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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렘4: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이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실패하기를 원해서 실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도 성공하기를 원했고 노력했건만 성공보다는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또한 같은 실패를 반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더욱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불행이 우리에게는 번번이 있습니다. 거듭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 실패의 악순환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실패의 원인을 아는 것은 성공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대체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본인 스스로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부인하고 싶은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바로 알고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빠른 길입니다. 패인을 제거하지 않고 그저 막연히 다시 시도하고 또다시 시도하여 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해서 요행히 성공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실패의 늪에서 계속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많은 사람들은 우선 환경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고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실패의 원인을 둡니다. 즉, 아무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일 경우에 자기의 나쁜 성격이 자주 노출되면, 자기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내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걸핏하면 남편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못나졌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때가 되어서 주름살도 생기고 흰 머리가 나는 것을, 상대방 때문이라고 어거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종속 인간(從屬人間), 또는 부속 인간(附屬人間)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라는 정체는 전혀 없고, 다른 사람이 하자는 대로 내가 변하고 환경 따라 변하여 나의 존재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쓰리고 아프고 찢어지는 괴로움이 있어도 원인을 나 때문이라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능하기만 하면 실패의 원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잠시라도 편하려고 하는 책임 전가(責任轉嫁) 심리를 일명 가인 콤플렉스(Cain Complex)라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담의 두 아들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아벨은 정성을 다하여 믿음으로 드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음으로 하지 않고 아마도 형식적으로 동생이 한다니까 그저 따라서 제사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럴 때에 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얼른 회개하고 정성을 기울여서 제사를 다시 드렸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사가 상달되지 않은 원인은 동생 때문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는 시기와 질투로 마음 끓이다가 마침내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잘못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인류가 지은 두 번째 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으로 지은 큰 죄가 바로 가인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잘못까지도 다른 사람이 잘되기 때문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패는 계속되고 악순환은 그칠 사이 없이 되풀이되어서 구제 불능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농사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도시에 살고 있기에 농사하는 이야기는 먼 이야기로 들리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아마도 전혀 모를 것 같아 걱정입니다. 농촌에서 살아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농사에 성공하려면 몇 가지 기본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땅이 좋아야 하고, 둘째는 종자가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종자가 좋지 못하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정성어린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화초를 하나 가꾸더라도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대로 키울 수 없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적당한 물과 바람과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의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많은 것을 추수할 수가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토양과 씨앗은 좋습니다.
문제는 수고하는 농부에게 있습니다. 그가 게을러서 묵은 땅을 갈지 않아 잡초와 가시가 우거졌습니다. 시골에 가 보면 정말 어떤 밭은 깨끗하게 김을 매어 밭도랑까지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어떤 밭은 잡초가 우거져서 옛 사람들의 문자대로 늑대가 새끼치게 될 지경으로 어지러운 밭이 있습니다. 본문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4: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기는 하되 잡초가 많은 묵은 땅에는 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농사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신앙 생활에 그대로 옮겨 보면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말씀이기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토양도 좋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기 전에 이미 잡초가 우거져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많이 하며 여기저기 다니면서 봉사도 열심인데 신앙이 자라지 않고 열매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묵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갈지 않고 묵은 땅에 잡초가 있는 그대로 씨를 뿌렸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먼저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묵은 땅에 그대로 씨를 뿌리면 첫째는 씨앗 손실이요, 둘째는 노동력이 손실되고, 셋째는 거두는 열매가 없어서 소망 손실이 있습니다. 뿌렸으면 가을에는 당연히 열매를 거두어야 하는데, 거둘 것이 없으면 얼마나 낙심하고 허탈해 집니까?
그러면, 묵은 땅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버려둔 땅입니다. 게으른 농부에 의해서 오랫동안 버려둔 땅을 말합니다. 이 땅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가시덤불이 무성해져 마지막에는 이리떼가 출입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없어야 할 것이 있게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될 딴 일을 하게 됩니다. 가령 학생들은 그 시절에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해야 할 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현대인들은 옛날에 비하면 모든 것이 상당히 편해졌습니다. 얼마 전에 백화점 지하 식품부를 둘러보았더니 정말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각종 음식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어 몇 가지만 사면 집안에서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식탁을 차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부들이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연구하고 만들어 정성이 깃들여야 할 식탁이 백화점에서 즉석으로 해결되니, 주부들의 남는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던 사람들이 할 일이 없으면 병원에 가게 되고, 아니면 가서는 안될 곳을 가게 되며, 배워서는 안 될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가정 문제, 사회 문제가 일어나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둘째, 묵은 땅은 농부가 오랫동안 무관심해서 내버려둔 땅입니다. 게으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잡초가 생기고, 일단 생긴 잡초는 속도가 빠르게 번식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성 습관으로 습관화된 옛 관성입니다. 버려짐의 관성은 자유 분방함이요 굴레 벗은 망종이요 게으름이요, 불 신앙과 의심과 증오와 이기심과 허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이 그 속에 깊이 들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좋은 곡식은 잘 심고 열심히 가꾸어도 잘 되기가 힘들지만 잡초는 심지 않아도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수년 전에 월남전이 벌어졌을 때에 잘 아는 장로님께서 사업에 실패하여 월남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고 하시면서 2년 동안 수고를 많이 하고 돌아오신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친한 몇 분이 환영회를 한다고 모여서 식사를 나누는데 제가 한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2년 동안 그 곳에서 생활하시면서 월남말 배운 것이 있으면 한 마디 해 보시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은 무척 난처해하시면서 몇 마디 배운 것이 상소리 뿐이라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좋은 말은 배우려고 귀를 기울여도 잘 안 되지만 못된 말은 가만있어도 배워집니다. 학생들도 영어 단어 외기는 그렇게도 힘이 드는데, 팝송 가사는 쉽게 유창하게 외워지니 어떡합니까? 잡초란 원래 그렇습니다. 묵은 밭 만들려고 노력한 적 없는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저절로 묵은 밭이 되듯이, 나쁜 사람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나쁜 길을 가게 되고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묵은 땅이란 고질화된 병리적인 고집을 말합니다. 해묵은 고정 관념, 편견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지 못합니다. 경험이란 사람을 여유 있게 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가진 경험에서 얻은 그 무엇으로 고집과 선입관이 생겨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가정에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데, 외아들이 공부를 못했습니다. 이 아들은 공부 못하는 이유를 아버지께로 돌렸습니다. 아버지가 능력이 없어 학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게다가 술까지 자주 마시니 어찌 공부를 잘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며 아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아들은 교회를 거부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술이 취해서 돌아온 아버지를 어머니는 반갑게 맞이하면서 얼마나 시장하시냐고 언제나 그러하시듯이 남편을 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배가 고플 때에 밥을 잡수셔야지 술을 마셔서 되겠느냐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밥은 외상을 주지 않지만 술은 외상을 주기 때문에 일은 없고 배가 고프면 술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던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어려운 아버지의 형편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고집과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묵은 땅을 갈아 좋은 말씀이 박힐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넷째, 묵은 땅은 가증한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증(可憎)은 위선이요 거짓된 진실입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가증함이 큰 문제입니다. 거룩한 것으로 위장하고 교회를 위하여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미명하에 의로운 척 선한 척하는 가증함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그 속에 무서운 악이 있다는 말입니다. 잡초와 가시덤불이 있는 묵은 땅은 아무리 씨를 뿌려도 앞에서 열거한 몇 가지 이유로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이런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잡초와 가시덤불이 있는 곳에 언제까지 씨를 뿌리겠느냐, 이제 어리석음을 멈추고 실패의 원인을 바로 알아 묵은 땅을 갈아 엎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묵은 땅에 씨뿌리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고 옥토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알았으니 깊이 갈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뿌리깊은 욕심과 편견이 제거될 것입니다. 또한 잃어버린 관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씨앗 외에는 아무것도 자리잡을 수 없도록 깨끗하고 단순한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깨끗한 옥토만이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일에 내가 못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우리가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불태우시어 누구도 이 불을 끌 자가 없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물론 이 때에는 큰 아픔이 있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랑일 것입니다. 불을 질러서라도 깨끗하게 하여 다시 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내가 결단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결단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굳은 땅은 깊이 갈고 잡초는 뽑아 불태워서 옥토가 되면 우리가 듣는 말씀이 옛 말씀이라도 다시 싹이 날 것입니다. 새 옥토에 뿌려진 새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렘4: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이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실패하기를 원해서 실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도 성공하기를 원했고 노력했건만 성공보다는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또한 같은 실패를 반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더욱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불행이 우리에게는 번번이 있습니다. 거듭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 실패의 악순환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실패의 원인을 아는 것은 성공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대체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본인 스스로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부인하고 싶은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바로 알고 원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빠른 길입니다. 패인을 제거하지 않고 그저 막연히 다시 시도하고 또다시 시도하여 같은 방법으로 되풀이해서 요행히 성공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실패의 늪에서 계속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많은 사람들은 우선 환경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렇고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실패의 원인을 둡니다. 즉, 아무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일 경우에 자기의 나쁜 성격이 자주 노출되면, 자기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내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걸핏하면 남편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못나졌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때가 되어서 주름살도 생기고 흰 머리가 나는 것을, 상대방 때문이라고 어거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종속 인간(從屬人間), 또는 부속 인간(附屬人間)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라는 정체는 전혀 없고, 다른 사람이 하자는 대로 내가 변하고 환경 따라 변하여 나의 존재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쓰리고 아프고 찢어지는 괴로움이 있어도 원인을 나 때문이라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능하기만 하면 실패의 원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 잠시라도 편하려고 하는 책임 전가(責任轉嫁) 심리를 일명 가인 콤플렉스(Cain Complex)라고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담의 두 아들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아벨은 정성을 다하여 믿음으로 드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음으로 하지 않고 아마도 형식적으로 동생이 한다니까 그저 따라서 제사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럴 때에 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얼른 회개하고 정성을 기울여서 제사를 다시 드렸어야 하겠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사가 상달되지 않은 원인은 동생 때문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고는 시기와 질투로 마음 끓이다가 마침내 동생을 죽이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잘못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인류가 지은 두 번째 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으로 지은 큰 죄가 바로 가인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자신의 잘못까지도 다른 사람이 잘되기 때문이라고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패는 계속되고 악순환은 그칠 사이 없이 되풀이되어서 구제 불능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농사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도시에 살고 있기에 농사하는 이야기는 먼 이야기로 들리고, 특히 젊은 사람들은 아마도 전혀 모를 것 같아 걱정입니다. 농촌에서 살아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농사에 성공하려면 몇 가지 기본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땅이 좋아야 하고, 둘째는 종자가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종자가 좋지 못하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정성어린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화초를 하나 가꾸더라도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제대로 키울 수 없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고 있습니다. 넷째는 적당한 물과 바람과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이상의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많은 것을 추수할 수가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토양과 씨앗은 좋습니다.
문제는 수고하는 농부에게 있습니다. 그가 게을러서 묵은 땅을 갈지 않아 잡초와 가시가 우거졌습니다. 시골에 가 보면 정말 어떤 밭은 깨끗하게 김을 매어 밭도랑까지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어떤 밭은 잡초가 우거져서 옛 사람들의 문자대로 늑대가 새끼치게 될 지경으로 어지러운 밭이 있습니다. 본문은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4: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기는 하되 잡초가 많은 묵은 땅에는 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농사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신앙 생활에 그대로 옮겨 보면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말씀이기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토양도 좋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기 전에 이미 잡초가 우거져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많이 하며 여기저기 다니면서 봉사도 열심인데 신앙이 자라지 않고 열매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묵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갈지 않고 묵은 땅에 잡초가 있는 그대로 씨를 뿌렸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먼저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묵은 땅에 그대로 씨를 뿌리면 첫째는 씨앗 손실이요, 둘째는 노동력이 손실되고, 셋째는 거두는 열매가 없어서 소망 손실이 있습니다. 뿌렸으면 가을에는 당연히 열매를 거두어야 하는데, 거둘 것이 없으면 얼마나 낙심하고 허탈해 집니까?
그러면, 묵은 땅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버려둔 땅입니다. 게으른 농부에 의해서 오랫동안 버려둔 땅을 말합니다. 이 땅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가시덤불이 무성해져 마지막에는 이리떼가 출입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없어야 할 것이 있게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될 딴 일을 하게 됩니다. 가령 학생들은 그 시절에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해야 할 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현대인들은 옛날에 비하면 모든 것이 상당히 편해졌습니다. 얼마 전에 백화점 지하 식품부를 둘러보았더니 정말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각종 음식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어 몇 가지만 사면 집안에서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식탁을 차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부들이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 연구하고 만들어 정성이 깃들여야 할 식탁이 백화점에서 즉석으로 해결되니, 주부들의 남는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던 사람들이 할 일이 없으면 병원에 가게 되고, 아니면 가서는 안될 곳을 가게 되며, 배워서는 안 될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가정 문제, 사회 문제가 일어나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둘째, 묵은 땅은 농부가 오랫동안 무관심해서 내버려둔 땅입니다. 게으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잡초가 생기고, 일단 생긴 잡초는 속도가 빠르게 번식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성 습관으로 습관화된 옛 관성입니다. 버려짐의 관성은 자유 분방함이요 굴레 벗은 망종이요 게으름이요, 불 신앙과 의심과 증오와 이기심과 허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이 그 속에 깊이 들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좋은 곡식은 잘 심고 열심히 가꾸어도 잘 되기가 힘들지만 잡초는 심지 않아도 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수년 전에 월남전이 벌어졌을 때에 잘 아는 장로님께서 사업에 실패하여 월남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고 하시면서 2년 동안 수고를 많이 하고 돌아오신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친한 몇 분이 환영회를 한다고 모여서 식사를 나누는데 제가 한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2년 동안 그 곳에서 생활하시면서 월남말 배운 것이 있으면 한 마디 해 보시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은 무척 난처해하시면서 몇 마디 배운 것이 상소리 뿐이라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좋은 말은 배우려고 귀를 기울여도 잘 안 되지만 못된 말은 가만있어도 배워집니다. 학생들도 영어 단어 외기는 그렇게도 힘이 드는데, 팝송 가사는 쉽게 유창하게 외워지니 어떡합니까? 잡초란 원래 그렇습니다. 묵은 밭 만들려고 노력한 적 없는데도 조금만 방심하면 저절로 묵은 밭이 되듯이, 나쁜 사람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조금만 방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나쁜 길을 가게 되고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묵은 땅이란 고질화된 병리적인 고집을 말합니다. 해묵은 고정 관념, 편견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지 못합니다. 경험이란 사람을 여유 있게 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가진 경험에서 얻은 그 무엇으로 고집과 선입관이 생겨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가정에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데, 외아들이 공부를 못했습니다. 이 아들은 공부 못하는 이유를 아버지께로 돌렸습니다. 아버지가 능력이 없어 학비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게다가 술까지 자주 마시니 어찌 공부를 잘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시며 아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아들은 교회를 거부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늦게 술이 취해서 돌아온 아버지를 어머니는 반갑게 맞이하면서 얼마나 시장하시냐고 언제나 그러하시듯이 남편을 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배가 고플 때에 밥을 잡수셔야지 술을 마셔서 되겠느냐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밥은 외상을 주지 않지만 술은 외상을 주기 때문에 일은 없고 배가 고프면 술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던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어려운 아버지의 형편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고집과 편견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묵은 땅을 갈아 좋은 말씀이 박힐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넷째, 묵은 땅은 가증한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증(可憎)은 위선이요 거짓된 진실입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가증함이 큰 문제입니다. 거룩한 것으로 위장하고 교회를 위하여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미명하에 의로운 척 선한 척하는 가증함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그 속에 무서운 악이 있다는 말입니다. 잡초와 가시덤불이 있는 묵은 땅은 아무리 씨를 뿌려도 앞에서 열거한 몇 가지 이유로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이런 땅을 기경하라는 것입니다. 잡초와 가시덤불이 있는 곳에 언제까지 씨를 뿌리겠느냐, 이제 어리석음을 멈추고 실패의 원인을 바로 알아 묵은 땅을 갈아 엎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묵은 땅에 씨뿌리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고 옥토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알았으니 깊이 갈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뿌리깊은 욕심과 편견이 제거될 것입니다. 또한 잃어버린 관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씨앗 외에는 아무것도 자리잡을 수 없도록 깨끗하고 단순한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깨끗한 옥토만이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일에 내가 못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우리가 제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불태우시어 누구도 이 불을 끌 자가 없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물론 이 때에는 큰 아픔이 있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랑일 것입니다. 불을 질러서라도 깨끗하게 하여 다시 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내가 결단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결단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굳은 땅은 깊이 갈고 잡초는 뽑아 불태워서 옥토가 되면 우리가 듣는 말씀이 옛 말씀이라도 다시 싹이 날 것입니다. 새 옥토에 뿌려진 새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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