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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

by 【고동엽】 2022. 10. 20.

로마서 10:8-15

   미국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스포츠 중에 미식축구가 있습니다. 특히 1월말쯤 열리는 슈퍼볼 결승전은 미국인들에게는 꿈의 경기입니다. 그래서 슈퍼볼 관람티켓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무려 암표가 우리나라 돈으로 3백만원 까지 치솟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슈퍼볼을 안 보고는 견디지 못하는 스포츠 광이 있었습니다. 표를 구해서 들어가 보니까 사각코너의 제일 윗자리로 너무 멀어서 선수들이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아래로 내려다보니까 아주 좋은 자리에 좌석이 하나 비어 있었습니다. 저기에 왜 사람이 앉지 않고 비어 있을까?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여전히 빈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살금살금 내려가서 옆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게 빈자리입니까?” “내 아내 자리입니다.” “그래요. 왜 지금 안 앉으십니까?” “내 아내가 죽었습니다.” “안됐군요. 그럼 다른 가족을 데리고 와서 관람을 하시지 왜 비어 두었습니까?” “제 엄마 장례식에 다 갔습니다.” 그 정도 광이면 도무지 말로는 상대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믿고 말하라

   사람이 무엇에 몰두한다는 것은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몰두하는 것이 아주 비극적일 수 있고, 아주 장점일 수 있습니다. 몰두하는게 없는 사람은 산만해지기도 하고 발전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몰두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몰두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집착’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사람이 무엇엔가 몰두하고 집착하는 것은 좋은데 그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에 따라서 몰두하는게 내게 해로울 수도 있고 유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이 열정이나 몰두함이 많이 일어나는데 이기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측면이 처음에는 구분이 안 되는데 한참 가다 보면 그것이 구별이 됩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열심을 내고 집착을 하는데 처음에는 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갑니다만 과정 속에서 그 순수함이 구분됩니다. 자기에게 집착하면서 열정을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두 가지 방면으로 구별이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라.” 여기 두 요소가 나오는데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과 “입으로 시인한다”는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만 하나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라는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 시인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내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내게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라는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분명히 말하는 것이 마음으로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한다.” 이 말은 앞의 대상이 안 나왔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이라는 말의 우리말 번역은 조금 약합니다. 이것은 입으로 시인하라 이렇게 번역하는 것보다 조금 더 직접적이고 강한 뜻을 나타내면서 표현하려면 이렇게 하는게 더 실감이 납니다. 사람들 앞에 말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믿는 바를 사람들 앞에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 앞에 예수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믿는 바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입의 기능은 먹는 것과 말하는 것입니다. 소리는 사상이 없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은 생각이 있고 사상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말은 인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말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내가 나를 믿는 것이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다른 사람 앞에 내가 믿는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믿는 바를 말하는 이게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믿는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중얼거림이 아닙니다. 친구가 “너 어디 가니?” “응, 저기.” “너 교회 다닌다면서?” “심심풀이로.” “너 예수 믿는게 정말이냐?” “그냥 그래 뭐.” 이런 식으로 떠넘기는 예수꾼들은 아주 곤란합니다. 제가 표현을 그렇게 했지만 오늘 우리 신앙생활을 가만히 보면 이 표현과 별 차이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무언가 빛이 안 나는 것입니다. 맛이 안 나는 것입니다. 향기가 안 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가 타인에게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예수를 말할 때 내가 믿는 자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어떤 참선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바를 타인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믿고 말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최근에 제가 본 글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상당히 강합니다. ‘지옥에 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아홉 가지입니다. 첫째, 교회에 적은 두면서 출석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 둘째, 불신가족, 셋째, 이웃 사람들, 넷째, 친구들, 다섯 번째, 단골가게 주인, 혹은 손님, 여섯 번째, 우리 집에 온 배달원이나 판매원, 일곱 번째, 무속인들, 여덟 번째, 구원 없는 종교에 빠진 사람들, 아홉 번째, 이사 와서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다 전도의 대상자라는 것입니다. 그저 ‘전도대상자’라는 말이 실감이 잘 안 나니까 이 아홉 부류의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이들을 지옥에 보낼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다가가야 된다는 그 표현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믿는 사람끼리의 잔치가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을 만나야 전도를 하는 것이고 안 믿는 사람과 접한 계기를 만들어야 됩니다. 불신자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아무리 전도하겠다고 다짐을 해도 그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할 대상을 내가 찾고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에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전도는 구원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남에게 예수를 말하는 그런 확신에 찬 믿음은 이미 구원에 이르렀고 그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예수를 말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예수를 말해야만 구원이 성립된다고 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구원에 대해서 그냥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종합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말합니다.
   첫째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이 거듭나서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습니다. 전인 구원입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을 때 우리가 천국에 이릅니다.
   둘째는 육체의 구원을 말합니다. 병들고 상하고 죽어서 썩은 우리의 육체도 마지막 날 부활 때 완전한 구원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영의 몸으로 부활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역사의 구원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을 요즘에 와서는 환경구원, 이 땅위의 모든 자연환경도 새롭게 변화를 받는 그 변화가 환경구원이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근원적으로 현재성을 가지고 말을 할 때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질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지는 물질이 될 때 이게 바로 물질의 환경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돈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이 돈을 쓰는 자에 따라 좋은 돈이 되고 나쁜 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는 여러 개념이 있습니다. 질병에서 낫는 것도 구원의 개념이고, 어려운 환란을 돌파하는 것도 구원이고, 환란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구원의 말로 표현한 성구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혼의 구원과 부활을 통한 완전한 육체의 구원도 있지만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그것도 구원의 개념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리라

   그리고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여기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는 이 말이 순한 말 같지만 대단히 강한 말입니다. 성경에는 부끄럽다는 말을 우리말 번역에 몇 곳에 했는데 그저 스쳐지나가는 상태의 부끄러움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우리가 구원을 받되 공력이 불탈 때 벌거벗은 것 같은 부끄러움을 얻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벌거벗으면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을 때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내어놓을 게 없어서 지옥에 던져지는 그 청지기의 모습이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여기 “누구든지 믿지 않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는 것이고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는 것은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했는데 여기 ‘부요’라는 말을 구원에 많이 사용합니다. 주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이 부요는 물질의 부요가 아니라 신령한 부요를 말합니다.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 능히 주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믿지 아니하면 부를 수 없고 듣지 아니하면 믿을 수 없고 전파하지 아니하면 들을 수가 없다는 이와 같은 논리로 복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명상용 주제가 아닙니다. 명상용 주제는 타(객관성)가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못 오해하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유명한 큰 스님 한 분이 이렇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많은 불도들은 염불을 오해하고 있다. 염불은 단순히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염불한다면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그런데 큰 스님의 가르침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내게 염한다.”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내 자신에게 염한다, 명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는 기도라는 개념이 엄밀히 없습니다. 절에 가서 빌지만 이것은 전혀 불경에 없는 기도의 형태입니다. 불교의 염불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기 때문에 내가 부처로서 나를 부처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내 자신이 내게 염하라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교와 기독교의 현격한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타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주가 되셔야 성립됩니다. 예수가 오셔야 됩니다. 그 분이 주가 되셔야 됩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께 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 많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찾아주셔야 우리가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게 기독교입니다. 철저히 타율의 종교입니다. 객관화된 종교입니다. 계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교는 자율종교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고 내가 신을 찾아가고 내가 신을 만드는게 이교입니다.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내가 믿었으면 타인에게 말해야 그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나 혼자 명상하고 나 혼자 좋다 하고 나 혼자 아멘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주인을 타인에게 말해야 됩니다. 내가 믿는 복음을 타인에게 말해야 됩니다. 그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진리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한결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허무하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분명히 말했어야 할 그 상대방 앞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 베드로는 그 순간에 믿음의 모든 것이 다 무너졌습니다. 베드로가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야 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의 믿음이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말해야 될 상대방이 나타난 그 자리에서 침묵하거나 예수를 부인한다면 베드로가 망가지는 이것처럼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망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 없이 피하든지, 너도 그 예수와 같은 당이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시인을 했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나도 그의 제자라고 시인을 했어야 합니다. 비록 고문을 당하고 그에게 불이익이 따라올지라도 그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시인했어야 합니다. 실패한 이 베드로의 모형이 베드로 혼자만의 사건으로 성경에 기록된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온갖 형태로 주님을 부인할 때가 많습니다.

   맺는 말

   사도 베드로는 그 문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어야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일이라.” 우리가 경건한 모양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라는 것은 경건의 모양 그 자체입니다. 내가 성경책을 들고 주일날 교회를 오는 이 자체가 경건의 모양입니다. 내가 목사다 하는 것은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이 부인될 때 우리가 오늘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예수님이 우리가운데서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경건의 행위가 나타날 때 우리 주 예수님이 그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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