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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없는 양(마태복음 9 : 36 - 38)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조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시고 그리고 우리 인간들을 양에다 비유하셨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이 비유라고 하는 것의 성격은 앞에서도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쉽게 경험하거나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그들이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소재가 청중의 편에서 "아니오"하게 되는 것이라면 이 비유는 사실상 그 의미의 바른 전달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해산하는 여인이 해산을 하고 나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그 기쁨 때문에 열 달 동안 모든 고생과 생명을 걸었던 그 아픔의 마지막 순간도 일시에 다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이 말씀을 가장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긴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앞에 놓고는 몇 달을 두고 이것을 설명해 주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인 남자들의 경우에도 아는 것 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것이지 여인들이 직접 체험하며 기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따라서 그 비유는 해산한 경험이 있는 여인이 아니고서는 그 뜻을 바로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목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경험과는 먼 것이므로 많은 설명을 통하여 상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상상의 농도가 비유의 소재인 경험에 도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이렇게 낳은 양을 본 일도 없고, 물론 내가 목자가 되어 본 적도 없으며, 또한 목자 없는 양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실상을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목자나 양의 이야기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는 매우 익숙한 경험이요, 일상 생활 속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한 마디로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게 되면 당장에 알아차리고 "그래, 맞았어! 바로 그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저들이 조상적부터 유목 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자신들 역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실질적인 경험을 전혀 가져보지 못한 입장에서 부득불 옛날의 저들에게로 돌아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전도하신 것을 보면 주로 성을 두루 다니시면서 전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갈릴리나, 가버나움, 특별히 많은 사람이 모이는 예루살렘의 곳곳에서 전도하신 것이 사실입니다마는 그러나 천천히 이곳 저곳의 촌락을 두루 다니시면서 전도하셨고 때로는 들과 바닷가로 나가시어 거기까지 따라온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신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따라다녔다는 것을 성경의 여러 기록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저편으로 가시면 저편으로 사람이 모여들고 이편으로 오시면 이편으로, 들녘에 앉으시면 들녘으로 모여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모시고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보아하니 목자가 양을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찾아 헤매고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천 명이 넘는 청중을 앞에 놓고 말씀을 전하셨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우물가에 나온 한 여인을 놓고 1대 1의 개인 전도를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행동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루만져 치료해 주심으로 저들을 고통과 놀림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과 행사 자체도 모두가 다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신 그 모든 행사와 기적이 곧 말씀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고 만져 주시며, 치료해 주실 때의 심정이 어떠하셨느냐 하면 목자의 심정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마음, 그러한 눈으로 보실 때에 저들 무리들이 마치 목자가 없는 양들과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엾고 불쌍한 것이지요.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괴로워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 얼마나 불쌍한 것인가!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고 근본이 된다는 것이요, 그러한 사랑으로 역사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전문적인 해석을 드린다면 민망히 여겼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에스프랑스니데'라고 하는데 이 말은 창자를 의미하는 '스프랑나'에서 나온 하나의 생리학적인 용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민망히 여긴다는 '에스프랑니스데'는 창자가 뒤틀려 아프다는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여 "창자가 끊어지듯이 아프다"고 하는 그러한 아픔을 의미하는 것이 "민망히 여겼다"는 말의 원뜻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대상을 보실 때에 마음만 아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은 매우 즉각적이며 이 사람을 도와주면 나중에 쓸 만한 인물이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등에 상관없이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돌보시고 치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봉사도 전후좌우를 따지고 살핀다면 이미 봉사의 의미는 없어진 것이며 어디까지나 그런 마음으로서는 봉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봉사는 항상 직감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마음이 뜨거워지는 바로 그 순간에 즉각적인 행동을 함으로 거기에서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갔다가 내일 다시 오시오, 어디 한번 생각 좀 해봅시다"한다면, 그것은 이미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창자가 아프신 것입니다. 이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범죄한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렘 4: 19) 혹은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눈물로 부르짖으며 아파하는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실로 창자가 끓어지는 것 같은 아픈 괴로움이 느껴지고 따르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아파하는 마음이 우리 전도하는 사람의 진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마음 없이는 전도할 수가 없으며, 또한 이 마음 없이 전도해 보았댔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음 없이 봉사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있었어요. 이것은 결코 단순한 기분이나 순간적인 동정이나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뜨거운 열정과 함께 영혼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며, 아주 몸까지 아프게 되는 그러한 전체적인 고통이 수반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심적인 강한 충격을 받게 되면, 그 때엔 육체적인 몸까지도 상하게 되어 소화가 안 되는가 하면 때로는 고혈압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심장이 멎게까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들이 다 마음에서 비롯된 아픔이 육체의 고통으로 나타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 때문에 흔히들 보면 어려운 형편을 당한 이 후에 그것이 속병이 되어서는 시들시들 앓다가 그 길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아픔은 마음에서 몸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떤 상처 입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의 지금 처지가 너무도 불쌍하여 내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해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기의 어린 자식이 앓아 누워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때의 부모의 심정은 "저것이 잘못 되기보다는 내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인데 이러한 마음을 자기 자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특별히,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으로 죽어 가는 심령들을 볼 때에도 이렇게 뜨겁고 아픈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가 누구인 줄을 몰라 그대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를 향한 안타까운 심정에서 마음이 괴롭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경험이 있을 때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시고 돌보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피곤이나 배고픔도 잊으신 채 헌신적인 수고로 병들고 나약한 자들을 치료하시며 위로의 손길을 늦추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기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시고, 모여드는 많은 사람들은 양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많은 사람들은 익은 곡식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라시며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목자 없는 양"이란 어떤 상태의 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여기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목자 없는 양은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그 옛날의 원시 유목 문화권에서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로서 이는 양을 몰고 다니던 목자가 죽게 되는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목자가 오랜 기간 동안 수십, 수백 마리씩의 양을 몰고 다니면서 천막을 쳐가며 양을 치게 되는데 그러는 동안에 갑자기 심한 병이 걸리거나 쇠약해지게 되면 속수무책이 되어 그대로 죽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때부터 그 양 무리들은 갈 곳을 몰라 헤매게 될 뿐만 아니라 이리 저리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가엾고도 위험한 상태입니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양들! 그래서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양들! 이 양은 착하고 순한 대신에 어리석기도 하여서 불과 얼마 멀리 가지 않았어도 혼자서는 제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그 대신 목자가 있어서 한 마리만 데리고 앞서가면 줄줄 순하게 따라오는 것이어서 목자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많은 양을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양은 목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없어졌으니 배는 고프고 먹기는 먹어야겠느니 다 흩어질 수 밖에요. 그리하여 이곳 저곳으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게 되었으니 이것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란 말입니다. 이제 어느 벼랑 위에서 풀을 뜯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게 될는지 아니면 맹수의 밥이 될 수도 있는 처절한 신세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 모인 무리들을 이와 같이 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지도자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향 없이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이러한 처지가 너무도 가엾어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마태복음 14장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는 들녘에 모여든 5천 명이 넘는 무리를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불쌍히 여기시고 영적으로 배고파하는 저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며 육적인 굶주림까지 채워 주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눈으로 볼 때 바른 교훈, 곧 생명의 말씀을 찾지 못하여 헤매는 모습이란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목이 마르다고 하여 아무 물이나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썩은 물은 물론이요 어쩔 수 없어서 바닷물이라도 마시게 된다면 이제는 그 짠맛 때문에 목은 더욱 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청량 음료다 뭐다하여 마실 것들이 많습니다마는, 이것 저것 다 마셔 보아도 제 경험으로는 냉수보다 좋은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일 필요하고 좋은 것이 냉수인데 이 것을 마시지 못하고 바닷물 같은 것을 마시게 되면 마셔도 마셔도 목마름은 더해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하여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철학을 공부하고, 랍비로부터 교훈을 배우며 바리새인의 설교를 들어봐도 거기에서는 아무런 시원함도 찾지 못한 채 계속 헤매고 다녀야 할 뿐 그것으로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곧 배고픔으로, 배가 고프기에 이제는 독초라도 먹게 되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병이 들어 죽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목자 없는 양의 위험한 여정과 그 불쌍한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로 눈앞의 무리를 보실 때마다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결국에는 하나 하나 흩어져서 고독하고 불안해집니다.
문둥병 환자,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그 모든 병자들은 고독합니다. 여러분, 혹시 환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환자로서 침상에 누워 있게 되면 그 때엔 몸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마음이 아파요. 마음이 아픈 가운데에서도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은 고독이라는 아픔입니다. 간혹 건강한 사람들은 병 문안을 하면서 이런 저런 말로 위로를 한다지만 그 어느 말도 위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위로된다면 차라리 옆자리에 있는 환자가 주는 위로가 크지요. 저는 나의 동지이니까 말입니다. 내가 아픈가 하면 저도 아프고 나만 고독한 것이 아니라 저도 고독한 것이기에 그것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고독이라는 것은 묘한 것이어서 사람마다 내가 가진 이 고민은 나만이 안고 있는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입장에 처해 있다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 긍정만으로도 이미 고민의 50%는 해결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좀더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나보다 더 어려운 문제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는 긍정입니다. 이렇게만 생각을 하게 되면 이제는 고민의 70%는 해결이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사람들이나 고민에 떠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같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 마음은 온 세상에서 나 하나밖에 모른다"고 하는, 그리하여 자기의 생이 먼 사막에 홀로 던져져 있는 것 같은 생각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그 고독의 아픔은 더욱 커져 가는 것이지요.
요한 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외로운 한 사람을 위로하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자그마치 38년 된 중풍병자가 지금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 있습니다. 38년을 누워 있었다면 이는 참으로 굉장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모도, 형제도 다 떠나가 버리고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몸으로 이렇게 내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저가 하는 부탁의 말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비참한 이야기일 수가 없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나이다! 그러니 낫든 낫지 않든 저 못에 물이 동할 때에 나를 좀 끌어다가 한번 들어나 가보게 해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 못에 대한 미신 같은 전설을 믿고는 그 마지막 소원 하나를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도 그를 도울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자니 이 사람의 고독이 오죽 하였겠습니까? 여기에서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헬라 원문으로 표현하자면 '욱 엑코 안드로포스'로 이를 영어로 직역하면 아이 해브 낫 어 맨(I have not a man), 나는 한 사람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이면 되겠는데 그 한 사람이 없어서 고독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처절하게 고독해 하는 이 사람을 찾아가시어 만나 주시고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몸만 병신이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생각도 병신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낫고자 하느냐? 물으실 때에 예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예, 낫고자 합니다. 제발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라는 간단한 애원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기어이 물에 한번 들어가게 해달라는 대답밖에 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미신에 매여 있는 어리석은 그를 조금도 꾸짖지 아니 하시고 그 고독한 자에게 필요한 단 한 사람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흩어지기 마련이요, 목자 없는 양은 외롭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저들 모두가 하나같이 고독해 하고 있구나! 어느 곳에서도 위로 받을 길이 없는 저 무리들! 그래서 이리 저리 헤매며 유리(遊離)하는 양들의 모습이 되었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하여 가만히 움츠리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엔가 목자가 있기를 바라는 걸음으로 헤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 목자는 결코 삯군이 아닌 목자로서, 나의 길을 전적으로 맡기고 마음놓고 먹으며 따라다닐 수 있는 그런 믿을 만한 목자이어야 하겠는데 그 목자를 찾지 못해 이렇게 헤매며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이 의심하는 것처럼 괴로운 병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식사때 마다 독약이라도 넣지 않았나 은수저로 음식을 감별하는가 하면 쇼펜하우어(Schopenhauer) 같은 철인도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먼저 개에게 먹어 보게 한 후 괜찮으면 그 때에야 자기가 먹었다는 것이니 그렇게 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임을 전제합니다. 이는 우리가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도 청결하건 불결하건 간에 적어도 독약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먹게 되는데 이러한 행위의 모두가 기본적인 이 믿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생활에 있어서 전적으로 믿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생명에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는 교수와 학생, 교역자와 교인 사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전하는 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거기에 성장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리 저리 따지면 들을 것, 안 들을 것 구분하고 앉아 있다면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찾고 있는 목자는 어떤 목자입니까? 그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목자이어서 그저 그 분의 말이라면 검은 것을 두고라도 희다하면 희고, 검다면 검은 것으로 일단은 생각을 따르고 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목자! 바로 그러한 목자를 지금 찾고 있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목자를 의심하는 양이라면 그 양은 그 목자의 양이 아닙니다. 그 목자의 양이라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이리 가라면 이리로, 저리 가라면 저리로 갈 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지팡이로 한 대 때리더라도 "예, 알겠습니다"하고 더 잘 따라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어디로 인도하든, 무엇으로 인도하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란 말입니다.
그런데 참 목자를 찾아 애타게 헤매었으나 못 만나게 되면 이제는 우상을 만나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헤매다가 저들대로 기껏 만난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보는대로 무슨 큰 행사나, 큰 공장의 준공식 때에 보면 기껏 돼지 머리나 쭉 차려 놓고 그 앞에서 내노라는 사람들을 선두로 어떤 때에는 몇 백, 몇 천 명이 넓적 넓적 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그 D쵹TXT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어떤 신앙을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어쨌든 답답하니까 그렇게 라도 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 없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하셨는데 이는 영적으로 볼 때 지금 당장에 복음을 전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영적으로 보아 가장 복음이 잘 전달되어지는 때란 언제인가 하면은 그것은 바로 육신적으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병든 몸이에요. 그러기에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이제는 손을 들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바로 이러한 순간이 무르익은 곡식이 추수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은 시기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그저 한 마디만 해주어도 알곡으로 추수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절박한 순간이 영적으로는 추수가 가능한 무르익은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비로소 겸손이 고개가 수그러져서 영적인 갈구를 하고 있다는 뜻이요, 이것을 시간적으로 볼 때에는 추수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의 추수기란 바로 뒤쫓아 오는 우기(雨期)를 의식하면서 시각을 다투어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포도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 햇빛을 몇 시간 더 받느냐 덜 받느냐에 따라 그 맛과 당도에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도를 며칠만 더 햇빛을 보게 놓아두면 그 맛이 그렇게도 좋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먹는 과일들은 모두가 다 미리 따서 설익은 것이거나 아니면 운반 과정에서 몸살을 하면서 익은 것이어서 결국은 제 맛이 아닌 가짜만 먹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달려 제대로 완전하게 익은 과일이란 시간을 다투어 처리하지 않으면 그대로 물러 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추수할 때가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즉시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그대로 썩어 죽어지고 말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르익은 것을 보는 순간 빨리 거둬들여야겠다는 것입니다. 이 때가 지나면 바로 우기가 오겠으니 그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 이 마지막 기회에 빨리 거두어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마태 복음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한 포도원의 형편을 보면 이제 포도원 주인이 품군을 얻어 포도원으로 들여보내게 되는데 이른 아침에 들여보내는 것은 물론 12시, 심지어 일할 시간이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후 5시까지라도 품군을 사서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하는 주인의 다급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거두어 들여야 하겠어요! 이것이 주인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무르익은 곡식에 비유하시어 추수할 일군들을 구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래서 안심하고 어디까지나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목자이십니다. 이러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목자의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당면 문제는 목자가 없기에 겪는 어려움이니 그것을 담당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한 것은 일군들을 키워라, 가르치라, 혹은 조직하라가 아니고 일군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감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택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 역사의 일환이지 교육에 의해서 일군이 나오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보내셔야 하는 것이지 그 외의 어떤 교육이나 조직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감으로 일하는 일군인 거기에 카리스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기도의 제목이 있고 축복된 새로운 만남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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