이다' '저주받았다'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마는 저 흑룡강성이라든가 연변 쪽에서 기독교 방송이나 아세아 방송이 잘 들리거든요. 자유가 있어서 라디오를 듣는데, 제 설교는 새벽 시간마다 한 시간 나가는 것이 있고, 낮 설교 하는 것이 나가고, 삼일저녁 설교도 나갑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도 나갑니다. 이들 목사님의 얼굴을 저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설교내용은 환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어떻고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어떻고 하며 평을 하는데 여간아닙니다. 그런 설교 중에서 저들이 아주 싫어하는 메시지가 하나 있어요. 한번은 제게 질문을 합디다. "어느 목사님 설교를 들으니 예수 믿으면 부자로 산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데 그 소리,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단이 아닙니까?" "왜요?" 제가 반문했더니 "당신들은 예수 잘 믿어서 잘살고, 우리는 예수 지지리 못 믿어서 이렇게 고생하는 것입니까?"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신앙이 엉터리이고, 우리는 이런 핍박 속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진짜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섣불리 가서 전도한다 선교한다 하고 다니면 코웃음을 칩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설교하느냐 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많이 하고 가야 합니다. 거기 가서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병 낫는다, 예수 믿으면 부자로 산다" 했다가는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팔러 나왔다고 삿대질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 재산과 구원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돈이 있다고 의인인 척 하지 마십시오. 돈이 벌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것 같고 손해가 나면 '아이고 내가 십일조를 안 바쳤더니 그만 다가지고 가시는구나' 따위로 생각하려든단 말입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병들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고, 늘 건강하면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신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을 그렇듯 세속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부자 청년의 경우와 같이 둘 다 얻으려 하는 수가 있습니다. 재물도 얻고 영생도 얻고 --이것이 문제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을 먹겠느냐, 술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했더니 술에 밥 말아 떡을 안주해서 먹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안될 일이지요.
또한 본문에 나타난 내용대로 보면 바른 신앙에서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바른 신앙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소에 뿔이 있습니다. 그러나 뿔이 있다고 다 소는 아닙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 재물은 축복도 될 수 있고 저주도 될 수 있습니다. 금력은 분명히 마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어디에 우선을 두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사용하는 일, 관리하는 일에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때에 재물은 소중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우선 순위가 바뀌게 되면 제물은 큰 가시가 되고 큰 시험거리가 되고 큰 걸림돌이 되고, 심지어는 오늘의 본문대로 천국에도 못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재물은 마귀요 악마입니다. 우선 순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재물의 성격이 이렇게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가게하고 오게 합니다.
일할 수 있게 합니다. 주고 싶은 사람 주게 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바로 관리하지 못할 때에는 그 반대로 사람이 재물의 노예가 됩니다. 꼼짝못합니다. 이 얼마나 다릅니까? 재물로 인하여 자유해진 사람, 재물로 인하여 노예가 된 사람 - 이스라엘사람들의 격언에 재물을 잘 관리하면 충성스러운 종이 되고 재물이 우리의 종이 되지만 잘못 관리하고 내가 위하기로 들면 재물은 무서운 폭군이 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폭군이 되어서 나를 꼼짝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재물의 의미를 본문에 비추어 생각해봅시다. 문제는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토록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재물입니다. 그런 매력이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 현실적인 것이 돈으로 해결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돈이 만능인 것처럼 보입니다. 화려해 보입니다. 매력이 엄청납니다. 마침내는 하나님보다 더 중해지고 하나님보다 더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예수님께서는 돈과 하나님, 보화와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겸하여 섬기는 것은 고사하고 재물을 더 높인다고, 더 의존하려 한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이 그다지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아는 목사님에 비교적 여유가 많은 분이 계십니다. 언젠가 조용히 앉아 같이 식사를 하다가 그분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 안한 것이 하나 있어요.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지 처갓집을 의지하는 것인지, 어느 쪽을 더 의지하는 것인지를 모르겠어요." 그분, 처갓집이 부자입니다. 전화만 걸면 돈을 갖다주거든요. 그래서 단 한번도 돈으로 걱정해본 적은 없다고 해요. "도대체 내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이렇게 걱정이 없는 건지 처갓집 믿고 걱정이 없는 건지 알쏭달쏭하답니다.
여러분, 잊지 말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재물은 우리의 관심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재물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빼앗습니다. 독점합니다. 재물에 마음을 붙잡히기 시작하면 보이는 게 없어집니다. 아무 것도 안보이게 됩니다. 자식도 안보이고 아내도 안보이고 세상도 안보이고 교회도 안보입니다.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어집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내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버려요. 이래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못하게 합니다. 봉사도 못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내 마음의 일부만 돈에 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아닌 것입니다. 다 뺏기고 맙니다. 부인들끼리 계를 잘하지 않습니까? 계를 많이 해서 계주노릇 하다가 계가 깨지면서 미쳐 돌아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심방을 가보니 미쳐도 예사로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만 세고 앉아 있어요. 돈을 뺏으면 울어요. 어째서 그 꼴로까지 되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돈으로 인해서 얼마나 고생을 해보았습니까?
제가 한번은 대구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장로 댁에 유숙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이었습니다. 그 장로님, 나이 젊은데도 머리가 새하얗게 셌어요. 완전한 백발이었습니다. "머리가 왜 그렇게 되었소?"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어쩌자고 광산에 손을 댔거든요. 될성부르기에 자꾸만 돈을 끌어다 처넣었습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아요. 마침내 부도가 나고 어려워져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습니다. 밥이 안 먹힙니다. 소화가 안됩디다. 입맛이 죽어버렸습니다. 밥 한술 못 뜨고 잠 한숨 못 자고 꼬박 일주일 동안을 지내고 나니까 머리가 홀랑 빠져버립디다. 다시 머리가 나는데 아주 깨끗한 백발이었습니다. 이 백발은 내가 호되게 한대 얻어맞은 증거입니다." 돈으로 인한 고민, 대단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마음을 통째로 빼앗습니다. 미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돈 조심 할 것입니다. 그렇게 미치지 않도록,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돈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안하무인으로 만듭니다. 인권도 상관없게 만듭니다. 영생은 죽은 다음의 이야기거든요. 돈은 당장의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도 영생을 얻고 싶거든 있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르라 했더니 그 사람은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늘 짓궂은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만일에 그 때 그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장에 그리하겠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팔 것 없다. 그냥 따르라" 하셨을 것만 같아요.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재물 쪽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시험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바늘귀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바늘귀는 실제의 바늘귀를 말하는 것인 동시에, '바늘귀'라고 이름 붙은 성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큰 성문이 있었는데, 아침에 열었다가 저녁에 닫습니다. 저녁이 되어 문을 닫았는데 성밖에 있다가 시간이 늦어 미처 들어오지 못해 보십시오. 한밤중의 성밖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비상구를 만들었어요. 사람 하나가 겨우 몸을 굽혀 들어갈 수 있도록 납작하게 조그마한 문을 내놓았습니다. 문이라기에는 너무나 작으므로 바늘귀라 불리던 문입니다. 낙타를 타고 온 사람이라면 그 낙타를 타고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짐을 다 내리고 사람이 먼저 들어간 다음 낙타를 꿇려 가지고 끌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짐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본문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대신 반문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십니다. '바늘귀로'라니, 빈 몸으로라야 들어갈 수 있고, 몸을 굽혀야 들어갈 수 있고, 나를 부정해야 들어갈 수 있고,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옛날에 좋아하던 것을 스스로 분토화하여 다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실제로 다 버린 사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합니다. 약대와 같이 높은 것은 바늘귀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존재로 만드십니다. 스스로 높이는 사람을 가장 낮은 사람보다 더 낮게 만드십니다. 많이 가졌다고 부하던 마음을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인 것 같은 마음으로, 그보다 더 낮은 마음으로 만들어서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만드셔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어느 돈 많은 부자가 병이 났습니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아까워 가지 않았습니다. 미루고 미루다가 병이 정말 중해져서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가 너무 늦어서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의사의 손을 붙들고 하소연합니다. "나는 부자입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 돈 다 줄 테니 나 좀 제발 고쳐주시오." 의사는 쓴웃음을 짓고 맙니다. 건강할 때에는 재물이 소중한 줄 알았지만 중한 병에 들고 보니 재물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못 가진 것이나 진배없었던 것입니다. 뒤늦게 작아진 것입니다. 작아지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을 작게 만드는 것, 교만한 사람 겸손하게 만드는 것, 쓸데없는 일에 매인 사람 순수하게 겸손하게 온유하게, 나아가 믿음의 사람 만드는 것, 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드십니다. 약대같이 높고 큰 사람을 낮추고 낮추고 작게 작게 만들어서, 바늘귀로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작게 만들어서 들어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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