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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굴의 기도 (잠 30:1-9)

by 【고동엽】 2022. 9. 29.

아굴의 기도  (잠 30:1-9)

오늘은  아굴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성경에는 축복받은 야베스의 기도도 있고, 치유 받은 히스기야의 기도도 있고,엘리야의 기도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아굴의 기도입니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게실지 모르겠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든지, 히스기야의 기도라든지, 엘리야의 기도라든지 얼마나 놀랍고 다이내믹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나오는 아굴의 기도를 살펴보면 그의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셨다는 말씀은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의 기도가 참으로 보배롭고 귀한 교훈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세속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동기에서 기도하는 것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아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이 있다면 본문 1절에서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야게의 아들이며, 이 잠언의 말씀을 이디엘과 우갈라는 사람에게 전했다’라는 밖에 모릅니다. 물론 학자들은 그가 솔로몬 왕이나 욥이 아니었나 생각하기도 하고, 또는 솔로몬 시대의 시인이나 위대한 도덕가 중의 한사람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굴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또한 그것을 평생 동안 소원하면서 기도하였던 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생 두 가지 기도 제목만을 가지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아굴에게는 기도의 제목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이 기도 제목들이 응답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그의 삶 자체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원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세상 사람들은 대화 몇 마디만 나누어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이나 그의 인격의 정도를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늘 돈을 생각하는 사람은 입만 열면 돈, 돈, 하게 됩니다. 음란한 것이 속에 가득한 사람은 입만 열면 음탕한 말을 내뱉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사랑의 언어가 나오게 되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은 입만 열면 쌩쌩 찬바람이 나와 사람들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의 경우도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기도가 어떤 내용인가를 알게 되면 그의 신앙의 수준과 신앙인격을 대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아굴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으며, 그 기도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아굴은 자기를 낮추면서 아주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2,3절)
본문 2-3절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 아주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말하는 짐승이란 말의 의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 배덕한 자 죄인”을 가르칠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죄 많은 인간, 짐승처럼 자랑할 것 도 보여줄 것도 없는 존재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아주 겸손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 은 지혜도 지식도 없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신앙적 죄인이라고 자기를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욕하고 공격해서 기분 이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굴이라는 사람은 자신을 인정 사정할 것 없이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한번은 무디 선생이 전도를 하러 다니고 있을 때 무디를 시기하던 사람들 증에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이 듣는 중에 이런 모욕을 주었습니다. “무디 선생, 당신은 과거에 구두 수선장이었었죠.” 이는 지나간 날의 직업을 들춰내서 모욕을 주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갑자기 공격을 받은 무디의 표정을 많은 사람들이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디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는 구두 수선쟁이기 전에 구두 방에서 심부름을 했었습니다.”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굴과 같은 기도 자세를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아주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성도라면 아굴과 같은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도 창18:27절에서 자기 자신을 ‘티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을 2/3을 기록할 만큼 훌륭한 인격이나 신학이나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던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서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팔삭둥이](고전15:8), [죄인의 괴수](딤전 1:15),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 15:8에서는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신앙이 깊을수록, 은혜의 밀도가 진할수록 자기의 부족을 강하게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큰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이라는 이름보다는,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헬라식 이름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더 즐겨 사용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거 하기 위해서는 헬라인에게 익숙한 이름인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처럼 고백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자의 첫 번째 자세는 겸손함입니다. 우리도 아굴처럼 짐승과 같이 미련하고 약점과 결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몸가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굴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교만하면 더욱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기도는 듣지 아니하시지만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눅 18:11에서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눅 18:13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리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올바른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아굴처럼 “나는 짐승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도 없습니다.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굴처럼 이렇게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것 그 자체가 무한한 지혜를 얻은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 하늘의 신비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은 아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겸손한 자 그리고 주님을 높이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본문 4절에서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면서 기도했습니다.
아굴이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냐 누가 바람과 물 과 지구의 동서남북을 주장할 수 있느냐”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 외에 누가 우주를 통제할 수 있으며 섭리(攝理)할 수 있느냐? 누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갔다가 내려 온 자가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우리 장로교 교리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데 있습니다. 어떤 교파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나머지 “구원(救援)도 자신이 노력 하고 힘쓰기만 하면 얻는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교는 하 나님에게 모든 주권. 권세와 영광을 절대적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절대자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큰 존재도 없고 비슷한 존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가정에서 가장되는 사람이 아내나 자녀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고 멸시받게 되면 그 가정은 뭔가 잘못된 가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하려면 목사의 권위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나 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존경받지 못하고 교회, 그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 교회는 흔들리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통령이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장로교는 하나님의 권위를 흔들어 놓거나 내려놓는 것을 금합니다. 좋은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자로 전능하신 하나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어떤 이유로도 흔들리거나 깎아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3:13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 40:12에서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 22:27에서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 3:6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본문 5-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부모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활 질서가 캐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취사선택(取捨選擇)하면 그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쓰거나 달거나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편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음식을 가리고 투정하는 것이 좋은 습관이 아닌 것처럼 말씀 투정을 하고 가려먹는 것도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 중에 어떤 것은 순수하고 어떤 것은 불순한 것이 아니라 다 순수하고 순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꾀꼬리 소리보다 더 매끄럽고 공자 맹자의 말씀보다 더 훌륭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믿을 수 없을 때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신임을 받아야 그의 말이 신임을 받게 됩니다. 제 아무리 ‘나는 깨끗하다, 청렴(淸廉)결백하다’고 외치고 보도해도 그의 실제 생활이 청렴결백하지를 못하면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다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아굴은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시편 12장 6절에서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다 다른 어떤 것들을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시 51:4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결코 선입견(先入見)이나 편견을 가지고 대해서는 아니 되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깨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이나 철학을 가하거나 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4:2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22:18-19에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 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록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굴과 같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요 15:7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7절에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간절한 자세를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아굴은 여러 가지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를 기도했는데 이것을 자신이 죽기 전에 응답해 달라고 아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간절한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아주 분명한 기도 제목을 갖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아굴은 정확한 두 가지의 기도제목을 생전에 이루어 달라고 거듭거듭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릴 때 분명한 기도제목 없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무엇을 기도할 것을 먼저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는 것은 좋은 기도의 습관입니다. “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 나의 필요가 무엇인지? 그것이 나에게 왜 필요한지? 내 마음의 소원은 이것인데 하나님도 그것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하면서 기도한다면 중언부언(重言復言) 기도하지 않고 아굴처럼 아주 분명하게 확실하게 기도하되 더욱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는 아굴은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8절 상)
본문 8절 상반 절에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아굴은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굴은 ‘내가 거짓과 허탄으로부터 멀리 떠나겠나이다’라고 기도하지 않고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굴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인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아굴의 고백처럼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입니다. 선을 행할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를 짓고 회개할 때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기도한 놓은 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금 그 죄를 거듭해서 짓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는 결코 성결하고 정직하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굴은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죄악된 생활과 허탄한 생활과 거짓투성이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 도우시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를 알고 있고, 이런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시험에 들고 있습니다. 악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아굴과 같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를 구하시는 분, 나로 하여금 악에서 발을 빼게 하시는 분, 나의 피 묻고 더러운 손을 씻어 주시는 분, 깡패를 바꾸어 목사가 되게 하시고 장로가 되게 하시는 분, 강도를 붙잡아서 성도를 삼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부패한 늪에서 나를 건져 주옵소서! 타락한 실수로부터 나를 건져 주옵소서!
헛된 욕망과 욕구불만으로부터 나를 건져주옵소서! 불신앙과 교만의 성곽으로부터 나를 탈출시켜 주옵소서!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도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세상에 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 요일2:15절-17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허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좇아난 것들이 아니라 세상으로 좇아 온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굴처럼 허탄한 것을 멀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늘 회개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굴처럼 거짓말을 멀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안에 정직한 영을 부어주시사 새로운 창조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정직한 영을 달라고 기도하는 참으로 복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직한 영을 부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결국 성도답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굴처럼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아굴은 물질적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8절 하)
아굴은 본문 8절 하반 절에서 “...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물질적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굴의 이러한 기도는 한마디로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아굴이 가난하게도 말아 달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기도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부하게도 말라는 것은 우리의 기도와 좀 다르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솔직한 심정으로 말해보십시다. 풍족하게 살기를 원치 않는 분이 계시다면 한 번 손들어 보십시오. 아마 저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부하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넉넉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 재산이 많아 보이는 사람도 자기 스스로는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난하게 마옵시고, 부하게 하옵소서!"를 외칩니다. 그런데 진정 무엇을 위해 부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부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를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쁜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방법으로 노력하고 성실하게 부지런히 일하여 많은 것을 얻어 부하게 사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섯 달란트로 열 달란트를 만든 종을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선한 방법으로 얻을 물질을 나를 위해서만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수입을 얻었다고 자기만 배불리 먹고 살지 말고 주님의 사업, 선한 사업, 배고픈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 들이 나누는 삶을 산다면 가난한 자들 의 굶주림은 없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핍절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두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너무 많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를 짓는 부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난은 선한 것이고 부는 악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유함이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유혹할 때에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재물이 많은 고로 결국 주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에게는 주님을 따르는데 물질이 방해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자 청년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을 보시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이기 때문에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부자로 살면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어떤 어리석은 부자가 곡간을 헐고 여러 해 쓸 물건을 비축해 놓고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내 영혼아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그렇지만 이 어리석은 부자를 향하여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리하면 네 쌓아 둔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굴은 어째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말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는 것을 평생의 기도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 9절에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두려워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아굴은 가난하게 되는 것을 소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굴은 만약 너무 가난해도 도적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굴은 너무 부유하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된 것처럼 교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부하게도 마옵시고, 가난하게도 마옵시고”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자족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유하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굴은 이러한 환경 즉 하나님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는 숱한 유혹들의 싹을 잘라낼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가난하게 되면 먹고 살 것 때문에 도적질도 서슴치 않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을 그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아굴의 기도는 세상적인 욕심으로 구하지 않고 그의 평생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인격의 소유자로서 깨끗하게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것을 평생의 기도제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물질이 너무 없어도, 물질이 너무 많아도 범죄 하기가 쉽습니다. 가난과 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저해요인(沮害要因)이 된다면 그건 죄악임을 알아야 자족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굴처럼 "내 믿음의 그릇만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굴처럼 기도하되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마 6:6-9)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 일용할 양식으로만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쌓아놓고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 광야에서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 양식이 만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 나를 매일 아침마다 주셨습니다. 욕심 을 내어 만나를 많이 거두어 그 이튿날까지 남겨 두었을 때 벌레가 생기 고 냄새가 났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남겨 두었을 경우에만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주셔도 더욱 주를 사랑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처럼 부할 때든지 가난할 때든지 일체의 비결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6:7-10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 게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의 사업과 나의 직장과 나의 가정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나의 건강과 나의 사업과 나의 주머니가 주님을 위하여 쓰여 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여! 나는 주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굴처럼 자신을 낮추고 아주 겸손하게 기도합시다.
아굴처럼 하나님을 주권과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높이면서 기도합시다.
아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기도합시다.
아굴처럼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성결하고 정직한 인간이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물질적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는 단회적으로 기도할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사도 바울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주신 말씀처럼 우리들도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결하고 정직한 삶, 범사에 자족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도구들로 온전히 사용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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