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그리스도인 상(사도행전 26 : 24~32)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2천 년 전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원형 극장에서 수많은 기독교인을 죽였고,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순교의 역사를 거듭하면서 기독교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 때에 밀라노칙령과 함께 끝이 나고, 대로마 제국이 갑자기 기독교 국가로 선포되어졌습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결정적인 순간이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선포할 때 전국민 가운데 기독교인은 오직 9%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9% 기독교인이 세계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엄청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 당시 이 9%의 기독교인이 모두 로마의 지성인이며 귀족이며 정치적으로 고관들로서 소위 말하는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역사가들이 말하는 바대로 보면 당시의 로마 제국은 윤리적으로 몹시 타락했었는데 그 중에 특히 여성들의 타락은 더욱 심하여 갖가지 부정한 일들이 많았고, 또한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우생학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들은 정결했기 때문에 이 소문이 온 로마에 퍼지게 되어 로마의 고관들이 자기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도 기독교 여인과 결혼을 하려고 했으며, 강제로라도 그들을 자부로 맞아들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립된 결혼으로 인하여 얼마 있지 않아서 자녀들이 태어나게 되었고 그 어머니는 이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웠으며 세대가 바뀌면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라난 그 자녀들이 고관의 자리에 앉게 되니 전반적으로 로마의 귀족들은 그리스도인의 피를 이어받은 신앙인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 여성들의 순결과 철저한 신앙이 바로 로마를 복음화시켰으며 순교의 죽음을 당하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사랑하는 그 기독교인 상이 성도들의 세계는 물론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감화를 주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생전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는 모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면서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에 대하여 물어 본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자기는 고집이 무척 센 사람으로서 그 동안 예수 믿으라는 전도를 많이 받았지만 그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는데 주위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일이 잘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하며 감사하고, 일이 잘 안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련이라고 생각하며 겸손하게 참고 견디어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예수를 믿어 보겠다고 생각하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생활 주변에서 어떤 모습의 그리스도인 상을 비춰 주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모습을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첫째,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에서는 도덕과 윤리성을 추구합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모습, 여기에서는 겸손한 신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자기 모습이 합쳐져서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서 바울이 말하기를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담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바울은 결코 평안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자기 자신에게까지 성실했기 때문에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며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한 생활이며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진정한 그리스도인 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체포되어서 로마로 압송되기 직전에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생사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봉왕 아그립 바와 총독 베스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된 다메섹 도상에서의 일과 십자가의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베스도 총독이 소리를 지르면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13에 보면 사도 베드로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한 베드로를 향하여 본래 무식한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역사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없는 힘, 즉 영의 역사가 있다고 믿고 새 술이 취했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 지식으로 인하여 미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베드로는 무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새 술이 취했다고 하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성령의 충만한 상태였지만 그 생활 배경에 따라서 두 가지로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조금 깊이 상고해 보면 그들의 대화 가운데에서 네 가지 형의 그리스도인 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적은 말로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말을 정리해 보면 첫째로 이들은 기독교를 지식적인 면으로 생각하여 지식적인 그리스도인 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면만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흔히 성경을 많이 암송하고 교리를 많이 알고 있는 이런 사람을 하나의 교인상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풍부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잘 가르치고 설득하고 하는 이런 경우에는 믿음보다 이성적 기능이 앞서게 되어서 무엇이든지 합리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지식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안다고 하여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교도소에서 성경 암송 대회가 있어서 심사를 해 본 일이 있는데, 죄수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며 그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은 성경 한 권을 거의 다 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지식과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으로써 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약 구약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성경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이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이 성서적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을 신앙의 바로메터처럼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무당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습득 무당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배워서 무당 노릇 하는 것으로서 90%가 이 습득 무당이라고 합니다. 이 습득 무당에게는 돈을 아무리 많이 갖다 주어도 굿의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지식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습득 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우월성은 있지만 자기의 체험이 부족하므로 주관적인 신앙을 갖기가 매우 힘드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 경험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험 교인이라 합니다. 누가 물으면 교리적으로 설명은 못하지만 확고한 자기 경험이 있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든지 기도의 응답 을 받았든지 어떠한 영적인 체험을 함으로써 그 경험 위에 신앙을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주관성이 대단히 강해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믿음에서 후퇴를 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객관성이 결여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체험적 신앙을 많이 강조하고 체험적 그리스도인 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분열이 자주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자기 경험이 절대적이므로 고집과 의지가 한데 뭉쳐져서 독선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잘 읽지 않으며 자기가 체험한 것과 계시에만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체험은 중요한 것이며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내가 본 바요 귀로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는 자기 체험을 말하고 있으며,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자기 경험에 대한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경험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어떠한 종류의 체험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성서적 계시와 동일시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며 자기 경험을 절대화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성경의 객관적 진리의 토대 위에 주관적 경험의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영적인 교인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다고 하였고 사도행전에는 새 술이 취했다고 했는데, 미쳤다거나 새 술이 취했다거나 모두 영에 이끌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을 위하여 미쳤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이므로 미쳤다고 하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베스도가 정말 미친 것으로 생각할 때 베스도에게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정신차린 말을 한다고 하였고 베드로는 우리가 새 술이 취한 것이 아니라 말세에 하나님께서 부어 주실 성령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방인에게나 성령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현상이 이상하게 보여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그리스도인 상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의하면 적어도 이런 사람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예수님과 동행했고 예수의 부활도 보았고 못자국 있는 손을 만져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말하는 대로 보면 오순절로부터 시작한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 즉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성령의 체험이 있은 후 이것이 체계화되고 의식화될 때 이것을 신학이라고 하며, 이것이 고백될 때에 신앙 고백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8:24 이하에 보면 아주 극적 장면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볼로라고 하는 성경에 통달한 유대 사람이 있는데 예수를 잘 알고 그리고 믿고 전도도 많이 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볼로에게 와서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안수함으로 성령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지식이 많고 또한 성령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할지라도 직접 성령의 체 험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마음 문을 열어 주시고 성령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고 성령이 그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해서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넷째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위탁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있고 자기 경험도 있고 성령의 충만함도 받은 자로서,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자기의 생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를 한다면 서툰 운전사가 혼자 고생하며 차를 운전하다가 능숙한 운전사에게 핸들을 맡기고 그의 옆에 앉아서 평안한 마음으로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지식과 의지와 고집대로 사느라고 무던히도 애를 써 보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문제들을 주님께 맡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감화에 자기를 완전히 위탁하며 살아가는 생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 상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런 신앙은 십자가의 뜻을 알고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합니다.
자기의 소원이나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를 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나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상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하여 지식도 경험도 영도 생활도 우리의 이론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위탁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박물관장 한 분이 말하기를 "나의 신앙 고백으로서의 인생의 발생지가 에덴 동산이지만 나의 학문적 지식의 결론으로는 애굽의 나일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갈등이며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신앙 고백이 에덴 동산이면 여기서부터 이론을 펴서 학문적 지식의 결론도 에덴 동산이어야 합니다. 신앙적 결단과 지식적 이론이 하나 되지 못하면 부조리한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믿고 고백하고 보면 이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여기에 지식이 있고 진리가 있고 그리고 명예와 영광과 성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유일한 보증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 얼굴 모습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상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가운데에서도 성공할 때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어려운 환난을 당할 때에 주의 약속을 믿고 담담하게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그리스도인 상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을 책임지시고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 지만 우리의 모습은 참 그리스도인 상을 가지지 못하고 모순과 갈등과 위선에 살 때가 많습니다. 간구하옵는 것은 지식과 체험과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어서 참 그리스도인 상으로서 이 세상에 비추어지게 하여 주시옵시며, 오직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게 하사 아름답고 고귀한 그리스도인 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침묵(요한복음 19:1-12) (0) | 2024.11.27 |
---|---|
그리스도의 영(靈)(로마서 8:1-11) (0) | 2024.11.27 |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장 1절~22절) (0) | 2024.11.27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24:37~51) (0) | 2024.11.27 |
그가 당신입니까?(마 11:1~10) (0) | 2024.11.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