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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군중 속에 버려진 자(누가복음 8장 43~48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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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에 버려진 자(누가복음 84348)

 

이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어려운 괴로움은 아마도 고독일 것입니다. 고독 중에서도 버려진 자의 고독은 더욱 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참을 수 없는 버려진 자의 고독 속에서 나를 알아주는 그 누구를 만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의 구주가 될 것입니다.

하이덱거는 말하기를 사람은 "던져진 생"(Drawn Life)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고독 속에 던져진 생을 산다는 말입니다.

고독 그 자체가 실존이기 때문에 이 실존에서 벗어나려고 반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고독 속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그 고독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역설적인 해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고독할 수 없는 존재이며 고독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세상에 존재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 사회성을 가지고 사회적 관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 이웃 관계와 가정 관계가 깨어짐으로 인간은 큰 고통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구는 40억을 헤아릴 정도로 많지만 그와 반비례하여 이웃 관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심지어는 가정관계마저도 희미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작은 나의 마음 하나를 둘 곳이 없는 적막한 세상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고독합니다. 사람은 많은데도 불구하고 더욱더 깊은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인간 형편입니다.

토인비는 현대 도시화의 문명 속에서 세 가지 단절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뢰감의 단절이요, 둘째는 학문의 단절이며 셋째는 도덕의 단절이라고 합니다.

이같이 단절된 시대이기 때문에 그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고독에 울어야 하는 것이 주어진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도시 문명 속에 버려진 인간이 되어 일찍이 그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무서운 고독을 씹으면서 마침내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문 속에서 참으로 고독한 사람 하나를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사람은 우리 현대인을 대표한 외로운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완전히 버려진 인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인은 교부 유세비우스의 해석에 의하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이방 사람이라고 하면 그는 축복권 밖으로 버려진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죄중에 살며 구원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은총을 힘입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여자였습니다.

오늘도 미개한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생활 수단으로까지 평가해 버리는 예를 더러 볼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 당시로 뒤돌아 생각해 본다면 당시 여성의 위치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이로되 역시 버려진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한 예로서 인구 조사를 할 때에도 남자만 헤아렸을 뿐 여자와 유아는 계수하지 아니하였으며 성전에서 예배할 때에도 여자들은 이방인들의 장소인 뜰에서 같이 예배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로마 군인들이 멀리 싸움터에 나와 있으면서 고향에 두고 온 아내에게 보낸 편지 문들이 지금도 가끔 발굴되는 일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러한 글귀가 나왔다고 합니다. "내가 떠나올 때 당신이 임신 중인 것을 보았는데 지금쯤은 해산하였을 것 같소. 그 아이가 남자면 살려두고 여자면 버리고 마시오……" 이처럼 비참한 것이 당시 여성들의 지위였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이 본문에 나타난 이름 없는 여인은 건강을 잃은 여자였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참조하면 이 여자는 부인병인 혈루증으로써 12년 동안을 고생하였으며 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고쳐 보려했으나 오히려 괴로움만 더 할뿐 아무 효험도 얻지 못한 채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허비하였고 친척이나 친구, 만일 가정이 있었다면 그의 가정까지 다 버릴 그러한 비참한 인간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인간 관계로부터 버려진 자이며 완전히 소외된 인간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여인이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이 여인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또한 그에게 관심을 주려고도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관심하였다는 말입니다. 무관심은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어린이들이 때로는 이유 없이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어린이들이 우는 것의 실상은 어머니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 미시칸주에서 한 청년이 간호원 6명을 기관단총으로 쏘아 죽인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이 청년의 말인 즉 신문에 나 보고 싶어서 이 같은 일을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무관심은 미움보다도 더 잔인한 대우인 것입니다.

사랑을 못하겠거든 미워라도 해야 합니다. 돌이켜 무관심 한다면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인 나 하나의 존재 가치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여 주는 관심에서 찾으려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기본 욕망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할 때는 차라리 미움을 받는 대상이라도 되어서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어 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 심리의 본능적 움직임인 것입니다. 현대 젊은이들의 반항적이요 역설적인 행위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군중의 관심에서 완전히 버려진 인간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여인이 갖지 못한 것은 건강 하나 뿐이었으나 이 여인은 그 건강 때문에 모든 것을 함께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 세상이 그를 버렸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여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생애를 보낼 수 있었던 나이에 12년이란 세월을 병으로 고생하였으니 이 여인은 그의 반생을 괴로움과 부끄러움으로 잃어 버렸다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절망한 것입니다. 병이 괴로운 것도 아니며 죽음이 무서워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버려졌다는 괴로움에 지쳐서 절망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귀여움도 받고 사랑도 받으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만은 그럴 수 없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중심한 중동지구에는 물이 매우 귀합니다. 마실 물마저 귀한 형편에 목욕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는 때이었습니다. 또한 지금처럼 철 따라 옷을 갈아입고 아침저녁 옷을 바꾸어 입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옷 한 벌을 삼대까지 물려가며 입는 때였습니다. 이 때문에 아간이 옷 한 벌을 감추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서민의 생활에서 옷 한 벌은 참으로 가보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목욕도 못하고 옷마저 제대로 갈아입지 못했으니 혈루증 환자로서의 형편이 어떠하였겠는가 말입니다. 냄새인들 오죽 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인은 사람들을 만나서는 안되며 혹 어떤 사람이 그에게 가까이 하여 만나려해도 오히려 이 여자 편에서 "부정하다"손을 흔들며 피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찾아주지 않는다는 괴로움보다도 자기로서 어떤 사람이고 만나서는 아니 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홀로 울어야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좀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여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에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수기 1537 - 41절이나 신명기 2212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가진 부인병은 부정한 병으로 인정되며 이러한 병중의 사람은 비록 하나님께 경배하는 성전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하나님에게까지 버림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졌으며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자유마저도 빼앗긴 이 사람의 처절한 처지는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비참하고도 절망적인 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의 실정은 다른 어떠한 사람의 처지에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불쌍한 형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병은 부끄러운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질병이라고 다 괴로운 것은 아닙니다. 혹 자랑스러운 병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라고 다 괴로운 것은 아닙니다. 고통 중에도 영광스러운 고통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부끄러움"의 뜻을 내포한 고통입니다. 부끄러운 고통은 육적인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겸한 것이기에 가장 견딜 수 없는 무거운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병으로 인해 고통 중이면서도 자신이 어떤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자유스럽게 말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이는 부끄러운 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밖으로 나타난 병이 아니라 속으로 파고드는 깊은 병이기 때문입니다. 겉은 멀쩡한 사람입니다. 외형으로는 약해 보일 뿐 이렇다하게 나타낼 증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썩어들어 가는 병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병입니다. 그 누구에게 보일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깊이 묻혀 있는 병, 진정 이 병이 두렵고 심각한 병입니다.

이 불쌍한 여인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많은 군중 속에 끼어 들어 울먹이는 마음으로 예수님 가까이 다가왔으나 그는 감히 예수님께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사정들을 예수님께 고하였습니다. 고함으로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장님도 소리를 질렀고 심지어 문둥이들까지도 자기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건마는 오직 이 여인은 바로 예수님 곁에까지 왔으면서도 입을 열어 한 마디의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어떤 청원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말로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운 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인간 관계는 공동체 안에 연대적으로 엉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하나만 죄인일 수가 없고 그 어떤 자만이 의인일 수도 없습니다. 사회 전체가 하나로 운명을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경 시대와는 달라서 근대화된 시대에는 개인적인 의가 통하지 아니합니다.

한 사람의 진실이 결코 진실일 수만 없으며 한 사람의 죄가 결코 그 사람의 죄만은 아닙니다. 혼자서 진실할 수 없는 현실이며 혼자만의 회개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회개도 자유로이 할 수 없습니다.

가령 한 회사의 직원이 자기만의 진실과 회개를 외친다면 그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하며, 안다고 다 말하고, 할 수 있다고 다 한다면 그것으로 전체에 끼치는 뜻하지 아니한 결과는 누가 책임을 지게 됩니까? 몰라서가 아닙니다. 부정을 보고도 말못하면 불의를 아나 해결이 없는 딱한 사정입니다.

조그마한 의와 작은 진실이라도 찾고 싶지만 그것 때문에 불의와 보다 무서운 악을 이루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불의를 당하며 차라리 속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회개도 못하며 진실 할 수도 없는 딱한 사정에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이 아닙니까? 이 절박한 형편에 다른 길이 없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어코 그 숨겨지는 악을 향하여 화살을 쏘고 계십니다. 악한 한 사람의 작은 범죄 때문에 이스라엘 전군이 싸움에서 패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가 흔들리며 계속되는 대변동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진 악을 향하여 화살을 쏘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역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고야말 것입니다.

현대의 문화는 물질 문명에 기울며 근대화는 곧 기계화요, 기계화는 물질주의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밖으로 보기에는 굉장한 바가 있습니다. 놀라운 건설이 있습니다. 화려하고 찬란한 시설과 편리한 기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점점 깊이 썩어 가는 정신적 고민이 있습니다. 정신 문화의 빈곤으로 오늘의 세계는 크게 번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병든 바를 뚜렷하게 말로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해결도 없습니다. 여기에 현대적 고민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가까이 왔으나 발길을 멈추시게 하여서 떳떳하게 "나는 이런 병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고쳐 주소서"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가 취한 최선의 방법은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경건의 근본정신은 "인자가 무엇이관대"라는 말속에 깊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알고 자기의 낮음을 발견하여 그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심과 나를 만나주심에 감격하여 반사되는 간증은 곧 "내가 무엇이기에"라는 말속에 있다고 봅니다. 경건은 일생에 처음같이 그리고 생에 있어서 마지막인 것처럼 마음을 정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오히려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한 교인들에게서 경건이 없는 것을 간간이 보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차차 연륜이 쌓이며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습관화되고 타성이 생겨 마침내 경건에 대한 불감증 환자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는 참으로 경건한 중에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회당장 야회로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가시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걸음을 멈추시고 이 여자를 찾으신 것입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좀 짜증내듯이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어서 밀고 밀리는데 좀 옷이 닿았기로 어찌 이 일을 인하여 말씀하십니까? 라고, 요는 인기가 좋아서 많이 모였고 모였으니 밀고 밀리는 것이며 따라서 옷자락에 손이 닿을 수도, 옷깃이 스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논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쩌다 옷자락에 닿으며 옷깃에 스쳐지는 정도의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경건하게 예수님의 옷을 만진 그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다 나오며, 어쩌다 참석하는 그러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오직 믿음으로 경건하게 일생 처음같이 그리고 오늘이 나에게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나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군중 속에 버려진 가련한 한 여인을 만나 주셨습니다. 친히 찾으셨습니다. 믿음으로 나아온 한 영혼을 꼭 찾으시고야 말았습니다. 이처럼 부끄러워서 나설 수 없는 한 죄인을 찾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 시간 이후부터의 이 여인의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찾아 주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 여인에게는 새로운 가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칼 발트는 십자가에 이중 형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먼저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내가 얼마나 귀중한 가치의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죽어야 할 큰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동시에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아서까지 구원할만한 큰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해야 하는 신앙적인 나의 가치는? 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 기대나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주어지는 가치인 것입니다. 이 근본적인 자기 가치를 바로 평가하는 것이 곧 신앙인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찾아주시며, 만나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 감격하여 그에게 자기의 감추었던 병에 대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직고하게 됩니다. 자기를 그대로 바쳤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움이나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실이며 그 진실이 주는 용기입니다. 이것을 막을만한 어떤 장애물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어찌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내 능력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을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에 대한 인정이요, 믿음 위에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축복하시며 온전케 하시고 의로 여기시는 큰 은혜의 허락인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다시 교부 유세비우스의 말에 의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고쳐주셨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여 기념비를 세워놓고 오고가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일생 동안 증거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생애였습니까? 가장 비참하게 버림받았던 자가 가장 높임을 받는 존재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버려진 나를 비관하지 말 것이며 소외된 자기를 슬퍼하지 말 것입니다. 절망은 죄요, 가치 부정은 불 신앙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로부터 새롭고 가장 귀한 생을 부여받게 될 것이며 그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영원히 영광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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