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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멋 (마 10:5~1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맛과 멋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맛이 혀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멋은 눈과 귀 그리고 풍채와 인격 전체를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령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예쁘다고 했다면 그것은 맛을 의미하고, 우아하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멋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멋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맛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멋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멋있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미국 유학 중에 어느 고(古)서점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 책을 뒤적이며 구경하다가 우연히 참 재미있는 책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 책은 1904년에 알렌 박사가 쓴『한국의 멋』이란 책입니다. 우리는 멋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저들은 벌써 자기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멋을 영어로 써서 본국에 소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 멋의 대표자로 소개한 인물이 김삿갓과 김선달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명예도 지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분위기에 맞추어 시 한 수 읊어놓고 훨훨 떠다니는 위인들이었습니다. 풍류가 있었고 여유가 있는 멋을 풍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는 그런 여유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멋이 거의 없어져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그 대신 얄팍한 맛을 따라가는 가벼운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으로 파송하면서 훈계하신 말씀들입니다. 즉, 제자됨이 무엇이며, 파송의 의미가 무엇이며, 세상에 나가 전도할 때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멋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높은 차원의 멋진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가 "거저 주라"(마 10:8)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주는 행복과 받는 행복이 있다면 주는 행복은 멋이요, 받는 행복은 맛입니다. 무엇인가를 남에게 준다는 것,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선물을 받을 때의 기쁨은 얄팍한 맛일 뿐입니다. 선물을 주는 자의 기쁨이 훨씬 농도가 진하다는 말입니다. 주라! 주는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멋입니다. 사실 받으면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또한 빼앗는다면 번민에 살게 됩니다. 오직 주는 자만이 여유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자유인입니다. 주는 자는 불평이 없습니다. 대개 받는 자가 말이 많습니다. 받기를 좋아하는 자는 노예 근성이 있어서 더 받았다, 덜 받았다, 차별한다, 무시한다 등 말이 많습니다. 주는 자는 주인이기에 여유가 있고 말이 없습니다. 만약에 사랑한다면서 불평이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주는 자는 말이 없으면 주는 사랑에 불평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원래 멋이란 성숙한 인격의 특징입니다. 사랑도 주고, 봉사하고, 수고하는 데에 성숙한 인격의 멋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봉사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상재 선생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책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상재 선생께서 늦도록 책을 읽는데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며 한 보따리 싸 들고 드디어 선생님이 계신 방문을 열었습니다. 이 때에 깜짝 놀란 도둑에게 선생님은 여유 있게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안절부절못한 도둑에게 필요한 것 있으면 염려 말고 가져가라고 하셨답니다. 도둑은 얼떨결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그만 순찰 순경에게 붙들렸습니다. 순경은 도둑을 끌고 다시 선생님 댁으로 와서 도둑을 잡았으니 물건을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이 때 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가라고 주었는데 어찌 도둑이냐, 우리 집에 온 손님이오"라고 태연히 말씀하셨다는 일화입니다.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은 확실히 다릅니다. 언제나 주는 자는 멋이 있습니다. 안 주겠다고 움켜쥐는 자에게는 빼앗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자가 곁에 있기에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위해 봉사한다고 하지 마십시다. 도덕적 향락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쨌든 주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자유하고 멋이 있으니까요.
주님께서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저 주라"는 것은 무상 봉사를 뜻합니다. 아무 것도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멋이 있습니다. 외경에 보면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니준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줄 때는 깨끗이 조건 없이 주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주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봉사도 봉사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헌금을 바치면서도 되돌려 받을 생각을 먼저하고 바칩니다. 그래서 현금을 심는다는 유행어도 생겼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거저 줍시다. 누가 알아주길 바랄 것도 없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죽은 뒤에라도 아무도 몰라도 좋다는 이런 풍류가 있는 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까?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 정말 멋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2절에 보면 너희들이 손님을 청할 때 너희를 다시 도로 청할 수 있는 부자는 청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손님을 청할 때 초청한 것으로 끝나야지 다음에 대신 나를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차라리 대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던 미국 선교사가 어느날 홍수를 당해 떠내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냥 두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구해 주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일생동안 보답하겠다며 그 분의 성함을 여쭈었습니다. 이 때 그 은인은 껄껄 웃으면서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이 있습니까? 하며 훌쩍 떠났다고 합니다. 멋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좋은 일을 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나야지 신문 기자는 왜 찾습니까? 거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극단적인 말씀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나친 말씀입니까? 이 정도로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구제하고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정말 멋있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거저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은총입니다. 벌써 다 받았습니다. 이대로 족할 뿐,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충분히 넘치도록 받았기에 아무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이대로 피를 쏟아 관제로 드릴찌라도 기뻐하리라."(빌 2:17) 즉, 이대로 죽어도 한이 없다는 것입 D쵹TXT\:니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아직도 소원이 많습니까? 좀 소원없이 살아볼 수 없겠습니까? 받은 은혜로 족하며, 베푸신 사랑으로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자랑과 긍지로 충만합니다. 이래야 멋이 막 솟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돈에 대한 초연의 멋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0:10).
전대나,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요즘 세상에서는 굶어 죽기에 알맞는 말이지만 돈에 초월하라는 뜻입니다. 옛말에 황금은 흑사심이라 했습니다. 돈이 있으면 마음이 검어진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자본주의에 취했습니까? 정신을 차려야겠습니다.
요새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좁은 땅에서 담장없이 이웃끼리 살 수는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담장이 너무 높습니다. 다 헐어버린다면 얼마나 시원하고 좋겠습니까? 도대체 금, 은, 보화를 얼마나 가졌기에 그렇게 높이 쌓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높은 담장 위에 유리 조각을 박아놓고 다시 철장을 하니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안양 교도소에 있는 전과자에게서 들은 바로는 담장이 높을수록 도둑질은 하기가 좋답니다. 일단 담을 넘기만 하면 절대 안전 지대이니까요. 우리 교회는 담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담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좀 잃어 버려도 괜찮으니 집의 담장을 헐어 놓고 살 용기는 없습니까? 열심히 모아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짧은 인생 좀 멋있게 내 것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버리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까?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멋은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마 10:11). 전도하러 다닐 때 어느 집에 가서 합당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어떤 부자가 같이 가자고 한다고 따라가지 말고, 친절한 사람이 와서 옮기자고 하여도 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인정에 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니 감정에 이끌리어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서울에 있는 어느 큰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앞에 숙소를 잡느라고 한 여관을 정했는데 방을 보니 정말 너무 작아 돌아앉기가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첫째 날 설교 후에 그 교회 목사님이 숙소를 구경하러 오셨다가 당장 큰 곳으로 옮기자고 해서 웃으며 "성서적으로 합시다"하고 거절했습니다. 어차피 대접받으러 간 것 아니니 인정에 초연해야 합니다. 조금 친절하면 홀딱 반하고 좀 불친절하면 홱 돌아서면 되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초연할 수 있는 멋을 지녔으면 합니다.
넷째로 대상에 초연하라고 했습니다.(마 10:12) 어느 집에 가든지 먼저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하면『샬롬』이란 뜻입니다. 만약 복을 빌어서 그 사람이 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그 복이 내게(복을 빈 자)로 되돌아온다는 오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실리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사람에게 복을 빌어야겠습니까? 복 받지 못할 사람에게 복을 빌어야 그 복이 다 내게로 온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누구를 만나든지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사람 가리지 말고 대상에 관계없이 미운 사람,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복을 더 빌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무시할 사람도, 무시당할 사람도 없습니다.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시우고, 배고프면 먹이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복을 빌라는 그리스도인의 멋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대상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는 초연한 멋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나그네입니다. 곧 멀지 않아 떠나야 할 세상입니다. 뚜렷한 목적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선 것이니 어떤 대상이나 여건에 초연하자는 것입니다. 기뻐할 일이 있다면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자연히 이 땅 일에 대해 초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먼 미래를 지향하고 나가는 확실한 신앙의 사람에게는 분명히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늘에 두고 그리스도인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해가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도하며 사는 자는 참 그리스도인의 멋이 풍겨나올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아랑곳없이 오로지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는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멋이 깃들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내 마음 속에 은혜로 인한 기쁨이 충만하게 있을 때에 모두에게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여유와 멋이 있는 줄로 압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신 후에 예수님은 항상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훌쩍 그 다음 마을로 가십니다. 알아달라거나 보상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실 그 순간에도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 이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기도입니까? 어느 장로님이 병으로 아주 고생하시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사모님이 신유의 은사를 받은 권사님을 모셔왔습니다. 그 권사님이 기도를 하면 어떤 병이든 다 낫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려는데 장로님이 말씀하시기를 "나 70이 넘었는데 많이 살았어요. 권사님, 이왕 오셨으니 나 낫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만 두시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도록 기도해 주시오"라고 부탁을 하고 또 부인에게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하시고는 그냥 돌아가셨답니다.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을 때도 멋지게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죽으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멋은 종말론적입니다.
사도행전 5:41에 보면 "제자들이 매를 맞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것을 기뻐하며 공회를 나가니라" 했습니다. 역시 멋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멋을 찾읍시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 모든 사람을 위해 복을 빕시다. 그리고 자유합시다. 그리스도인됨과 제자됨의 높은 긍지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어차피 떠나야 하는 세상에 아쉬움을 두지 말게 하시고 항상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세상에 사나 세상에 매이지 않고, 물질에 사나 물질의 종이 되지 말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옵나이다. 이 거룩한 믿음과, 이 놀라운 소망과, 이 사랑에 살아갈 수 있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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