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믿음 (창32:22-32)
오늘은 우리교회가 임시예배당으로 자리를 옮겨 첫 주일예배로 모이는 날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신축성전이 완공되기까지 약 1년 6개월 정도 모이게 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이사를 하고 화요일 새벽기도회부터 모이기 시작했습니다만 첫 주일이고 주중에 못 보신 분들도 많을 텐데 한번 주위를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이사를 와서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좋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생각했던 것보다 좋더라도 여러 불편함이 있을 것입니다. 주차와 모임과 예배시간과 교육관이 떨어져 있는 것과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것과 거기에다가 여기가 ‘임시’라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안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성도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뭔가 다른 시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한마디로 ‘믿음의 시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시각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하고, 불편한 것도 참게하고, 어떤 것을 바라보게 하고, 기다리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믿음으로 살던 사람들의 믿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의 족장가운데 ‘야곱’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일까요? 야곱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 포기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야곱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 성경에 나타난 야곱의 생애는 4명의 족장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야곱을 알기 위해서는 야곱의 생애에 잊지 못할 3개의 지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벧엘’과 ‘하란’과 그리고 ‘브니엘’입니다. 본문은 바로 브니엘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소위 얍복강 사건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야곱은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하란에서 20년의 세월동안 낮에는 더위와 싸우고 밤에는 추위를 이기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 결과 많은 물질과 자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꿈같은 세월이 지나갈 때마다 야곱의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갈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뜻이 이루어져 야곱은 온 가족과 종들과 많은 재물을 가지고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고향 땅에 점점 가까이 올 때에 그는 그리움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20년 전 형의 축복을 빼앗은 일로 에서가 복수의 칼을 갈면서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강 하나만 건너면 바로 고향입니다. 찹찹한 심정으로 야곱은 아내와 가족과 종들과 모든 사람들을 먼저 건너가게 하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합니다. 그 광경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야곱의 모습은 끈기입니다. 여기 씨름이라는 것에서 그의 끈기를 먼저 발견합니다. 그리고 ‘씨름’에 해당하는 단어는 보통 씨름이 아니라 일종의 레슬링과 같은 것입니다. 한번 넘어지면 패하는 것이 아니라 이길 때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그 씨름을 밤새도록 했고, 게다가 환도 뼈가 위골되었습니다. 이제 날이 새자 천사는 떠나가려고 했지만 야곱은 그를 쉽게 보내주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를 붙잡았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이것이 야곱의 행동입니다. 밤새도록 씨름하고, 환도 뼈가 위골 되더라도, 천사를 마지막까지 끝까지 붙잡고 축복을 간청하는 끈기 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몇 가지의 비밀코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끈기' 입니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절망하는 마음은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무기력한 심정입니다. 인생은 문제가 많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문제로 인한 절망 때문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죽을병에 걸렸다고 하는 절망감으로 인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끈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영원’이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가 나를 포기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대하고 붙잡는 끈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이런 분이시기에 하나님은 끈기 있는 사람을 참 좋아하십니다. 끈기 있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끈기 있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결국 끈기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에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대역전 드라마'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여리고 성을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너짐의 응답'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요단강에 일곱 번까지 몸을 담갔던 나아만 장군에게 '치유하심'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밤이 맞도록 수고한 베드로에게 '찢어지는 그물'로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비를 내려 달라고 일곱 번까지 간절히 기도했던 엘리야에게 '큰비로 응답'을 주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음이 이미 응답이요, 포기하지 않음이 이미 축복입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결국 '잘 믿는 믿음'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 한다는 것도 낙망치 않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갖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오래 동안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한번 더 기도하십시오. 그토록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다렸는데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힘드십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이 야곱처럼 임할 것입니다. 야곱처럼 이 믿음으로 날마다 나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현실을 수용하는 믿음입니다. 여기 얍복강 사건에서 이것을 아주 유의하여 보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한번 언급했습니다만 오늘 다시 강조합니다. 한번 이 사건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얍복강에서 끈기를 가지고 천사와 씨름하여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얻은 결과는 의외로 환도 뼈의 위골이었습니다. 밤새도록 매달려 생명을 지켜달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그날 밤 하나님은 야곱의 몸을 쳐서 허리를 못쓰게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응답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살려달라고 했는데 불구자로 만들어 마치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간 듯 보입니다. 만약 그날 밤 야곱이 그 상황을 믿음으로 수용하지 못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런 상황을 믿음으로 수용했습니다. 그에게 당면한 모든 현실을 원망과 불평 없이 받아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것이 야곱을 더 좋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가 마친 다음날 야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형 에서가 칼잡이 300명을 대동하고 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동생을 죽이겠다고 폭력배들을 동원한 형이 동생에게 뛰어와서 목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돌려놓았다는 기록이 없는데 어떻게 형의 마음이 한순간에 달라졌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야곱이 20년 동안 모은 재산으로 보란 듯이 비단옷을 입고, 기름기가 흐르는 유들유들한 모습으로 나타났더라면 야곱은 그날 여지없이 에서의 칼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에서는 분명 그런 모습의 동생을 생각하고 쫓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의 몰골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밤새워 무릎 꿇고 기도하느라 옷은 구겨질 때로 구겨져 있었고,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으며, 얼굴은 초췌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은 허리를 피지도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야곱을 처음 본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형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를 보는 순간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야곱을 보면서 왜 어린 시절의 사랑이 회복되지 않았겠습니까? 함께 물장구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왜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혈육의 정이 아닙니까! 에서는 그런 동생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환도뼈의 위골로 몸이 망가진 것, 허리가 굽어진 것, 그것은 고통이나 벌이 아니라 야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것은 야곱에게 준 근심거리가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당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에서를 만나면서부터 그 문제가 풀어진 것입니다. 믿는 자는 모든 현실을 수용하는 믿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 삶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난의 때에는 더욱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종종 당하는 고난은 마치 실패 같고, 절망 같고, 처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면, 잠깐의 시간만 흐르면 왜 이렇게 하셨는가를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세상에 악한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것, 좋은 길로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현실만 보고 상황이 어렵다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현실만 보고 원망할 일도 더더욱 아닙니다. 받아드려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근심이 있고, 걱정이 생길 때, 고난이 오고 아픔이 다가올 때 먼저 당면한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삶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내 마음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안에서는 언제나 플러스만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근심이 사라지고, 걱정의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이름이 바뀌는 믿음입니다. 본문 27절을 보시면,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다가 새벽에 그 사람이 떠나려고 하자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어 달립니다. 자기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천사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기었음이니라”
얍복강에서 야곱은 그의 이름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고, 나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야곱 개인의 생애는 물론, 민족과 나아가서 성경을 대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개명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얍복강, 브니엘의 기점으로 야곱은 이름과 함께 그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얍복강에 이르기 전까지 가졌던 야곱의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 훔치는 자’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수없이 사람을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벧엘의 감격을 경험한 뒤에도 여전히 그는 야곱이었습니다. 옛사람, 옛 모습, 옛 생각, 옛 습관, 고정관념, 아집, 자기 틀이 견고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말도 거칠고, 생각도 바뀌지 않았고, 물론 행동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제 야곱은 더 이상 속이지 않습니다. 속을 지언정 결코 이제 더 이상 속이지 않습니다.
얍복강은 야곱의 생애에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곳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날 밤새도록 기도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환도 뼈가 위골되어 형의 칼날을 극적으로 피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가 거기에서 이름이 바뀌었고, 삶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서 가장 돋보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믿음이 있다면 바로 야곱과 같이 달라지는 믿음, 바뀌는 믿음, 변화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은 뒤에, 이제 내 생각이 달라지고, 말이 바뀌고,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경책만 끼고 다닌다고 참 신자가 아닙니다. 예배만 드린다고 내 할 일 다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성수를 한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일이 한 주간의 시작이 되는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재충전하고, 힘을 얻고, 위로와 용기를 갖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빛처럼, 소금처럼 살아야 합니다. 변질되어 가는 세상에, 변화의 주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이요, 균형 잡힌 믿음이요, 완성된 믿음입니다.
특히 오늘 이 임시예배당에서 첫 번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다짐할 부분입니다. 교회건물만 크게 세운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건물만큼 우리의 삶도 신앙도 아름답게 준비해야 합니다. 새 옷을 입는다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가 새사람이 아니라면 새 옷은 의미가 없습니다. 새 성전에 맞는 새사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변화의 기점이 새 성전이 완공된 이후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지금부터 해야 합니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새사람의 모습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버릴 것 버리고, 취할 것 취하고, 갖출 것 갖추고, 세울 것 세워야 합니다. 그 믿음을 다짐하며 야곱처럼 달라진 자로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야곱처럼 얍복강에 서있습니다. 야곱이 씨름하던 곳은 거친 들판이 아니고, 메마른 사막도 아닙니다. 강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촉촉이 적시는 은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야곱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십시오. 포기하지 않는 믿음, 현실을 수용하는 믿음, 그리고 이름이 바뀌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한 주간도, 우리의 남은 생애도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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