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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자의 신앙고백(누가복음 8장 43절~48절)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 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은 던져진 생애를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thrown life--그 무엇엔가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독에, 혹은 주어진 운명에 던져진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인간은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자유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던져진 생을 살아간다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부득불 다른 사람에게 투사해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가장 대하기에 불가능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대하기 참 힘들다, 이래도 어렵고 저래도 어렵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열등의식 때문입니다.
혹은 소외감 때문입니다. 혹은 스스로 고독하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달랠 길이 없습니다.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이래도 불편하고 저래도 불편하게 받아줍니다. 정말로 이 고독한 사람을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애를 긍정적인 생애로 바꾸고, 긍정적인 자아형성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대조건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소속감입니다. belongingness--다시 말하면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내 친구에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NO'라고 하는 대답이 나올 때에 나는 견디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반갑게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짜증스럽게 대하고 있는가?--다른 사람들과 잠깐 인사하고 있는 중에도 벌써 이 생각이 확 지나갑니다. 순간, 순간 우리는 이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받아들여지고 있는가'--심지어는 악수를 해도 저 사람이 나를 정말 반가워해서 하는 악수인가, 아니면 그저 악수해야 되니까 하는 악수인가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장로들이나 교역자들이 교인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저한테 인사하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별로 반갑지도 않으면서 반갑다고 인사하는데, 그건 사람 웃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왜입니까? 악수는 하고 반갑다며 말은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저 사람이 나를 받아들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소속감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두 번째가 가치감입니다. worthfulness--'내가 정말 요구되고 있는가, 저 사람에게 내가 필요한가, 내가 쓸만한가, 내가 쓸만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는가, 가정에서 내가 정말 필요한가?'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나이 많다는 게 슬픈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해봐도 쓸모가 없거든요. 흔히 노인 분들이 '빨리 가야지, 빨리 죽어야지'하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 느낌은 절대적입니다. 누구도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불필요하다는 것을 네가 압니다. 여러분, 부모님께 효도하려거든 하루에 열 번씩 이런 말을 해드려야 됩니다. "어머니가 꼭 필요합니다. 아버지가 꼭 필요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안 계시면 집에 들어갈 맛이 없습니다." 이 말을 하루에 열 번씩은 해야 비로소 부모님들은 '내가 정말 필요한가' 싶어진다는 말입니다. 가치감이라는 것이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세 번째가 신뢰감입니다. confidence--'내가 할 수 있는가'입니다. '내게 정말 능력이 있는가, 이 사회를 위해서 내가 정말 무엇인가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결국은 내가 무능하다고 할 때에 나는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것도 저것도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내 가치는 커지는 것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나는 소모적인 인간이다, 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위로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절대질문에 대한 자아 응답이 있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self acceptance'--자기 스스로 옳다고 인정할 때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소외감, 열등의식, 피해의식, 고독의식, 절망의식에 빠집니다. 누구도 위로하지 못합니다.
마치 현대인을 대표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인물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병든 여인입니다. 당시에는 여자라는 존재도 미미했거니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사람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입니다. 어떤 의사에게 물어봤더니, 아마 그 병은 성병이거나 암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혈루증'이라는 헬라어는 그 말 자체가 의학용어라고 합니다. 본문의 기자인 누가가 의사거든요. 어쨌든 이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피 흘리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이제 그는 어디에고 소속감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자기 가치감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를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뢰감도 없습니다. 이제 이 몸으로는, 이 처지로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어디 가서 물건을 사게 되면 "이것이 제일 비싼 것입니까?"하고 묻는다 합니다. 독일사람들은 "이것이 제일 튼튼합니까?"라 묻고, 프랑스사람들은 "이것이 최신형입니까?"하고 묻는다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뭐라고 물을 것 같습니까? "이것, 진짜입니까?"하고 묻는대요. 진짜 가짜가 흔들리면 만사가 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소용없는 것이지요. 신뢰감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이 여인은 가정에서 버림받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사랑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한 기대감도 포기한 지 오래됐습니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긴 병에 효자 없다'--너무나 오랫동안, 12년 동안 이렇게 살다보니 이제 더 바랄 것도 없고,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도움도 없다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저를 돕는다고 하지만 도리어 괴롭힐 뿐입니다. 병이 고쳐져야 의사도 고마운 것이지, 고쳐지지 않는데 치료를 계속한다면 치료 자체가 불편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친구도 없습니다. 그 누구의 위로의 말도 이 사람에게는 조소처럼 들립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욥이 매우 어려운 일을 겪고 있을 때에 세 친구가 찾아와서 그를 위로합니다. 저들 딴에는 위로한다고 말을 하는데 욥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제발 입 좀 다물어라, 그런 말은 나도 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내 딴에는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저쪽에는 조소와 비난으로 들리고 멸시로 들릴 때,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정신적 고독입니다.
좀더 깊은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부끄러운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병, 다시 말해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병입니다. 병도 여러 가지입니다. 자랑스러운 병도 있어요. 언젠가 어떤 장로님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한번 찾아갔더니 제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목사님께서 안 찾아오셨으면 좋을 뻔했는데요." "왜요?" "제가 골프를 치다가 다쳤지 않습니까? 무슨 중요한 일을 하다가 다쳤어야지, 놀러 갔다가 다친 것이니 좀 모른 체해 주십시오." "그래요? 그런데 죽으면 어떡합니까?" "뭐, 장례식을 치러야겠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병도 여러 가지입니다. 떳떳하게 나는 이래서 병들었노라, 이래서 어디가 부러졌노라 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이 여인의 경우는 부끄러운 병입니다. 또한 병도 부위 나름입니다. 다리입니까, 머리입니까, 손입니까, 눈입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부인병을 앓고 있어요. 그런고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해요. 나는 지금 어떤 병을 앓고 있다, 라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어요. 말이라도 해야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대학교수의 부인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회개할 자유도 없습니다." 결혼하고 얼마동안 지내다보니 남편의 박사학위가 가짜인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에 이 사실이 폭로되는 날이면 주변의 실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특히 아이들에게 말입니다. 아이들은 지금 제 아버지를 아주 훌륭한 분으로 굳게 믿고 있어요. 그래서 자기는 회개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밖에서는 좋은 사람인데, 안으로는 나쁜 사람이에요. 이 비밀을 그 아내만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내는 이것을 마음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해결책도 없는 일인 줄 압니다마는 목사님께라도 한번 얘기해보렵니다"하고는 남편의 비밀을 다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이라도 이렇게 하고나니 좀은 시원해진다고 해요.
보세요. 부끄럽고, 감추어져야 하고, 숨겨져야 하고, 마음대로 회개도 할 수 없는 고독한 여인입니다. 부끄러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얼굴은 더 핼쑥해져서 매력 있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여자는 조금 아파야 예쁘다고--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이지만 속은 썩었어요. 부정하게 썩어가고 있어요. 차츰차츰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독합니다. 정말로 이 비밀과 함께 그녀는 고독합니다.
특별히 이 여인에게는 종교적 고독이 있었습니다. 본인이 알건 모르건 죄책이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은, 특별히 질병은 죄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고 교육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그 어느 때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이 무서운 병을 얻어서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때 그 남자를 만나지 말았어야 할 것을, 바로 그 때 실수를 저지르지 말았어야 할 것을'하고 그 단 한 번의 잘못을 뉘우치며 죄책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가혹한 형벌에 눌려 있는 여자라는 말입니다. 민수기 15장 37절이나 신명기 22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런 부정한 여인은, 이렇게 몸에 피가 흐르고 있는 여인은 회중 앞에 나가거나 특별히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들어서면 온통 썩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고 금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자기 냄새에 젖어서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이 가까이에만 와도 벌써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모이는 데에 가지 말아야 되고, 예배를 드리는 데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만나주지 않아서 괴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누가 나를 찾아와서 만날까 걱정입니다. 가까이 오는 사람을 일부러 피해야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심리적으로 완전히 병들고 고독한 여인입니다. 그러기에 남이 나를 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내가 나를 버렸습니다. 나는 완전히 버려졌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자, 이러한 여인이 군중 속으로 왔습니다.
성경을 보면,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고독해합니다. 다윗은 범죄하고 고독해합니다. 사울 왕은 살의에 가득 차 있을 때에 고독해합니다.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고독해합니다. 양심이 저를 심판하고 있기에 늘상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이 불행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나옵니다. 예수님만은 내 사정을 아실 것이라고, 내가 말을 안해도 아실 것이라고, 저 메시야는 나를 아실 것이라고, 그 분에게만은 가능할 것이라고--그에게 지혜가 있고, 그에게 능력이 있고, 그에게 지식이 있고, 그에게 사랑이 있다고 유일하게 믿고, 말없는 신앙고백과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애써 예수님 앞에 나왔지마는 그녀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보세요.
왜 손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입니까? 만일에 다른 사람들 같으면 내 눈을 뜨게 해주세요, 내 몸을 고쳐주세요, 내 다리를 고쳐주세요, 내 손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세요, 할 수 있지만 이 여자는 '도대체 내가 이 부끄러운 병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말없는 사랑을 원할 뿐입니다. 어디가 아프냐, 무슨 문제를 가졌느냐고 물을 때에 대답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이런 고독한 마음,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그녀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한 가지 방도, 그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나름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밀한 경배입니다. 말없는 예배입니다. 말없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찾으십니다. 나를 만진 자가 있다 하십니다. 옆에 있는 베드로가 한마디합니다. "아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서 서로 밀고 밀치니, 손이 좀 닿을 수도 있고 옷자락이 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뭘 그렇게 짜증내고 그러십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기 많은 것, 그게 나쁩니까? 사람들끼리 좀 밀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가며오며 스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옷자락에 손이 닿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나를 만진 사람, 종말론적으로 나를 만진 사람, 경건한 마음으로 나를 만진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생에 단 한번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를 만진 바로 그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고많은 날을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내 일생에 처음처럼, 내 일생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으로, 경건하게, 말없는 최대의 신앙고백과 함께 이 자리에 앉았을 때에 주께서 그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한 자리에 있다는 얘기가 아니고, 어쩌다가 한 말씀을 흘려들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절박하게, 종말론적으로 높은 믿음을 가지고 말없는 신앙고백과 함께 주님을 만졌습니다. 그럴 때에 그는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당장에 몸이 깨끗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니, 여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합니다. 이제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나는 과거에 이랬고, 이래서 만졌고, 이래서 나았습니다--이 세 가지입니다. 나는 12년 동안 이렇게 산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내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내가 이렇게 깨끗해졌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이 여인을 보세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한 여인, 부끄러워서 아무도 만날 수 없었던 이 여인을 보세요. 죄책과 절망에 완전히 버려졌던 고독한 이 여인을 보세요. 그러나 이 시간에 예수님을 만나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이 넘치는 자유, 이 영광, 이 행복을 상상해보세요. 전설에 따르면, 이 여인은 집에 돌아가서 자기 집 앞에 예수님을 만났다는 비석을 세워놓고 어느, 어느 날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하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증거 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한평생 불행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한평생 행복하게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진짜 행복을 한번 경험한 사람은 다시는 불행해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불행이 있다면 진짜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만난 그리스도, 이 여인이 경험한 엄청난 사건과 같은 그 영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경험한 그는 다시는 불행해질 수 없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넉넉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비방도 상관없습니다. 과거를 캐묻는 사람에게도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저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이 행복이 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고,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남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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