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길교수 (장신대 신약학)
Ⅰ. 로마서 연구사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일어난 종교개혁은 그의 로마서 이해에서 시작되었다. 루터는 로마서 강해를 통해 바울과 바울서신을 다시 이해하게 되었고 이때 발견한 믿음에서 나온 하나님의 의가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을 통해 계시되며,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즉 이 의는 ''수동적인 의''(iustitia passiva)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개신교 신학과 교회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로마서』(제1판 1919년, 제2판 1921년)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을 넘어 『로마서』강해 서문에서 바울이 당시 사람에게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역사비평학은 정당하지만 영감은 더 정당하다. 특히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 바울의 신학자상을 강조하였다. 아돌프 슐라터(Adolf Schlatter)는 1935년 로마서 주석을 썼는데,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제목을 붙여 출판하였다. 여기서 슐라터는 바울의 메시지가 단순하게 루터의 해석과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이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1953년 『신약성서신학』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의 바울 부분을 서술할 때 루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반면에 에른스트 캐제만(Ernst Kasemann)은 1973년 출판한 자신의 『로마서』 주석에서 슐라터가 걸어간 길을 더욱 철저하게 따라간다. 캐제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가 로마서의 주제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의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본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캐제만은 그보다 앞서 『로마서』(제1판 1935년, 증보판 1965년) 주석을 출판한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를 능가하였으며, 세 권으로 된 『로마서』(1978-1982년) 주석을 쓴 울리히 빌켄스(Ulrich Wilkens)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캐제만의 제자인 페터 슈툴마허(Peter Stuhlmacher)는 1989년 출판한 『로마서』주석에서 로마서를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해석하였다.
Ⅱ. 로마서의 수신자 로마교회
로마에 있었던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고대문헌의 기록은 주전 139년에 처음 나타난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로마에서 아주 빠르게 성장하였는데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기』ⅩⅦ 300)에 의하면 유대의 왕 헤롯이 죽은 후 로마에 온 유대인 사절단을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8천명이 영접하였다. 주후 41년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41-54년)에 관한 보고에 의하면 글라우디오 황제는 로마에서 유대인의 수가 늘어나자 유대인에게 집회 금지령을 내렸다(Dio Cassius LX 6:6). 이를 보면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독자적인 집회 장소와 독자적인 관리 체계를 가진 독립적인 개별 공동체로 조직되어 있었다. 역사가 수에톤(Sueton, Claudios 25,4)에 의하면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통치 제9년인 주후 49년에 황제는 크레스투스(Chrestus)로 인하여 로마에서 일어난 유대인의 소요 때문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로마에서 있었던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대립과 그와 함께 유대교 회당에서 기독교 선교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교처럼 기독교 역시도 무역 통상로를 통해 로마에 들어왔다. 보디올(Puteol, 행 28:13)과 로마(행 28:15)에 바울 이전의 교회가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로마 제국의 동쪽과 로마를 잇는 통상로는 보디올을 거쳐 로마로 향하였다. 이 길을 통해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던 무명의 원시기독교 선교사들이 로마에 복음을 가져왔을 것이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은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에게도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 한 가지는 글라우디오 칙령은 기독교 교회를 회당에서 독립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며, 다른 한 가지는 로마에 있었던 유대인의 추방으로 인하여 로마 교회의 구성원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글라우디오 칙령 이전에는 로마교회 구성원은 유대인 기독교인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주후 49년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 이후 유대인의 추방으로 유대인 기독교인도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56년 초 고린도에서 바울이 로마서를 저술할 당시 로마교회 안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롬 1:5, 13-15; 10:1-3; 11:13, 17-32; 15:15, 16, 18). 그러나 그와 함께 로마서 9-11장과 16장 7-11절이 보여 주듯이 (바울의 친척인 안드로니고, 유니아와 헤로디온) 로마교회 안에 소수지만 유대인 기독교인도 있었다. ''강자''와 ''약자''간의 갈등(롬 14:1-15:13) 문제도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다수의 이방인 기독교인 중 많은 사람들이 고넬료처럼 세례 받기 전에''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무리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로마서 16장 3-16절은 로마교회 내 사회적 계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여기에 열거된 28명 중 26명은 이름이 밝혀져 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4)는 자영상인으로서 노동자를 고용했거나 노예를 부렸을 것이다. 로마서 16장 10절 하반절과 11절 하반절은 함께 그리스도인이 된 자로서 아리스도불로와 나깃수 집안에 속한 권속의 이름을 드는데 그리스도인이 아닌 주인의 집에서 일하는 종이나 종에서 놓임 받은 자일 것이다. 로마서 16장 3-16절에 기록된 이름을 비문(碑文) 연구를 통해 분석해 보면, 비문에 나타난 이름과 비교할 수 있는 13개의 이름 중에서 네 명은 자유로운 출신 신분을, 아홉 명은 자유롭지 못한 신분 유래를 보여 준다. 교회에서 해야 될 많은 일들은 여자들이 맡았다. 이는 여자들만 많이 수고했다고 칭찬 받았기 때문이다(롬 16:6, 12, 13). 로마서 16장 3-16절 단락에서 이름이 언급된 26명 중 열두 명은 로마 제국의 동쪽에서 로마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로마서 16장 3-16절 단락은 로마교회의 조직 형태에 대해서도 알려 준다. 로마서 16장 5절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주변에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한 로마서 16장 14절과 15절은 로마에 더 많은 독자적인 가정교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 이년동안 그의 셋집에서 그리스도인자들이 모였다(행 28:30-31). 이렇게 볼 때 당시 로마에는 큰 집회 장소를 가진 어떤 교회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에 있던 한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롬 1:7상) 보냈다.
로마서 저술 당시 로마에 있던 기독교 공동체는 이미 아주 크게 성장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들에게서 물질적인 지원과 인적인 지원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주후 64년 네로 황제(54-68년)의 기독교인 박해 역시도 로마 시에 성장하는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네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할 때 로마 당국은 이미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구분하여 기독교인을 따로 다루었다.
Ⅲ. 최근 로마서 연구의 관심사
1. 저작목적과 동기
저작 목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한 가지 이유를 드는 해명은 바울과 로마교회,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와 예루살렘 당국간의 복잡한 대화 정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M. Kettunen, Peter Stuhlmacher, Alexander J. M. Wedderburn). 로마서 저작 목적으로는 네 가지가 지적된다. 곧 바울은 ① 계획된 서바나 선교를 위해 필요한 로마교회의 지원 요청하며, ②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서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대립에 대한 중보기도와 지원을 바라며, ③ 예루살렘뿐 아니라 로마에서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유대주의적 바울 적대자들의 선동에 대처하고, ④ 자신의 신학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 로마서를 저술하였다.
2. 율법 이해
로마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진술(롬 3:20, 21, 28; 5:20; 6:14하)과 긍정적인 진술(롬 3:31; 7:12; 13:8-10)의 공존, 그와 함께 로마서의 율법 이해와 갈라디아서의 율법 이해의 관계는 어떤 해명이 필요하다. 특히 로마서 3장 27절의 ''믿음의 법''과 8장 2절의 ''영의 법''이라는 어구에 사용된''법''(nomos)의 의미가 논의된다. 로제(E. Lohse), 오스텐-작켄(P. v. d. Osten-Sacken), 한(F. Hahn)과 휩브너(H. Hubner)는 ''법''을 구약의 율법(Tora)으로 여기며, 그 반면 캐제만(E. Kasemann), 바울젠(H. Paulsen), 래이재넨(H. Raisanen), 첼러(D. Zeller)와 베버(R. Weber)는 ''법''을 그 비 본래적인 의미인 ''규칙, 규범, 규정''으로 이해한다. 바울이 이 ''법'' 용어를 항상 구원의 규정이 근본적으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에서 그리스도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지는 않는다.
또 로마서 10장 4절의 ''텔로스''(telos)에 대한 해석 문제도 논쟁이 되었다. 곧 이를 ''마침(끝)''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아니면 ''목표''로 번역해야 하는가라는 해석 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오스텐-작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성취되었기에 ''텔로스''를 ''완성'' 내지는 ''목표''로 해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달리 리츠만(H. Lietzmann), 불트만(R. Bultmann), 캐제만, 미헬(O. Michel) 등은 바울의 언어 용례(롬 6:21-22 참조)와 로마서 10장 4절의 문맥을 고려하여 그에 맞게 ''텔로스''를 ''마침''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중간 입장으로 빌켄스(U. Wilckens)는 그것을 ''목표''와 ''마침''으로 이해한다.
3. 7장의 ''나'' 문제
로마서 7장의 ''나''(ego)에 대한 해석도 최근 로마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신앙 이전의 나인가 아니면 신앙 이후의 나인가'' 또 그 ''나''는 바울 개인을 말하는가 아니면 일반적인 인간을 말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나 루터(Luther)는 그 ''나''를 신앙 이후의 나요 일반적 인간으로 해석한다. 즉, 그''나''는 복음 아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황에 관한 문제이다. 경건주의는 이 ''나''를 신앙 이전의 나이며 바울 개인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곧, 이는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회심하기 이전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하여 말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큄멜은 그 ''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일반적 인간으로 본다(R. Bultmann, W. G. Kummel, P. Althaus).
그에 의하면 로마서 7장에서 ''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의 비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7장 7절에서 8장 39절 단락이 로마서 7장 5-6절에 대한 해설이라면 큄멜의 입장이 적절하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서 7장 7절-25절 상반절 단락에서 우선 극복된 그리스도인의 사정과 함께 로마서 7장 5절(''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를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대립시키며, 그 반면에 로마서 8장에서는 영에 의해 결정된 새로운 존재와 함께 로마서 7장 6절(''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을 주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역시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라면 7장에서 말하는''나''가 기독교인 일반일 수도 있다.
4.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
로마서 9-11장의 해석에서 특히 11장 26절 상반절(''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의미가 논쟁의 대상이 된다. ''온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가 아니면, 단지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이스라엘 민족 일부만을 말하는 것인가'' 로마서 11장 20, 23절과 ''구원하다''와 ''구원'' 용어의 바울적인 용례에 의하면 후자의 입장이 옳다(F. Hahn). 가톨릭 신약학자 무스너(F. Mußner)는 그와 다르게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특별한 방법''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에 전개되는 이신칭의 주제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성비의 변화를 경험한 로마교회의 역사적 정황을 고려한다면, 한의 입장이 더 본문에 적절한 해석이다.
Ⅳ. 로마서 연구의 최근 동향
1. 에큐메니칼적 입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독일 교계의 자성과 함께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위한 여러 시도가 신학계에 나타났다. 유대인으로서 예수와 바울에 대한 연구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E. P. Sanders, 『예수와 유대교』와 『바울, 율법, 유대인』 등). 이런 분위기가 로마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진술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2. 역사적 접근
로마서를 시대 초월적인 교리서신으로 이해하던 종전의 입장과 달리 로마서 역시 바울의 선교 상황에서 기록된 ''상황서신''으로서 로마서를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따라서 로마서를 그 배경이 되는 로마교회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한다(P. Stuhlmacher). 물론 로마서 해석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 방식을 19세기 중반에 찾아볼 수 있다(F. Chr. Bauer). 그러나 로마서 이해에 대한 최근의 역사적 접근은 역사비평학 이후의 신학적 고려를 함께한다는 차원에서 이전의 역사적 이해와 구별된다.
3.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하나님의 의에 대한 폭넓은 이해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의의 수동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의''(iustitia passiva)이다. 그러나 현대의 로마서 주석자들은 바울이 그 이상을 말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뿐 아니라 그 의롭다 여김 받은 자가 실제로 의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Ⅴ. 로마서 6장 본문 연구
1. 들어가는 말
초대 교회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는 ''믿음 없는 행함''과 마찬가지로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항하여 싸워 왔다. 때로는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기독교 신앙을 세속적인 기복 신앙 내지는 복지 정신으로 변질시키는 신앙 없는 행동주의에 맞서 싸우기도 하였고, 때로는 기독교를 세상을 포기 혹은 단념하거나 세상으로부터 도피 내지는 은둔하는 단순한 내세종교로 이해하는 행함이 없는 신앙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교회가 어떤 세속 이념을 신봉하는 사회단체나 은밀한 비밀 집회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동시에 세상을 위한 선교''봉사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죄인을 위한 구속의 중재자일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창조의 중재자요, 우주의 통치자이기 때문이다(고전 8:6; 골 1:15 이하 단락; 히 1:1-4; 요 1:1-18 참조). 이런 점에서 볼 때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어떤 견해도 그 관계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아니다. 게다가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경건치 않은 자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믿음과 행함을 나란히 동일한 구원의 요소로 보는 신인(神人) 협력설도 결코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믿음 없는 행위자''가 되지 않고 또 ''행함 없는 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신약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조사하는 것은 불가피한 연구 과제이다.
2. 로마서 6장의 본문 풀이
바울서신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모범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본문은 로마서 6장이다. 본문을 풀이하기 위해 먼저 본문을 로마서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매겨보고, 요약적으로 풀이한 다음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2. 1 본문의 자리 매김
로마서의 몸체 부분은 ''하나님의 의'' 주제 전개의 관점에서 볼 때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곧 하나님의 의 계시의 필연성(1:18-3:20), 믿음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3:21-4:25), 종말론적인 자유의 실현으로서 믿음의 의(5-8장),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 문제(9-11장)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12:1-15:13)가 그것이다. 이 몸체 가운데 부분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의가 현실에서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죽음 권세로부터의 자유''(5장),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6장), ''성령의 권세 안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7-8장)라는 소주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주제들은 직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칭의(稱義)의 실현이라는 더 큰 주제 안에서 불가분(不可分)으로 공속(共屬)되어 있다. 바울은 5장에서 주장한 세상에서의 종말론적인 삶을 세상의 일상, 교회, 개인 실존의 현실로부터 설명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믿음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의 현실적인 의미를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 규정하고, 칭의자에게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의 시대 전환을 굳게 붙잡을 것과 이에 부합된 주권(통치권) 교체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6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서 바울은 죄에서 해방됨을 단지 죄의 권세에서 분리되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즉각적인 새로운 순종 관계로의 편입, 곧 새로운 존재 안에서의 영의 섬김으로 묘사한다. 바울은 전해 받은 세례 전승 본문(롬 3:25-36; 4:25)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관점으로부터 칭의 진술을 강조한다. 칭의자는 세례 받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속죄 죽음의 효능에 참여하게 되며, 그분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며, 살아 계신 주님이시요 화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세례와 칭의와 성화는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이러한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성은 성령의 권세 안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다루는 7-8장의 명제적 요약 구절인 7장 5-6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5-8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성령의 권세 안에서의 자유''라는 주제들이 단순하게 직선적으로,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칭의에 대한 현실적 해명이라는 과제 앞에서 통합적으로 설명되는 불가분의 한 덩어리이다. 특히 구원의 직설법을 묘사하는 세례 본문(6:1-11)은 칭의자에게 ''거룩함에 이르라''(6:19)는 권면으로 요구되는 행함 진술인 권고 본문(6:12-23)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 있는 한 단위 진술이다.
2. 2 본문 풀이
[1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이라 말해야 하나'' 은혜가 더하도록 죄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인가''
''그런즉''으로 시작되는 6장은 단순히 앞장에 대한 논리적인 인과 관계를 나타낼 뿐 아니라 5장과 연결된 한 덩어리임을 보여 준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5:20하)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가 더욱 넘치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의롭다 여김 받은 사람이 계속 죄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인가''
[2절] 결코 그렇지 않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아직도 그 안에 살겠느냐''
결코 그렇게 생각될 수 없다. 칭의자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과거)면 어찌 죄 가운데 여전히 살 수 있는가'' 6장 전체에서 16번이나 단수로 사용된 ''죄(hamartia)''는 구체적인 ''범죄''나''과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화(擬人化)된''죄의 권세''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자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거나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세자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이다.
[3절]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세례 받았던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세례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
이제 칭의는 세례와 함께 묘사된다. 세례 받을 때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수세자는 세례 받을 때 예수의 죽으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4절]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으로 들어가는 세례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그분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수세자는 예수와 함께 하나가 된다. 물론 이 하나 됨은 신비적인 합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례를 통해서 수세자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체가 되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그것은 수세자가 현실에서 영위할 새 생명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6:19 참조). 이러한 그리스도와 수세자의 하나 됨은 ''함께''-공식문으로써 묘사된다. 수세자는 그리스도와''함께 장사되었고''(4절), ''연합한(함께 합한) 자''(5절)가 되었으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6절), ''함께 살 것이다''(8절). 4절에''함께 장사되다''는 동사를 이어 뒤따르는 여격의 인칭대명사 ''그분''은 ''사귐(교제)의 여격''(dativus sociativus)으로 내용적으로는 8절의 ''그리스도와 함께''와 동일하게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나타낸다. 세례를 통해 수세자는 그리스도와 믿음의 사귐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기독교적 삶과 사고를 결정하는 중심적인 출발점이다.
[5절] 곧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일치하여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또한 부활에 일치하
여연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는 ''그분의 죽으심에''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일치하여''는 세례에서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화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동등하다''란 뜻이다.
[6절] 우리의 옛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것을 우리가 아는바 이는 죄의 몸이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죄의 몸''에서 ''죄의''는 여러 속격 용법에서 ''성질의 속격''(genitivus qualitatis)이다. 바울의 경우 죄를 지었던 칭의자의 몸은 동시에 ''죄로 죽을 몸''(12절)이다. 세례 받은 칭의자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죄에게 내어주어''종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7절] 그것은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이미) 의롭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믿는다.
[9절] 우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으니 다시는 죽지 아니하
고 사망이 그분을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된 자인 수세자에게 사망이 다시''주인 노릇할''수 없기 때문이다.
[10절] 그분이 죽으셨던 것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던 것이요, 그분이 사신 것은 하나
님에 대하여 사신 것이니
''죄에 대하여''는 ''대항의 여격''(dativus incommodi)으로 ''죄에 대항하여''라는 뜻이며, ''하나님에 대하여''는 ''호의의 여격''(dativus commodi)으로''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맞서서 단 번에 죽으신 것이며, 그분의 사심은 ''하나님을 위하여'' 다시 사신 것이다. 특히 9절에 언급된 ''다시 죽지 아니하고''와 ''다시 주인 노릇하지 못함''를 고려할 때''단번에''가 강조되어 있다.
[11절] 이와 같이 너희들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위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
이 구절에서 이제 6장 전반부를 마감하는 필연적인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므로 수세자는 이제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나님을 위해서는 산 자로 여겨야 한다. 여기서 ''여기다''는 단순하게 ''생각하다''는 뜻이 아니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처럼 ''판단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2절] 그러므로 (너희들이) 몸의 욕구에 순종하기 위해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세례론을 다룬 앞 단락(1-11절)에서 바울은 수세자가 이미 죄의 권세에 대하여 죽었음(2절과 6절)을 말한 다음, (교리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권면의 단락(12-23절)의 첫 머리에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윤리적인 관점에서) ''죄 짓지 말라''나 ''죄 짓지 말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죄''는 인간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인격적인 한 권세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죄의 ''권세 몰수''또는''권세 박탈''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칭의자가 새 생활을 영위하는 새로운 자세요 시계(視界)이다. 이제 죄로 하여금 더 이상''죽을 몸''을 주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몸''(soma)은 헬라적인 이분적인 개념에서 ''혼''(psyche)의 대립어가 아니라, 바로 13절에 언급된 수세자 ''자신''을 말한다. 이 ''몸''은 하나님이나 의인화된 권세인 죄와 사귈 수 있고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이며, 인간에게 어떤 권세가 다스리는 자리이며, 인간을 다스리는 권세가 교체되는 자리이다. 모든 사람은 몸을 입고 있으며 죄를 지을 수 있다(posse peccare). 수세자도 역시 유혹을 받을 수 있으며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죽을 것이다. 그러나 칭의자는 그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 이때 육체의 부활을 선취(先取)하는 것인 몸의 새로운 순종이 요구된다.
[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도리어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수세자는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의 권세에게 ''내어 주지 말고''(지속적인 현재 명령), 하나님께 (단번에) ''드려야''(일회적인 단순과거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세자는 하나님의 병기가 될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그 선물을 제공해 주신 하나님은 결코 분리될 수 없게 된다. 바울은 ''순종''이나 ''행함''과 같은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의 창조성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행함은 칭의의 메시지에 통합되어 있으며, 윤리는 신학에 통합되어 있다.
[14절] 죄가 너희를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죄가 더 이상 수세자를 주관하지 못한다. 그 이유로 두 가지가 언급된다. 하나는 수세자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음''은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지 않음''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은혜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때 ''은혜''는 칭의나 화해 또는 성령의 은사 받음 등의 용어를 내포하는 포괄개념이다. 바울의 경우 ''죄 아래 있지 않음'', 곧 ''죄로부터 자유함''이란 ''죄 지을 수 없음''이나 ''무죄함''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 자유함, 곧 하나님을 위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15절] 그러므로 어찌 하겠느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짓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이제 ''은혜가 더하도록 죄에 머물러 있을까''라는 1절의 질문이 변형된 논쟁 문체의 질문으로 다시 제기된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짓겠느냐'' ''여기서 분명한 결정이 수세자에게 요구된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다''로 대답하면서 그 이유를 16-23절에 자세하게 서술한다. 이로써 이 질문을 이전의 질문보다 더 강하게 부정한다.
[16절]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으로 순종하는 자든,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으로 순종하는 자
든, 너희가 너희 자신을 순종하려고 종으로 맡기는 자에게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죄로부터 자유함''이란 단지 ''죄의 권세로부터 떨어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어떤 순종 관계로 즉시 들어감''을 의미하며 ''영의 새로운 존재 안에서 섬김''(롬 7:6)을 의미한다. 따라서 ''죄로부터 자유함''이란 복종의 진공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순종''(nova oboedientia)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의의 종이 되는 ''주권 교체''를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주권 교체가 수세자에게 일어나야 한다. 그 주권 교체는 수세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에서 일어난다. 이때 ''순종''이란''믿음''의 다른 표현이다. 즉 순종은 믿음의 동의어이다(롬 1:5; 10:3; 11:30 참조). ''믿음''이란 은혜 아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며 순종하며 사는 삶이다. 죄는 하나님을 맞서지만 이러한 순종을 선택하는 것은 죄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게 한다. 바로 이 믿음의 순종이 의로 인도한다. 다시 말하면, 현재 주어진 구원의 선물 안에 그 선물에 부합된 삶을 요구하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17절]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가 (이전에)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가 전해 받
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며
[18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수세자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된 것에 대한 감사가 뒤따른다. 수세자는 의의 종이다. 수세자가 받은 의는 그 수세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의이다.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 곧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양도된 주권교체가 행하라는 요구의 전제이다. 또 죄에게서 벗어나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이루어진 어떤 상태라기보다 삶의 해방
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삶의 자유이다.
[19절] 너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내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한다. 이는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종으로 내어 주어 불법에 이른 것처럼 이제는 거룩함에 이르도록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단번에) 드리라.
[20절]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21절] 그때에 너희가 무슨 열매를 가졌느냐? 이제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일)의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22절] 그러나 이제는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너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가지고 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23절]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19-23절 단락에서 ''그때''와 ''이제''가 대립되어 있다. 그때는 ''죄의 종''(20절)이었으나, 이제는 ''의에게 종''(19절)이 되고 ''하나님께 종''(22절)이 되었다. 이것은 대조적인 공식문 안에 나타난 ''주권교체''를 요구하는 ''시대교체''와 관련되어 있다. 바울은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새 사람이 된 수세자, 곧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넘어온 칭의자에게 이에 합당한 주권교체를 요구한다.
바울은 19절과 22절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해명한다. 수세자는 ''거룩함''에 이르도록 자신의 지체를 의에게 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이란''믿는 자의 어떤 상태나 성질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을 위해 구별됨을 의미한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위해 요구하시는 것이 거룩이라면, ''성화''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일치하는 행동이며, 또한 그러한 행동의 결과이다. 로마서 6장 전체에서 나타나듯이 구원의 은혜는 성화의 요구 앞에 놓여 있다.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자만이 죄의 종이나 의의 종,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16절) 거룩함은 자유인 동시에 섬김이며, 종말론적인 목표인 거룩함(롬 6:22; 살전 4:3-4 참조)은 ''의의 열매''를 통해 선취(先取)된다(롬 6:19-23; 빌 1:11). 하나님의 뜻은 칭의자의 거룩함이다. 이 ''거룩함''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이며, 그것은 수세자가 자신을 의에게 드려 하나님의 종이 됨으로써,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칭의가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처럼, 성화 역시도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는다. 바로 이 ''거룩함''의 개념에서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순종은 함께 만난다. 이렇게 바울의 경우 하나님의 선물인 ''칭의''와 선물 받은 자에게 요구된''과제''는 불가분으로 서로 공속(共屬)되어 있다. 곧 ''성화''는 ''칭의''와 다른 개념이 아니라, 수세자의 삶에서 영위되는 ''칭의''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하나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종이 된 자를 끝까지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한다. 이렇게 볼 때 ''거룩함''이란 일차적으로 믿는 자가 점진적으로 종교적인 완전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포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세자에게 성화 역시 칭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으며, 칭의가 하나님에서 난 것처럼 성화 역시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그에게 세례 받은 자의 삶은 ''하나님에게서 난 삶''(life from God)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life with God)이다.
3. 신학적인 결론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하나님 또는 의에 대한 순종을 위하여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룬다. 이때 ''죄에서 자유함''이란 ''죄의 권세에서 자유함''을 의미하며, 그것은 내용적으로 수세자가 새로운 순종을 위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은혜로 주어진 구원의 ''선물''(Gabe)과 이것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과제''(Aufgabe)는 양자 모두 ''그리스도의 주권''(Regnum Christi) 아래 있는 수세자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칭의''(믿음)와 ''성화''(행함)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성화''란 수세자에게 세례 받은 이후 변화되는 다양한 상황 안에서 또 새로운 순종 관계 안에서 늘 새롭게 경험하는 칭의이기 때문이다.
개신교회는 수세기 동안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연속적 혹은 발전적인 구원의 단계라는 관점에서 직선적으로 여겨 왔다. 즉 ''구원의 길''(ordo salutis)의 도식에서 칭의는 성화의 전제로, 성화는 칭의의 후속 단계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인과적 내지는 단계적 이해는 칭의를 기독론이나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론 내지는 실존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칭의를 은혜로 선물 받은, 혹은 의롭다 여김 받은 칭의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선물을 그 선물 주신 분에게서 분리하여 칭의를 바울이 강조하는 죄의 권세로부터 의에게 드려진 ''주권교체''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두 선물이 아니다. 성화는 시간상 칭의의 다음 단계로 칭의의 후속 과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화는 칭의와 함께 일어난다. 칭의는 성화를 요구한다. 성화는 칭의에 대한 감사와 기억이며, 새로운 순종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칭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인 칭의는 단순한 성화의 전제가 아니며, 또한 성화 역시 단지 칭의에서 유래되어 나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화는 선물 받은 확실한 증거로 선물 받은 칭의자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성화는 칭의와 동시에 일어난다. 칭의와 성화를 시간적인 전후(前後) 순서 안에서 인과(因果)론적으로 이해하고 성화를 단지 칭의의 다음 단계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본문에 전개된 바울의 사상과 온전하게 일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칭의와 성화를 상호 교호(交互)적인 통합성 안에서 이해할 때 로마서 6장뿐 아니라 바울서신 전체 본문과도 어울린다. 성화는 경험되는 칭의라는 점에서 동시적이다.
바울에 의하면 바울신학의 핵심 개념인 하나님의 의는 칭의의 선물일 뿐 아니라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울은 확실히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구원주 내지는 심판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길 뿐 아니라, 그 의롭다 여김 받은 칭의자로 하여금 현실에서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본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칭의는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서 심판 때 무죄를 선고하시는 ''법정적인 칭의''(iustificatio forensis)이다. 그뿐만 아니라 또한 ''창조주''하나님께서 칭의자에게 실제로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능력''을 주어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효과적인 칭의''(iustificatio effectiva)이다.
바울은 복음을 선포할 때''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와 함께 동시에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해 말함으로써 단지''값싼 은혜''뿐 아니라 분명하게 ''값비싼 은혜''도 가르치고 있다(롬 2:16 참조). 바울의 경우 믿음은 단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여기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섬기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것을 이루게 한다(롬 6:17-23).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시간적 ''단계적 도식에 따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보다, 세례 시 칭의자에게 일어난 죄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주권을 이양(移讓)하는 ''주권교체''의 관점 아래 상호 교류적인 통합적인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원래 진술 의도에 일치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 받은 수세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것이다. 수세 시 칭의자에게 요구되는 성화의 방법은 하나님께 종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며(롬 6:19-23),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드림으로써만 가능하다(롬 12:1-2).
4. 나가는 말
로마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의 권면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가 통합적인 관계임을 깨우치려는 교화(敎化)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곧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가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 자신에게 일어난 주권교체에 부합되게 함으로써, 선물을 주신 하나님과 분리됨이 없이, 자신에게 부과된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의의 병기라는 것을 알리려는 바울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바울은 윤리를 자신의 신학에 통합시켰다. 신학은 윤리를 요구하며, 윤리는 신학에 상응한다. 칭의는 성화의 기초이며 성화는 경험되는 칭의이다. 새 생명의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의 종이 됨으로써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림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에게서 칭의자의''행함''은 결코 ''업적''이나 ''공로''로 이해되는''일''이 아니라 ''섬김''으로 이해되는 ''열매''이다. 행함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해되고 섬김으로 파악될 때 믿음은''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으로서 행함과 통합적인 관계 안에 놓이게 되며, 믿음과 행함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쌍방향에서 서로 교류하는 통합적인 관계 안에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바울서신에 진술된 윤리적인 본문을 이해하고 전할 때 고려해야하는 출발점이요 바울 윤리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 윤리는 그 신학적인 기초를 잃은 도덕이나 일반적인 덕론으로 전락할 것이며, 칭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나 성화를 단지 인간에게 맡겨진 일이나 소임으로 잘못 이해하는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에 빠질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는 믿음과 행함의 괴리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믿음과 행함, 칭의와 성화, 선물과 과제를 분리됨 없이 통합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다시 한번 로마서 6장에서 외치는 바울의 간절한 선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안동교회농촌목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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