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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되신 그리스도(에베소서 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로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명함에 있어서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간단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쉽고도 간단한 말이 얼마나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에 누구나 알 수 있고 알아야 할 이야기를 이 비유 속에 담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요즈음 보면 교회에 대한 개념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 혹은 '성례의 공동체'라고도 하고 또는 '교회는 선교다' '교회는 봉사다'라는 등등의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들을 다 나열해 본다하더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는 이 말만큼 잘된 표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시작은 당연히 예수님에게서부터 찾고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마태복음 16:16에 기록된 이 말씀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뿌리요 기초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중한 본질을 떠나서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극히 지엽적인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교회의 문제는 원칙적인 그 본질적 진리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생각해 나가야 되는 것으로 압니다. 마태복음 16:16에 기록된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로부터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칭찬하신 다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보는 우리 성경의 번역상으로는 그 뜻이 약화되고 숨겨지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만은 원문 상으로 "내 교회는 내가 세우리라"는 명확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결코 베드로가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 고백 위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 너는 그 일을 위해 심부름을 하게 되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한편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대표적인 고백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어떤 신학자들은 '고백적 교회'라는 용어를 만들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예수를 그리스도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 믿음이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교회에 대한 개념과 이해를 함에 있어서 교회는 그저 예수님하고 친한 사람들이 모인 곳 정도로 생각들을 하는데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신앙 고백을 하는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숫자와는 관계없이 두세 사람만 모여도 신앙 고백이 있는 거기가 교회요, 엄격한 의미에서는 한 사람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는 바로 거기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였다하더라도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이 모였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들 예수 믿는 사람이 없어지면 이제 교회는 없어졌다는 생각을 하기가 쉬운데 교회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보다 신령한 의미에서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와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로 이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란 지금 여기 우리와 같이 같은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 그 신앙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영적인 현존자로 모시고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금 이렇게들 한 자리에 모여 있기는 하지만, 이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진정한 교인인지 우리로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교회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시 말하면 신령한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고백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그 거룩한영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 쭉 널려져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간과 장소는 달리했지만 그리스도 앞에 같은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중국이든 아프리카이든, 어느 곳에나 널리 흩어져 있음인데,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령한 교회이며, 이 교회를 말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가 완전한 교회이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교회는 그 교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단순히 교인들이 모이는 곳, 혹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생각하려 드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는 보다 신비로운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라고 말했을 때 이는 교회가 예수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냐고 하는 반문의 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보다는 훨씬 더 신비롭고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 한 마태복음 16:16 말씀과 거기에서 나아가 마태복음 28:20의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가 항상 함께 하시는 바로 거기가 교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이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이거나 과거에 오신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를 그런 분으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베들레헴에 나셨다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한 사람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살아 계시고 오늘 살아서 역사 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연구해 보면 그들의 신앙 고백은 언제나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이었습니다.
가끔 저에게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되느냐하고 묻는 동료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일 뿐 나도 잘 모릅니다 라는 말로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다시 솔직히 좀 대답을 해달라며 교회 부흥의 비결을 묻습니다. 그때에는 제가 정 알고 싶다면 한 마디로 하겠다면서 "교회가 교회 되게 하면 교회는 성장하기 마련입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몸은 자연히 자라게 되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만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라고 할 때 그것은 교회적인 것이 아닌 것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적인 요소가 아닌 잘못된 찌꺼기들을 제거하여 순수한 교회의 본질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교회는 부흥되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좀더 어려운 말을 덧붙이자면 "그리스도가 오늘 살아서 계시는 그 교회는 부흥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찾은 것은 예수를 만나러 온 것이지 목사 얼굴을 보거나, 도덕, 윤리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 예수를 만나야되는 것입니다. 진정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 교회가 왜 부흥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흘러오는 동안 발전을 하기도 하고 타락의과정도 거치면서 여러모로 변모해 왔습니다. 그러면 그 역사적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에서 잠깐 그 맥락을 살펴봅니다.
첫째, 맨 처음 교회, 특별히 구약의 맥락에서 볼 때 교회는 회당에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이나, 구조, 형식으로 볼 때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가정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 이삭의 가정, 야곱의 가정 등 이 가정 개념이 커져서 큰 가정으로 변한 이것이 회당입니다. 그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열 집만 모이면 회당을 세웁니다. 그 결과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만도 약 5백여 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저들은 열심히 회당을 세우고 회당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큰 가정이기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이면 모두가 다 내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키부츠(kubbutz)라는 집단농장을 만드는데 까지 발전이 되는 것입니다. 키부츠를 연구해 보면 그 사귐이 얼마나 가까운지 자녀를 기르는 것도 낳아서부터 시작하여 18세, 그러니까 우리 나라 계산으로 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예 같은 방에서 네 아이 내 아이 구별할 것이 없이 교육을 하고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남녀가 같이 지내더라도 오빠, 동생하며 아예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왔기 때문에 이성 문제로 인한 사고가 없으며, 따라서 같은 키부츠 안에서는 연애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른 키부츠와 만나야 결혼이 성사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서로 그 자녀들을 매우 가깝게 키웁니다.
여기에 비해 요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한 가정에 한 자녀 낳기 운동에서 '한 집 건너 하나 낳자'는 슬로우건(slogan)이 나온 정도라 모두들 하나뿐인 귀한 자녀입니다 만은, 부디 부탁하는 것은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이웃집 아이가 아니면 친구의 아이하고라도 함께 자고 지내면서 형제애를 배우고, 다른 사람과 사귀며 참된 친구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가 외동이어서 자기 위주로 위함만 받고 자랐기 때문에 그만Î 못쓰겠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걸핏하면 외동아들, 외동딸하고 나오는데 하지만 요사이 외동딸, 외동아들 아닌 집이 어디에 있습니까? 결혼식 같은 것 할 때 보면 외동아들이라서 처음이며 마지막이라면서 굉장하게 야단들을 하는데, 요즈음 세상에서 열 번째 아들이라면 귀할지 모르나 흔하고 흔한 것이 외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생각을 달리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같은 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데 히브리 사람들은 그 점에 관한 한 철저합니다. 그러기에 제가 회당에 한번 가보았더니 한 시간 전에 갔는데도 벌써 가득 와서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가 하면, 예배가 끝난 다음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떠서 나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 저기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등 헤어질 줄을 모르고 하루 종일 회당에서 그렇게 같이 지내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하나의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좀 큰 가정인 공동체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킬 때에도 내 자녀를 위해서만 학비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녀가 공부를 잘하지 못할 경우에는 장사를 하게 해놓고서도 다른 집 아이들을 얼마든지 도와줍니다. 유대인 출신의 세계적인 학자, 예술가들이 많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저들은 머리만 좋으면 돈걱정하지 않고 일생동안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해도 내 새끼만 공부시킬 생각이지 이웃집 아이 공부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투만 나고 함께 도와줄 마음은 없으니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네 아이 내 아이 없이 살아가는 이런 마음이 커져서 회당을 이루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전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갈라디아6:10 말씀에 보면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믿는 사람은 내버려두고 믿지 않는 사람 돕겠다고 들 하는데, 우선 믿는 가정부터 서로 도와서 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운동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일단은 히브리적인 가정 공동체의 개념으로 회당, 곧 교회가 이해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위 커뮤니언 처치(Communion Church)라고 하여 성례를 중심으로 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찬 예식을 교회의 본질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찬식 장면을 한번 생각해 봄이 좋겠습니다. 온 회중이 같이 떡을 떼고 같이 잔을 나눕니다. 이는 곧 같은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같은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은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히브리 사람들로 말하자면 화목제를 드리고 쭉 둘러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는 그런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찬예식을 교회의 본질로 생각하는 것이며, 따라서 성찬예식이 곧 교회의 상징이요, 양상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인연과 성도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성례에 참여하고 친교 하는 그런 커뮤니언 처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의미를 살려서 오늘 우리 예배당 안에도 4미터나 되는이 성찬상이 강단에 이렇게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성찬상을 이렇게 떼어놓지 않고 저만큼 벽에다 붙여 놓아 버리면, 그때에는 제단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며, 그것은 신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 됩니다. 우리 교회는 교인이 많기 때문에 한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만은 조그만한 교회들은 교회를 동그랗게 지은 다음 가운데에다 성찬상을 만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교회에 있어서의 성찬상은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 강단 위에 다 올라오지는 못했지만, 의미상으로는 이 성찬상을 중심으로 쭉 둘러서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그런 의미를 살리고자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생각함에 있어서 반드시 이 성례적인 교회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쭉 둘러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는 바로 그 자체가 교회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교회는 곧 선교라고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결과 첫째도 선교요, 둘째도, 셋째도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모이는 교회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흩어지는 교회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모이지도 않고 어떻게 흩어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에서 열까지 선교만을 생각하며 강조하는데 그 선교의 힘, 그 자원은 어디에서 공급하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의 강성일 선교사도 며칠 후에 돌아옵니다 만은 선교사에게 안식년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밧데리에 힘이 다 빠져나갔으니 다시 충전을 해서 돌아가야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지에서 선교를 하다보면 신앙고백이나 성례, 신비로운 은혜에 대한 것은 다 잃어버리고 그저 구제하고 돕고 봉사하며 깨우치는 것만을 생각하고 힘을 쏟다보면 교회가 뭐냐고 할 때 교회는 구제하는 곳이 되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뭐냐하는 것도 돕는 것이다 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고 보면 교회는 없어지고 구제기관만 남는 것입니다.
일본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지난여름 제가 일본에 갔을 때에 일본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제가 일본에 언제 교회가 있어 보았느냐는 말을 한바 있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기에 그 이유를 차곡차곡 설명해 나갔더니 "소우데스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처음 교회를 시작한 분들이 예수처럼 살아 보겠다고 하여 그저 구제만 하려고 했었고,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왔었기 때문에 교회는 없고 구제기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일본에 있는 교회가 3천여 개인데 교인의 평균 숫자가 30명이니 알만하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가끔 일본 교회의 목사님들이 유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 후 저의 방에 들어와서는 손을 잡고는 우는 것입니다 우는 이유는 우리 일본이100년이나 먼저 복음을 받았는데 왜 이럴까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참 설명을 하면 역시 "소우데스네"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깊이 생각할 것은 선교만을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교회 될 때 교회가 확장되면서 선교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와 교회의 지상 명령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교회 그 자체가 선교와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네 번째는 인스티튜셔널 처치(Institutional Church), 즉 학원적인 교회입니다. 이는 교회를 성경 공부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요즈음도 보면 교회가 별것인가 성경 공부하면 교회이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지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경 공부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공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는 아닙니다. 일본 사람들이 성경 공부하는 것은 좋아해서 열심히들 성경 공부는 하는데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합니다. 그 때문에 일본에는 교회는 적지만 기독교에 관한 서적은 우리의 10배이상 팔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생각만 많고 가슴은 싸늘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것이 교회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요즈음도보면 성경 공부한다며 이것저것 다하고도 또 무엇 없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그럴 때이면 이제 그만하고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배움이란 하나 배워서 실천함으로써 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책상머리에 앉아서 배우고 또 배우겠다고 만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배우고 실천하고 기도하고, 또 배우고 실천하고 또 기도하고 이렇게 반복되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책상에 앉아 책만 뒤지는 것은 정말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가 그리스도를 보다 체계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 공부를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봉사하는 일과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리하여 사회, 정치, 노동, 인권 문제 등등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문제들을 계속 교회가 다루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여당도 야당도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까? 내 생각에는 그것이 옳은 것 같아도 어느 쪽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쓰실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때로는 바벨론의 왕을 쓰기도 하시고, 고레스 왕을 쓰기도 하셨습니다.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백성을 놓아 보내는 명을 받은 것뿐 하나님을 섬기거나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사야 45:1 말씀에 보면 고레스 왕은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극단적인 말씀을 드린다면 악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더 악한 사람을 쓰기도 하신다는 것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가부를 놓고 너무 간단하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주실 지 우리는 묵묵히 기도하며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하고 복을 받아 은혜를 입게 되면 착하고 진실한 귀한 사람을 통해 역사 하게 하실 것이고, 무엇인가 아직도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더 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사회 문제는 우리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기도는 해야 하겠습니다 만은 봉사나 사회 참여가 곧 교회라고 하는 생각은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결국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이며 그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고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으로서 우리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친히 많은 수고를 하시면서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위로할 자를 위로하시고 책망할 자를 책망하시며 가르칠 자를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구원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교회라고 하는 신령한 공동체로 성육신 되어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역사는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사귀고, 만나며, 친교하고 봉사하십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될 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신다는 것인데, 이것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다'라고 규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소가 뿔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뿔이 있다고 다 소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봉사하십니다. 그러나 봉사한다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시고 살아 역사 하시면서 동과 서, 윗사람과 아랫사람, 남과 여가 서로 담을 헐고 친교하며 화목케 하십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봉사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병원을 지어서 불쌍한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고아원을 지어서 불쌍한 어린이들을 돌아보며, 한 사람을 보내어 다른 한 사람을 위로하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능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케리그마(kerygma), 코이노니아(koinonia), 디아코니아(diakonia)의 세 가지로 말하는 것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봉사한다는 의미에서 그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하는 일이지 이것이 곧 교회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비로운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하는 이 말속에 오묘하고 신비로운 교회의 본질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 가운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요, 우리는 그 몸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합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머리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가 둘이 될 때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머리가 되려는 것으로 저 사람이 머리가 되고, 내가 머리가 되고 하여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며 우리는 다 지체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하시던 일을 교회가 지금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머리로서 친히 책임을 지시고 영광도 또한 받으십니다. 그런가하면 지체는 여럿이며 각각 그 기능이 다릅니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눈은 눈대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연합하며 서로를 돕습니다. 만약 손이 발을 업신여기거나 발이 손을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지체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 같이 서로 서로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상합의 관계가 자유롭게 유지되지 않으면 걸어 다닐 수도 없고, 물건을 쥘 수도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머리와 지체와의 수직적 관계와 지체와 지체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조화를 이루어 나가게 될 때,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온전하게 발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눈의 기능을 하면 될 뿐 발을 나무라거나 손의 기능을 하겠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손이 아프면 발도 아프고, 발이 아프면 머리도 아픈 것이 결국은 온 몸이 다 쑤시고 아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보면 물고기 두 마리가 한 연못 안에서 자라고 있는데 한 마리가 생각할 때에 다른 한 마리가 아주 보기가 싫어서 저놈 죽었으면 하고 자꾸 싸우며 미워했더니 그 한 마리가 결국은 죽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은 한 마리가 생각하기를 이제는 이 넓은 연못 속에 나 혼자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며 좋아라 라고 헤엄을 치며 다녔습니다. 그런데 내가 죽인 그 물고기가 썩어서 물을 더럽히는 바람에 할 수없이 저도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기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기체는 저가 살아야 나도 살고, 저를 죽이면 나도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라는 말입니다. 지체에는 각각 맡겨진 분량이 따로 있고 기능이 따로 있으므로 그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은 계속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계속 성장해 나가야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생명의 주장자가 되십니다. 따라서 모든 지체는 그를 섬기는 가운데 계속성장해 나가야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할 때에 교회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본래적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요, 우리는 그의 지체며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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