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충성의 열매 (본문 마25:14-23)

by 【고동엽】 2022. 9. 29.

충성의 열매  (본문 마25:14-23)


1947년 미국의 시카고 근교의 위스칸신 주에 있는 천체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과학자, 천체물리학자 닥터 첸드리스카 박사는 시카고대학 University of Chicago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박사님 겨울방학 동안에 저희 대학에 와서 고급물리학 Advanced Physic에 관한 특별강의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몇 주후에 다시 대학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사님 아무래도 강의를 cancel해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클래스가 너무 작아서요. 두 명밖에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첸드리스카 박사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클래스가 작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두 학생, 등록한 학생의 information이 어떤지요 그래서 알려줬어요. 그러니까 첸드리스카 박사는 제가 강의를 하죠. 그래서 그 겨울동안, 시카고의 겨울은 유난히 춥습니다. 눈보라, 차가운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시카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일주일에 이틀동안 한번도 빠짐이 없이 그는 계속적으로 이 겨울동안 강의를, 두 학생을 상대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꼭 십년이 흘러갑니다. 이 첸드리스카 박사에게 강의를 받았던 두 사람이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첸넝 양 박사라는 분이고 그리고 또 한 분은 충도 리라는 중국계의 미국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상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데는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놓고 강의했던 첸드리스카 박사의 강의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성실한 강의, 두 사람을 앞에 둔 이 한 분의 강의가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 했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소위 탈란트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얘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다섯 달란트 남겼던 사람, 또 두 달란트를 가지고 두 달란트를 남겼던 사람에게 칭찬을 내리면서 유명한 이런 칭찬을 내렸습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너희들에게 맡기마.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 계절, 우리는 일년 동안에 우리들의 섬김을, 우리들의 봉사를, 우리들의 미션을, 사명을 결산해 봐야 할 중요한 시점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한해동안 우리의 삶의 장, 사역의 장에서 우리의 봉사는 얼마나 충성 되었다고 결산할 수가 있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22장5절 이하에 성령의 열매를 가르치면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그 다음에 뭐겠어요? 충성. 일곱 번째 열매가 바로 충성의 열매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성령을 체험하고 주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다스리신다면 마땅히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할 중요한 열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충성의 열매, 혹은 신실함의 열매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무엇이 이 칭찬을 받았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을 착하고 충성 된 종이 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전 일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을 결산하는 그 날 여러분과 제가 충성 된 종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반드시 대답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무엇이 여러분과 저를 충성 된 종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맡은 자의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맡은 자의 의식, 혹은 청지기 의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죠. 자, 본문의 14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4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그가 먼 나라로 떠나가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어떻게 요. 맡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맡겼다. 종들 편에서는 주인이 맡겨 주신 것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맡은 자들.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인이 맡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매니저에 불과했습니다. 좀 더 고대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그것이 청지기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Steward. 그들은 맡은 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맡았느냐 그것은 오늘 본문의 중요한 포인트는 절대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맡은 것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느냐 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자와는 다르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적게 받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에게 맡겨진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뭐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죠. 그러나 본문을 푸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본문에서 19절의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다 같이 시작.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자 주인이 돌아오는데 성경은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혹시 한 달란트 맡았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주인이 떠나간 후에 오랜 동안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마도 주인은 영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 그리고 맡겨주신 것에 관해서 전혀 책임의식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중요, 강조되어야 할, 우리가 주목해야 할 포인트라고 생각을 하는데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25장의 한 부분이고요 마태복음 25장 전체를 읽어 보십시오. 또 선행하는 장 마태복음 24장을 읽어 보시면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한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주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사건 소위 second coming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기독교인들이라면 주님의 재림을 믿는 다고 쉽게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두뇌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정말 주님이 오실 것을, 다시 역사와 시간 속에 그 분이 돌아오신다, 이 사실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십니까? 그 분이 다시 돌아오실 것이고 따라서 내가 살아왔던 삶, 또 인류의 모든 역사는 그 분 앞에서 반드시 심판되고 결산 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서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종말론적 신앙. 이 종말론적 신앙이란 말은 세상이 끝난다 그래서 아우성을 치고 뭐 집을 떠나고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등지고 산으로 올라가든지 기도원으로 올라간다든지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니 예요. 이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 속에 다시 오실 수 있는 그 분, 그리고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고 결산할 그 분 앞에서 언제 역사가 종말이 와도 내 개인의 종말이 언제 와도 그 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되어져야 할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본질이 예요.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내 삶은 심판된다 회계의 날은 온다 결산의 날은 온다 그 날은 반드시 온다 이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오늘 하루하루의 삶은 그 분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야 할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십니까? 매우 중요한 것이죠.

자,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듯 저와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을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무얼 맡기셨습니까? 시간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재능도 맡겨 주시고, 은사도 맡겨 주시고, 또 우리의 몸도 맡겨 주시고, 우리의 목숨, 인생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하죠. 내가 돈이 얼마나 많으냐 이거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 예요. 나에게 맡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능과 탈란트를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탈란트, 탁월한 재능을 갖고도 별로 볼 품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적은 재능을 갖고도 그것을 아주 유익하게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인생에서 얼마나 기회가 주어졌느냐 출세할 수 있는 기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 인생에서 얼마나 좋은 기회가 주어졌느냐 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리고 나서 우리의 삶을 다 살고 맡겨 주신 모든 것들을 다 관리한 후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들은 모두 둘 중에 하나로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 된 종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할까요? 우리 인생이 결산 되는 그날 착하고 성실한 종, 충성 된 종으로 결산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맡은 자 의식 이예요. 청지기다, 청지기다.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한해를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금년 한해의 삶이 주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그런 삶의 모습들이 비추어진다면 새로운 천년, 새로운 내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맡은 자의 의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맡은 자. 인생은 짧고 시간은 짧습니다. 그 동안에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삶, 주님 내가 청지기임을 잊지 말게 도와 주십시오. 여러분과 저의 의식 속에서 이 맡은 자의 의식, 청지기의 의식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이 계절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정말 충성 된 종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중요한 의식을 저는 신뢰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신뢰하는 의식.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종들이 또 다른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그들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칭찬하시죠.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여기서 충성이란 단어를 다른 말로, 가장 근사치에 본래의 뜻대로 다시 옮긴다면 그것은 믿음직스럽다 라는 뜻입니다. 믿음직스럽다. 실제로 믿음이란 단어에서 충성이란 단어가 나온 것 이예요. 피스테란 말이 믿음직스럽다 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직스럽다는 말은 철저하게 우리의 내적인 성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실성, 겉으로 드러난 어떤 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간직 되어 있는 내적인 성실성,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중요한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겉으로만 쇼업하는, 쇼업하게 바쁜 시대가 된 것처럼 보여집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요. 사실인지 누가 꾸며낸 이야긴지 모르겠는데 어떤 자매 하나가 취직하려고 비서로 취직하려고 어떤 사무실에 갔습니다. 마치 벤처기업 같은 젊은 사장이 조그만 사무실 하나 만들고 사람을 모집한 것입니다. 한참 사무실을 꾸미고 있어요. 그러면서 이 비서로 자원했던 이 자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의 초점은 나를 멋있는 사장으로 당신이 만들 수 있느냐 나를 잘 이렇게 선전해 주고 PR해 줄 수가 있느냐 하면서 내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훌륭한 사람인지 이런 얘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누가 사무실 문을 노크합니다. 쉬~ 내가 하는 거 잘 보라구.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이 사람이 전화를 탁 들더니 막 뭐라고 떠들어요. 아 그러십니까 아 회장님 하면서 막 얘기를 합니다. 전화 한참 후에 끊더니 아 죄송합니다. 마침 기업체 아무개 회장님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요. 그래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유니폼 입은 사람이 요렇게 한참 쳐다보더니 저요 이 사무실 열었다고 그래서 전화선 연결하려고 전화국에서 왔는데요. 물론 이 자매가 그 회사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일수록 우리 세상은 성실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성실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의 성실의 문제는 크리스챤에게 있어서는 내가 성실한 사람이 되자 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 예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는 성실한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성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 찬송가 불렀잖아요? 오 신실하신 주. 우리 신명기 32장4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하기를 하나님 당신은 진실무망하십니다. 당신은 성실하십니다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 성실하신 하나님은 역사와 우주를 성실하게 섭리하고 계시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성실한 미션을 주셨다. 이것은 믿는 자들, 거기서부터 우리의 성실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좀 성실해보자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그러나 아직도 성실한 가치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 그 분은 성실하시며 그 분은 인생들에게 어떤 성실한 과제를 맡겨 주신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내 인생을 걸고 성실을 향해서 나의 존재를 만들어 갈 수가 있는 중요한 기초가 있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성실의 작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한 달란트 받았던 종, 유일하게 칭찬 받지 못하고 책망을 받았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경우에는 이 주인관이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어 있었습니다. 성실한 가치가 없다 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성실하게 살게끔 되어 있는 거예요. 아무렇게나 이 세상에 뭐 그냥 그냥 출세하는 게 뭐 제일 중요한 거지. 역사관에 어떤 성실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성실한 인생을 추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세계관의 중요한 전제, 밑바탕에 숨어있는 하나의 전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문제가 어디 있느냐? 자기에게 그것을 맡겨 주신 주인을 믿지 못했어요. 주인을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 24절, 마태복음 25장에 24절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5장24절 다같이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자, 주인을 향해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당신은 인색한 사람입니다. 주인보고 인색하다 그랬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혹은 두 달란트를 주면서 나에게만은 왜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았느냐. 당신은 나에게만 짜고 인색한 분이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숨어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달란트란 것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서 금 달란트면 적게 쳐도 20년은 살 수 있는 생계비에 해당되었다고 해요. 20년을 살아갈 수 있는 생계비.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앞으로 20년, 내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20년을 살 수 있다. 적어요? 커요? 감동이 안 됩니까, 20년? 네, 굉장한 거죠. 20년. 자기의 20년이란, 아 그래도 나에게도 이렇게 많이 맡겨 주셨구나. 고맙구나. 내가 이것을 제대로 잘 관리해야 되겠구나 생각하는 대신에 거기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아니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왜 나에게만 한 달란트를. 왜 이런 불평을 가졌을까요? 비교하니까 그래요. 비교. 이 비교라는 것이 항상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죠. 비교 그러면 저는 늘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얘기 하나가 있는데 전에도 아마 여러분에게 이 얘기를 드렸을 것 같아요.

미국의 어떤 도시에 지방 시골 도시에 목사님 한 분이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부임하고 보니까 그 교회 안에 아주 깡패 같은 형제가 있어요.. 교회는 나와요. 동네에선 아주 불량하고 사람들 못 살게 굴고 빼앗고 행패도 부리고 그러면서도 교회에 나오는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런 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형이 죽었어요. 어느 날 죽었어. 동생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목사님 장례식을 잘 치뤄 주셔 야죠. 목사님 앞으로 부임하셨으니 여기 새 교회도 지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blank check을 빈 수표를 하나 주면서 여기에 목사님 필요한 만큼 제가 다 도와 드릴께요. 그 대신 저의 형님 장례식을 잘 지내주시기 바랍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장례식 주례사를 할 때 저의 형님에 대한 얘기를 잘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꼭 이 말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형이 좀 성자 같은 사람이었다고. saint였다고 말해 주시겠습니까? 목사님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해 보죠. 자, 드디어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동네 유명한 깡패가 죽었으니까 동네 사람 다 왔어. 그래서 목사님의 그 장례 주례사가 시작됩니다. 한참 크라이맥스에서 형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이 고인은 우리 동네에서 유명했던 분입니다. 불행히도 그 분은 동네 많은 사람 가슴 속에 상처를 주었고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커다란 고통과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던 사람입니다. 참 많이 인생을 잘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고인은 살아있는 형제에게 비교하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성자였습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저는 이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만약 비교했다면 불평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있죠. 왜?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이 어떻게 불평할 수가 있습니까? 왜 나에게만 두 달란트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이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존재하죠. 나보다 더 많이 있는 사람 존재합니다. 그러면 항상 난 비참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초점을 거기다 맞추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 주셨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내가 이만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맡기셨겠지. 만약 그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의 주어진 인생의 미션 앞에 성실했더라면 얼만큼 달라졌을까요? 이게 바로 신뢰하는 의식 이예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식.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나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또한 신뢰하는 믿음. 여기서부터 우리의 성실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인생을 다 살고 살아계신 주님 앞에 역사의 심판자이신 그 분 앞에 우리가 충성 된 종으로 나타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신뢰하는 의식. 인생을 너무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이렇게 보지 마시고 항상 비교하고 그러지 마시고 늘 신뢰하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 주셨다. 신실하신 하나님 저는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모세가 뭐 그렇게 탁월했던 사람이 아니라 나는 말도 못하고 그런데 어떻게 이 백성을 설득해 갖고 이 백성을 이끌고 나갑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랬더니 믿었어요. 모세가 믿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모세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너는 나의 온 집에서 충성 된 자로다. 신실한 사람이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우리 인생에서 이런 성실함에 충성스러움에 결론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이 신뢰하는 의식. 나머지 살아가야 할 인생을 내다보면서 저는 주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이 신뢰하는 의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충성 된 자로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의식, 세 번째 중요한 의식을 존재의 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존재의 의식.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어요. 한 종류의 사람은 소유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 더 많은 소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은 이것은 훨씬 적은 소수이긴 하지만 존재의 가치관,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소유의 인생 가치관에 무게를 두지 않고 존재의 가치관에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적지만 있어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달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서, 더 많은 기술을 소유하기 위해서, 소유, 소유, 소유를 위해서 달려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의미를 찾고 거기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땀을 흘립니다. 소유와 성취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어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드물게는 존재의 가치관 being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인생은 소유로만 따질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을 다 살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저는 이 본문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던 이유가 반드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꼭 다섯 달란트 남겼고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두 달란트를 꼭 남겼기 때문에 주인이 칭찬하셨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남긴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께서 보셨던 어떤 성실함, 그것이 칭찬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칭찬한 내용을 잘 보세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그 quality 칭찬의 quality 그 내용이 뭐예요. 어떤 질적인 칭찬을 했습니까? 착하고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충성스러운 내 종들이여. 또 계속되는 칭찬에 무엇이 있습니까?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어떤 일에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작은 일. 작은 일. 여러분, 제가 한 달란트 받으면 20년을 살 수가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다섯 달란트 가지면 얼마를 살 수가 있어요? 다섯 달란트. 제가 특수 마이크 갖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뒤 돌아볼 수 있거든요. 다섯 달란트 가지면 몇 년 살 수가 있습니까? 100년을 살 수가 있어요. 100년. 100년. 그런데 다섯 달란트 가지고 얼마를 남겼습니까? 다섯 달란트를. 또 100년을 살 수 있는. 이건 어마어마한 액숩니다. 그런데 주인이 어떻게 칭찬합니까? 네가 정말 너에게 맡겨준 어마어마한 것을 가지고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겼으니 너는 정말 어마어마한 종이로다 이렇게 칭찬하지 않았어요. 뭐라고 칭찬했습니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주인 보시기에는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도 작은 일. 크고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큰 일, 작은 일, 위대한 일, 평범한 일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나누죠. 하나님 보시기에는 내가 볼 땐 다 작은 일이다. 니가 국회의원 되는 일 굉장한 일 같지만 내가 볼 땐 작은 일이야. 네가 볼 때 뭐가 되는 일 굉장한 일 같지만 내가 볼 땐 작은 일이야. 다 작아. 중요한 것은 그 작은 일 앞에 얼마나 성실할 수가 있었느냐 그것이 중요한 거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성실히 한 과정이나 성실히 한 태도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그 일 자체, 결론 자체만 강조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어. 이런 사람들은 큰 일이 주어져야만 일을 해요. 큰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만. 작은 일, 내가 그런 일 할 사람이야. 내가 누군데 말이지. 저는 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판단은 그가 차지한 자리나 그가 쓰고 있었던 벼슬이나 감투에서 평가될 것이 아니라 그 감투를 벗고 자리를 벗어 놓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뭐가 남아있을까요? 그가 진짜 그 사람의 모습 이예요.

제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 설교할 때 등장하는 우리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정치가로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을지 몰라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사람의 인격의 무게가,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더 빛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한 기자가 지미 카터의 퇴임 후에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이런 인상 깊은 기사를 썼습니다. 백악관이 목표가 아니었었던 아마도 유일한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백악관이 목적이 목표가 아니었던 유일한 대통령.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세요. 최고의 목표가 뭘까요? 아마 청와대 입성일 거예요. 그러나 백악관이 목표가 아니었던 사람. 백악관은 수단이라는 거죠. 지미 카터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섬김의 한 과정에서 백악관이라는 자리가 주어졌을 따름 이예요. 그러니 백악관 나와도 괜찮은 거예요.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을 다르게 만들지 않아요.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면 돼요. 다른 모습으로 다른 자리에 가서 또 섬기면 돼요. 그는 조지아로 돌아왔어요. 조그만 교회로 다시 돌아와서 거기서 옛날처럼 주일학교 교사를 해요. 한 달에 한 번씩 정확하게 그는 자원 봉사자로 volunteer로서 교회 청소를 로잘린 여사와 함께 정성스럽게 한 달에 한 번씩 교회 청소를 해요. 카터가 어떻게 청소하나 사람들이 많이 구경온대요. 주일학교 어떻게 teaching하나 그것도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대요. 어떤 때는 그 교회는 교인보다 구경꾼들이 더 많을 때가 있다고 그럽니다. 한 달에 한 번씩 헤비 탓 이라는 ministry가 있는데 homeless people을 위해서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집 지어 주기 위해서 망치 들고 가서 집 지어 주는 일을 해요. 또 카터 연구소에 가서 연구도 하고.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나면 지금도 아직도 국제분쟁 지역에 카터를 조정자로 보내달라는 요구가 높습니다. 왜냐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김일성이 죽기 전에 자기가 믿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 카터였습니다. 이 성실성, 이것이 바로 성실성 이예요. 그 사람의 인생관, 어떤 자리가 아니 예요. 벼슬이 아니란 말이죠. 소유가 아니 예요. 그의 존재, 그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날이 갈수록 그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무게는 더 감동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이 존재의 의식, 존재에 가치를 두었던 사람의 모습입니다.

피자 가운데 여러분, 도미노 피자라고 있죠. 한국에 와서는 별로 먹어보지 못했는데 도미노 피자 있죠. 한국에 와서는 저는 주로 미스타 피자만 열심히 먹습니다. 제 동생이 그걸 해 갖고 열심히. 지나가다가 미스타 피자만 보면 찾아 다니는데. 도미노 피자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의 구단주로 있었던 타마스 모네간의 스토리를 제가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업가와 마찬가지로 사업가로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이 사람의 꿈이었습니다. 열심히 사업을 확장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는 땀을 흘리고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근데 자기 인생의 절정에 자기가 중년기를 넘어섰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가 생기는 거예요. 내가 사업을 이렇게 확장하지만 도대체 인생이란 뭘까? 사람이 교회는 나갔던 사람인데 자기 신실한 크리스챤 친구 하나가 책을 준 것이 있는데 C.S.루이스 라는 사람의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책의 한 부분에서 그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침 이 사람은 집을 짓고 있었어요. 27에이커에. 미국에서 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멋있는 집 소위 dream house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집이 거의 절반쯤 지어지고 있었어요. 마침 그 책을 읽다가 충격과 은혜를 받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 내가 미국서 제일 멋있는 집을 짓고 거기 들어가서 내가 산다고 하자 그 다음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는 거예요.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내가 그 멋진 집에서 산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 그러자 자기가 짓고 있었던 드림 하우스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는 갑자기 집 건축중단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 설계를 변경했어요. 그것을 이웃 사람들을 돕고 섬기기 위한 자선 사업을 위한 Institute로 바꾸었습니다. 그것을 재단으로 바꾸었어요. 복지재단으로 바꾸었어요. 그리고 현재에 있는 자기 집을 팔고 더 적은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것이 굉장한 뉴스가 됐습니다. 시카고 트리뷴지 기자와 그 사실을 두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 소감이 어떠냐고. 나는 더 적은 집으로 이사 갔고 우리 회사의 profit은 나의 이런 심경의 변화 때문에 이익은 조금 줄어들 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건 신문에 난 기사예요. 나는 비로소 세상에 태어나서 아 이것이 행복이로구나 라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느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유가 가져다 줄 수 없는 행복을 그는 자기의 존재에서 비로소 그는 소유하기 시작한 것 이예요. 존재를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변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해가 빠르게 지나간 것처럼 인생이 그렇게 빠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인생을 결산할 때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착하고 충성 된 나의 종들이여 너는 작은 일에 충성할 수 있었구나. 내 인생을 걸 수 있는 그 작은 일을 발견했습니까? 그리고 작은 일 그 성취의 자체보다도 그 작은 일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신실한 인격의 변화 그 자체에서 내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결산.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 앞에 드러내야 할 이 신실함의 열매, 충성의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서 준비되고 있을까요?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일어나서 기도할 때 하나님 일년이 다 지나갔습니다.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바쁘게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지나간 일년. 돌이켜보면 일년 동안에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정말 주 앞에서 의미를 느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의 흔적들은 얼마나 될까요? 인생은 빠르게 지나갑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 정말 당신 때문에 내 삶은 가치가 있었고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 그 인생을 위하여 후회할 필요가 없는 성실함의 인생을 위하여 성실하신 주님 바라보고 내 인생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밝아오는 새천년, 정말 비전의 인생을, 의미에 가득찬 인생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받습니다. 지나간 한해를 돌이켜 보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주님 앞에 묻습니다. 아버지 인생이 끝났을 때 주님 앞에 정말 보람 있게 설 수 있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주 앞에 살아가는 자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출처/이동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