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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본문 마5:1-1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여덟 가지 복, 팔복에 대한 말씀을 계속 전하고 있는데 오늘은 네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 네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욕구 가운데 가장 강렬한 욕구는 삶에 대한 욕구입니다. 죽지 않고 살기를 원하는 욕구, 이 보다 더 강렬한 욕구는 없습니다.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성도에게 엊그제 제가 전화로 심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몇 번 우리 부교역자들이 심방을 하여 감사헌금을 가져왔는데 암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그런 간절한 소원을 그 봉투에 써서 가져온 것을 보았습니다. 삶에 대한 욕구입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된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먹고 마심에 대한 욕구는 곧 생존에 대한 욕구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육신의 생명이 살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어야 되지만 인간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음식 갖고는 되지 아니하고 진리를 먹어야만 삽니다. 그래서 인간이 진정 행복자가 되기 위해서는 육신이 요구하는 물질도 있어야 되지만 영혼이 요구하는 진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의는 곧 진리요, 의는 믿음이요, 이 의는 성령이요, 이 의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간절히 소망할 때 영적인 배부름, 여기서 배부름은 만족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배부름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배부름을 만끽했던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기 영적인 배부름을 만끽하는 사람의 노래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그가 역시 사랑했던 가이오라고 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 그랬고, 바울이 세운 여러 교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3주동안 집중적으로 성경공부 시켜 세운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라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들이 예수님의 강림하실 때까지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내가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육신 생활이 잘된 뒤에 영적 생활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절대로 순서를 바꾸지 않습니다. 먼저는 영혼이 잘 되어 지면 그 다음에 범사도 잘 되어지고 강건해 진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의 선한 의지는 평강입니다. 샬롬,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영적 배부름과 함께 육적 배부름이 함께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 하는데 있어서는 언제나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육신생활이 편안하고 배불러 부족함이 없는 이후에 영혼의 문제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영혼의 배부름이 내 안에 있을 때 그 다음에 육적 배부름이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순서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일순위가 아니고, 네 영혼이 하나님 나라를 만끽하는 것이 일순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고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인생의 가치 체계에 육신을 일순위에 놓습니다. 그래서 건강이 제일이다. 건강하려면 잘 먹어야 된다. 무엇을 먹어야 되는가? 건강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습니다. 까마귀든지, 부엉이든지, 올빼미든지, 그것도 잡아먹고, 오소리든지, 여우든지, 뱀이든지 잡아먹고, 지렁이도 좋다면 먹고, 굼벵이도 좋다면 먹습니다.
하여튼 돈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좋다면 다 먹습니다. 어떤 분은 너무 좋은 것만 많이 골라 먹어 가지고 몸에 기름기가 너무 많아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심장병에 걸리고, 당뇨병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먹지 못해서 굶어죽는 사람들도 있거니와 너무 잘 먹어서 빨리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먹고자 하는 욕구,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은 그 욕구가 지나쳐 욕심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 욕심이 바로 죄가 되고, 그 욕심을 계속해서 부리게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도 마음에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어떤 충격과 큰 슬픔과 두려움이 있게 되면 건강은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건전한 정신이 건전한 육신을 만들어낸다. 네 영적 기쁨이 넘치는 곳에 육신의 건강도 보장된다. 늘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서 15: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 그랬고, 잠언서 17: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뼈가 마른다는 말은 골수가 말라붙는다는 뜻입니다.
골수가 말라붙어 버리게 되면 피를 생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건강은 피에 있습니다. 골수가 윤택해야 새 피를 자꾸 만들어 건강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잠언서 3:7-8절 말씀에 보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죄악을 멀리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뼛속에 있는 골수가 윤택하게 되면, 언제나 좋은 피를 자꾸 만들어서 몸에 공급하기 때문에 병과 관계없이 건강을 유지하며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질병과 병, 그리고 죄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에서 빗나간 것, 그것을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과녁판을 빗나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경, 하나님 말씀의 생각과 빗나간 것이 죄입니다. 우리의 언행이 말씀에서 빗나간 것이 죄인데 죄를 범하면 영혼이 무너지고, 육신이 무너지고, 생활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너지지 아니하고 계속 세워지는 그런 만족한 풍성한 생명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 복이 있다.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목말라 한다는 말은 물이 너무 먹고 싶어서 기다리지만 물이 없어서 마시지 아니하니 입이 바싹바싹 말라 들어가는 그런 경우를 여기에 목마름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목마른 사람은 물을 구합니다.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 생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 물은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근본인데 물이 있으면 거기 동식물이 자랍니다. 물이 있는 곳에 있는 곳의 나무는 물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는 나무보다 훨씬 성장속도가 빠릅니다.
저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다운타운 공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보면 이 아름드리 고무나무 세 그루가 있는데, 얼마나 나무가 크든지 무더운 여름에 그 그늘 속에 들어가면 아주 시원합니다. 그런데 그 고무나무가 그렇게 아름드리 큰 나무로 클 수 있었던 이유를 그곳 사람들에게서 듣고, 그 안내 책자에서도 보았습니다.
200년전에 그 L.A에 큰 지진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의 그 구역이 폐허가 되고, 나무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때 심어놨던 고무나무 밑에는 반석이 깔려 있었고, 지진으로 인해서 반석이 동강이가 나 금이 가고 틈새가 벌어졌는데 그 틈새 사이로 고무나무 뿌리가 뻗어가니까 그 반석 밑에 지하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생수의 강까지 뿌리가 뻗어가면서 그 때부터 나무가 자라서 지금도 큰 나무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는 물이 있는 곳을 향해서 한없이 뻗어갑니다. 그리고 물을 만나면 더없이 기뻐합니다. 그래서 큰 나무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물 가운데는 두 가지 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 생명을 유지하는 물이 있고, 하나는 영적 생명을 살게 하는 물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이라고 하는 곳에 갔는데, 때가 정오쯤 되었습니다. 정오쯤 되면 아무도 우물에 물 길러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로 아낙네들이 아침저녁으로 우물가에 모이지 낮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여자여, 나에게 물을 좀 달라. 그 말에 여자가 가만히 바라보니 사마리아인이 아니고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이조시대 무슨 양반, 상놈 그런 의식이 있는 것처럼 그 나라에도 유대사람들은 양반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상놈으로 취급했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만은 이 시간에 다 소개할 수 없고 아무튼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나에게 말을 거십니까?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먼저 나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다. 그때 여자가 다시 놀라면서 아니, 이 우물은 깊은 우물이고 또 물을 길을 수 있는 그릇도 없는데 내가 물을 달라고 한들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물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말을 합니다. 네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를 수 있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보니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닙니다. 그럼 그런 물 나도 좀 주십시오. 그래서 나도 여기에 물을 길러 올 필요가 없게 해주십시오. 했더니 주님께서, 그래, 네가 그런 생수를 원하면 네 남편을 불러와라. 내 남편이 없습니다. 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는 남편 5명이 있었느니라.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지. 이 말에 여자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분은 선지자다. 나의 과거의 부끄러운 수치를 다 알고 있구나.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내가 보니 당신은 메시아요 선지자입니다.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과거를 알고 있는 주님 앞에 자기는 죄인임을 발견하고 또 예수님이 죄많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그는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고, 물동이를 우물가에 버려둔채 동네로 달려가 선지자가 왔다! 나의 모든 과거를 다 알고 있는 분이 계시다. 이 말을 듣고 동네사람들이 우물가에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을 구원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는 생수,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그것은 바로 성령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7:37절 이하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것은 생수 같은 성령, 성령이 우리 속에 임해야 우리 영혼이 소생함을 얻고 새 힘을 얻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그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하늘나라를 맛볼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수를 구하는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은 네 과거의 잘못된 삶을 이제 청산하라. 더 이상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주님의 요구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생수를 구하는 자는 과거를 청산해야 합니다.
죄악된 삶을 버리고 예수로 더불어 새롭게 출발한다면 그때부터 주님으로부터 나온 생수가 그 생애를 완전히 적시게 될 것이고 부족함이 전혀 없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409장에 목마른 내 영혼 주가 이미 허락한 그 귀한 영생수 주여 갈망합니다 그 약속 따라서 힘써 간구하오니 오 주여 내 기도 어서 들어 주소서.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이 생수에 대한 찬송이 많이 있습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이 샘에 오면 마시게 되리. 신기한 샘물을 마시는 자마다 목 다시 갈하지 아니하고 속에서 솟아나 생수가 되어 영원히 솟아나 풍성케 하리. 이 샘의 이름은 생명의 샘물, 저 수정빛같이 맑도다. 어린양 보좌가 근원이 되어 생명수 샘이 늘 그치지 않네.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샘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예수님에게서 이 생수를 얻고 그의 삶에 배부름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행 2: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생수, 그리고 생명의 떡으로만 인간은 영적 배부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배부름이란 말의 의미는 풍성한 삶을 의미합니다. 이 풍성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만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떤 자에게 이와 같은 배부름이 있습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이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고 시편 1편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 마음의 평안, 인생살이의 즐거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만족한 상태, 이런 배부름이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주님이 주시는 영적 배부름이 있는 자는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잎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낸다는 말씀이 시편 92:14-15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속의 생수의 샘이 흐른다.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하나님의 제단에서 스며 나오던 생수가 처음에는 발목에 그 다음에는 무릎에, 그 다음에는 허리에, 그 다음에는 헤엄칠 물이었는데 이 물이 강을 이루어 유다 남쪽 황무지로 뻗어가니 황무한 땅이 옥토가 되어지고 이 생수의 강이 죽음의 바다, 염해로 들어가니 염해바다가 살아나고 거기의 많은 고기가 떼를 지어 헤엄치니 어부들이 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수 강가에 서있는 나무의 실과는 달마다 새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의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생수의 강이 흘러 들어가면 소성하고 번성하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생수가 우리의 심령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면 언젠가 소성하고 번성하고 번창하고 왕성한 역사가 있게 됨을 믿습니다. 여러분, 심령의 배부름을 얻는 복의 근원이 되어지면 여러분의 가는 곳곳마다 그런 새역사 창조가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35:7절 말씀보면,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이 눕던 여기 시랑은 여우과에 속한 짐승이름인데, 시랑이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띄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여러분, 빛이 오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하늘에서부터 기쁨이 몰려오면 슬픔과 고통과 이런 것들은 다 물러가는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들 속에 계속해서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에 의에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하나님께서 허락한 배부름, 그것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사랑의 감정을 갖습니다. 목숨 다 바쳐 주를 사랑하고 싶고, 목숨 다 바쳐 영혼구원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속에는 언제나 희락이 있고, 화평이 있고, 오래 참음이 있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있으니 이와 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한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면 우리의 정욕과 욕심은 다 십자가에 못 박혀 버리게 된 것이니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사라지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드러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고, 좋은 열매 맺는 백성만 들어갑니다. 이 말씀은 마 21:43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 빛의 열매, 입술의 열매, 의인의 열매,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 열매 가득 맺힌 사람들을 위하여 천국은 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마태복음 3:8절 이하에 너희가 마음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고, 우리는 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도 말하지 말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다 찍어서 불에 태우시리라. 나는 너희로 죄를 회개케 하기 위해서 물로서 세례를 베풀지만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능력이 많으신데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들은 모아 천국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 같은 사람들은 불에 태운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일까? 여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앞에 의롭게 살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은 깨끗하게 한 번 살고자 하는 뜨거움을 가진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다는 말은 바르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뜨거운 사람들, 옳게 정직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사람들, 그게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고 싶은 열망이 있습니까?
은혜를 사모합니까? 저는 지난번 뉴저지주에서 집회하고 있을 때 워싱톤에서 목회하는 분이 다섯시간 동안 운전하며 왔습니다. 은혜 사모하여, 은혜 받으려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생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뜨겁고,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에 대한 열정도 뜨겁고, 아니 내 자신이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아보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하여 아무도 그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는 사람,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돈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돈에 주리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될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하니까 돈, 돈 그러지 부자들한테 물어보십시오. 부자들도 고민 많고 부자들 가운데도 자살하는 사람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바로 맺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과의 관계가 평생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고, 그 분과 대화하고 싶고, 좋은 것 생기면 그 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게 사랑의 감정입니다. 진정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모한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목적이 세 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3:14절에 나옵니다. 이에 열두 제자를 세우셨으니, 그들을 부르신 목적 첫째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이게 첫 번째 목적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길 원해서입니다. 주님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은혜를 그들도 함께 힘입기를 원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가 전도도 하게 하시며, 두 번째 목적입니다. 세 번째는 귀신들도 내쫓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의 권세가 그들에게도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쫓는 권세, 그런 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먼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있을 때, 주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이런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줄 모르고 어둠의 세력, 마귀와의 싸움에서 아예 두 손 들어버린 사람은 문제는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이 아깝습니까? 성경 읽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합니까? 예배드리는 시간이 너무 좋고 성경 배우는 시간이 너무 좋고, 내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배부름을 얻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의 자리가 너무 좋아서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거기 엎드려 기도하는데 세 제자가 보니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이 입었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더불어 이야기합니다. 너무 황홀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제안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내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주님 위해, 하나는 모세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짓겠습니다. 너무 좋으니까.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은혜의 자리가 너무 좋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 하는 사람도 보십시오. 이 교회를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은 이 교회가 너무 좋아서 어떤 특별한 소명이 있지 않은 한 안 떠나지 않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다함이 없습니다. 여기 다함이 없다는 말은 은혜의 맛을 본 사람은 더 은혜 받고 싶어서 더 열심을 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인데도 이렇게 말을 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은혜 받은 사람은 이만하면 됐다는 사람은 없고 더 은혜를 받으려고 그럽니다. 이게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니 이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주님이 배부름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법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하늘의 법을 따라 삽니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성별되게 살아갑니다. 고후 6:14절 이하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더욱 목마르시기를 바라고 더욱 배고프시기를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이 뜨거움을 의에 주리고 목마름같이,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십시오. 그런 자에게 주님은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채우시고 영혼에 만족함을 줄 것이고 영적 부유함이 있게 된 이후에는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들 더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최낙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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