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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 16절~19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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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619)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불교는 초상집과 같고, 유교는 제삿집과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비교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축제와도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과 같고 우리 믿는 성도들은 신부와 같으므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만남이란 축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심령들이 그리스도를 모신 영원한 축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부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은 금식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도가 만나는 그 축제의 시간에 슬픔이나 탄식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윌리엄 로우(William Law)는 그의 저서 '엄숙한 부르심'에서 말합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던가, 금식을 많이 했다던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던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잘 믿느냐,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두 낱말의 헬라어 어원은 같습니다. 기쁨은 내적인 것이고 감사는 외적인 것입니다. 기쁨은 그 내용이요, 감사는 형식적인 표현입니다. 그런고로 기쁨 없는 감사는 위선이며 외식(外飾)이요. 수단과 처세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쁨이 먼저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쁨이 북받쳐 오를 때, 거기에 진정한 감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는 기쁨이 없는 세대입니다. 잃은 사람은 억울해서 기쁨이없고, 얻은 사람은 더 얻지 못해서 기쁨이 없습니다. 적으면 모자라서 걱정, 많으면 지키느라고 걱정, 이래저래 기쁨이 없습니다.

믿음 없이는 기쁨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쁨 없는믿음은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기쁨과 믿음은 언제나 함께 다니는 동반자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있다고 하면서 도무지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울상이고, 늘 걱정 불만으로 우중충한 그리스도인들---그래서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무신론자인 니체는 기독교를 경멸하는 투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나도 그들의 구원을 믿겠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말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 없고, 늘 은혜를 말하지만 은혜 받은 사람의 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살면서 감사가 없고, 하나님의축복을 받아 누리면서 축제의 감격과 기쁨이 없다면, 이는 곧 그리스도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훼방하는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교회란 한 마디로 말해서 기쁨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2 :46-47)." 기쁨으로 모여 하나님을 찬미했다는 말씀입니다. 기뻐할 때에 봉사할 수 있고, 기뻐할 때에 전도할 수 있고, 기뻐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교 사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기뻐하지 않는 복음을 누구한테 전하며, 내게 감격이 없는 봉사가 무슨 열매를 맺겠습니까?

기쁨은 성령의 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없다면 성령이 떠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기쁨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기쁨,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감사의 예절은 가르치는 데, 기뻐할 수 있는 가치관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감사하라고 권고하면서 그 마음에 기뻐할 수 있는 산 진리는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쓴웃음은 있고, 억지웃음은 있고, 파렴치한 웃음은 있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 벅차 오르는 감격의 기쁨은 찾아보기 힘든 세대입니다.

기쁨에는 첫째로 물질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욕구 충족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소유와 성취에서 오는 기쁨---무엇을 가졌을 때, 소원한 바가 이루어졌을 때에야 기뻐할 수 있는 일반적인 축복관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순간적이요 일시적입니다.

둘째로 철학적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지성적인 기쁨입니다. 비록 손실이 생겼다 하더라도 더 큰 손해 입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기쁨입니다. 이를테면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 '목 부러져 죽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지' 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같은 것 말입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의 일화를 들어봅시다. 어느 날 그가 지갑을 송두리째 도둑맞았는데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많고 많은 날들 중에서 오늘 처음 도둑맞았기 때문이요, 둘째, 지갑만 빼앗기고 생명은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로는 세상에 별의 별사람이 다 있지만 매튜 헨리 자신은 도둑질하는 자가 되지 않고 도둑맞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 모두가 합리적이고 지당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지성적인 철학적 기쁨이요 철학적 감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위에 말한 두 종류의 기쁨과 다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감사와 기쁨에도 물질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차원이 다르고 그 뿌리의 깊이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에도 추수에 대한 감사, 출세에 대한 감사, 건강에 대한 감사 등의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감사의 뿌리는 사죄의 은총을 누리는 데에 있습니다. 죄 사함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간증했습니다. "나는 부하고 가난하고에 흥미가 없다. 얼마나 오래 살고 얼마나 건강하냐 하는 데에도 흥미가 없다. 심지어 천당 가느냐 지옥 가느냐 하는 것도 내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다만 내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이것만이 나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것만을 감사할 뿐이다." 이 얼마나 귀한 간증입니까? 비록 내가 무슨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제는 죄 사함 받은 사람으로서 당하는 고난이니, 거기에 기쁨의 소재와 뿌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가 주는 기쁨은 머지않아 허무와 상실의 슬픔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정으로 인한 기쁨도 어느 결에 퇴색한 추억으로 사라져 갈 것입니다. 젊음과 건강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면 머지않아 늙고 병들었을 때에는 절망적인 슬픔을 느끼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죄 받았다는 감사---이것만은 영원히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조건 붙은 감사는 다른 조건이 생길 때에 원망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상대적인 기쁨이라면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 사실만은 어떠한 상황, 어떠한 조건에서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감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박국은 부르짖고 있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여기에 기쁨의 뿌리가 있습니다. 이성적인 비판을 누르고, 인간적인 번민과 고통을 다 억제하며, 오직 믿음으로 듣고, 오직 믿음으로 생각하고, 오직 믿음으로 보고, 오직 믿음으로 깨닫고, 오직 믿음에 근거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하박국은 절대적인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기쁨입니다. 차원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온 변치 않는 기쁨이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신앙적인 감사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한 변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널 때에는 너무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그러다가 금새 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물을 주니 기뻐하지만 이번에는 배가 고프다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니까 또 기쁘다고 할렐루야 찬양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합니다. 감사했다가 원망했다가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사람들이 뭐 이모양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원망하는 사람인가---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꼭 자기한테 없는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진 것도 많은데 못 가진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대합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살펴봅시다. 가지고 있는 인형도 많고 장난감도 많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싶은 다른 것 하나만을 외곬으로 생각하면서, 없음을 원망합니다. 어른들도 바로 이런 때에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까? 가진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없는 것도 많지만 가진 것, 있는 것을 생각함으로 늘 감사가 넘칩니다. 이루지 못한 소원이 많다는 게 사실이지만, 분수에 넘치도록 받은 것도 많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잃은 것보다는 찾은 것을 생각하고, 얻을 것보다는 얻은 것을 생각하며, 이룬 것보다는 이루어 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미시간 호는 바다처럼 큰 호수입니다. 오래 전, 이곳에서 큰 배 한 척이 뒤집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 배에 젊은 수영 선수 한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내걸고 헤엄쳐 23명이나 구출해냈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청년의 이름은 물론 신문지상에 커다란 토픽감으로 등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기억하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레이 신부님이 얼마 전 로스앤젤리스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그 옛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미시간 호수에서 이러저러한 사고가 났을 때 23명의 목숨을 건져 준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고 설교하면서 내려다보니, 그 때의 바로 그 청년이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앉아 있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마친 토레이 신부님이 그 노인한테 물었습니다. "그때의 일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노인의 대답 좀 들어보십시오.

"23명 가운데 내게 찾아와 고맙다고 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억납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합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슬프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17)?" 여러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은혜를 입은 사람은 열인데 왜 한 사람만 돌아왔느냐? 이것은 바로 우리들을 향하신 책망이기도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너무적습니다. 이것은 하나같이 받지 못한 것만을 생각하고, 가지지 못한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을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라고 '나는'이라는 주관적인 말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나만은'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감사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자요 박해자였던 나를 주님께서 사도로 불러 주셨으니, 나를 택하신 그리스도, 나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나를 참아 주신 그리스도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감사하다는 고백입니다. 원래 은혜란 주관적인 것입니다.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내게 내려진 사죄의 은총을 감사하고 은혜 입은 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나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 동료 목사님 한 분이 다리를 접니다. 그런데 그는 늘 명랑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이따금 좀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그는 625때의 일을 회상한다고 합니다. 총 맞고 시체 더미 속에 묻혀 있다가 살아난 일---지금도 총 맞은 자리를 만져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 눈에 선히 떠올라서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다리를 절든지 말든지, 총상 자국이 흉하든지 말든지,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내가 받은 은혜를 내가 감사할 줄 아는 비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야 어떻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께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로 눈앞에 원수가 쳐들어오는 장면이 보입니다.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큰 환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하박국은 죄악과 혼돈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패와 좌절과 모순과 암담함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와 축복을 내다볼 줄 아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현실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만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때에 읽어보아도 감격스러운 고백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것을 다시 우리들의 말로 바꾸어 봅시다---사업에 실패하고, 몸은 병들고, 명예는 실추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남들이 나를 향하여 불행하다고 말하며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멸시할지라도, 나만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노라---내가 받은 은혜는 내가 압니다. 그것은 내 믿음으로, 내 나름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구애받지 않고 나는 나대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깨달음의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에 큰 용기가 있고, 여기에 봉사의 능력도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여기에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봉사하는 사람한테는 사단이 시험을 걸 수도 있고 유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한테는 사단이 시험을 걸지 못합니다. 오직 감사만이 시험을 이깁니다.

내가 원망할 때에 사단의 시험에 빠지고, 내가 감사할 때에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감사야말로 지혜의 근본이요, 승리의 힘이요, 능력의 원천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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