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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이 되리라 (창 12:1-9)

by 【고동엽】 2022. 9. 28.

복의 근원이 되리라   (창 12:1-9)


6.25종군기자로 플리쳐 상을 받은 히긴스 기자는 콩을 심고있는 해병대 병사에게 묻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나에게 무엇을 요청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Give me tomorrow라고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일이 없는 사람, 미래가 없는 사람, 소망이 없는 사람, 꿈이 없는 사람, vision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죄로 타락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꿈과 비전을 주는 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너는 그럭저럭 사는 인생이 아니고 뭔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유익을 주고 평화의 도구로, 복의 근원으로 살도록 내가 택했다는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좇아가는 아브라함을 약속대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살게되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희랍사람들은 인간을 가리켜 안드로포스라고 했고, 그 의미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 희망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현재 나의 상황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동트는 새아침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꿈이고 소망입니다.

사람은 본래 복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만든 복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주가 없는 에덴동산에서 멋지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귀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 사람은 복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의 숲에 피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거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부터 우리 인간은 슬픔과 실패와 탄식과 저주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인 니므롯은 바벨탑을 쌓아서 이름을 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해서 더 이상 바벨탑을 쌓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부터 또한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복을 누구에게 줄까?"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에서 사는 아브람을 찾아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우상을 만들어 판매하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서 살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대단히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람을 찾아가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실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복을 받을 수 없는 자리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칠십 오세였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 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시작은 떠나는 것이요, 믿음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떠나라, 가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갈대아우르를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라는 명령입니다. 헌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나야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임직자 들에게 부탁합니다. 김성일 제직은 제직에 자리를 떠나 집사의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유경용, 원도희, 조만영집사는 집사의 자리를 떠나 장로에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민족의 조상이 될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며 오직 믿음으로 산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근원이란 시작이요 출발점입니다. 복의 근원이란 복의 시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어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말씀이 인생을 이루어 가는 것이 복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씀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되었으며, 우리는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씀을 좇아갔습니다(4).
"이에 아브람이 말씀을 좇아갔고"아브라함이 주님에게 보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온전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었고, 또한 그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4:17절 이하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람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바랄 수 없었다는 것은 자기 나이가 백세가 되었고 자기 아내 나이가 구십 세가 되었으며,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으므로 생리적 방법, 과학적 방법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의 의미 중의 하나는 기능상실입니다.

계속 재깍재깍 가던 시계가 갑자가 멈춰 섰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계가 죽었네 하고 말합니다. 그것은 시계의 기능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할 수 없으면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남자가 남자 구실 할 수 없고, 여자가 여자 구실 할 수 없는 상태를 바울은 죽은 자란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브람은 그렇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과학을 초월하며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에 맞는 만큼만 믿는 소위 지적인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즉 경수가 끊어진 여자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는 아브람의 믿음, 그 믿음이 결국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기를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이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니 네 씨가 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네 아들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 말을 준행 하였음이라"(창22:16-18).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수24장).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고 크게 은혜를 입고 큰 일꾼이 되려면 아끼지 않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지난11월19일 양천구민회관에서 방글라데시 결식 아동 돕기 예수 찬양제를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이 일은 이 은숙자매의(그리스도신학대학교 음대교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지난주 월요일 평가회를 가졌습니다. 약700만원의 선교헌금이 모았습니다. 저는 이일을 주관하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하려고 할 때 결정하기 전까지는 갈등이 있습니다. 양자택일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것이냐?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욕할 것같고, 사람의 비위를 맞출 것이냐, 그러면 하나님이 싫어할 것 같아서 중간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때가 혹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성이 강하고 깨어있을 때에는 언제나 주의 음성이 들리면 곧바로 순종할 수 있지만, 영성이 약해지고 믿음이 희미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비유를 맞추는 쪽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4절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실천하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활기차게 발걸음을 옮겨서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즉각적이었습니다. 뒤로 미루지 않고 자기를 일으켜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그가 가는 길은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는 길이었습니다. 말씀을 좇아가면 진정 나를 위하는 길이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가 말씀을 좇아가므로 수많은 사람이 복을 받게 했습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왜 그 땅에 그냥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복 주시지 않고 떠나라고 했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악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지역은 어떤 지역입니까? 그곳은 시날 평지가 있었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바벨탑을 쌓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우르라고 하는 곳은 스메루 문화의 중심지로서 나나라고 하는 달신을 많이 섬겼던 우상숭배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죄악을 떠나라는 뜻입니다.

또 본토를 떠날 뿐 아니라 친척도 떠나라는 것입니다. 친척은 피로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떠나라고 하는 것은 우상문화에 빠져 사는 데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척을 떠나라는 말씀보다 더 힘든 것은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아비 집, 그곳이 어떤 곳입니까? 직계입니다.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모든 소유와 재산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그 동안에 정들어있던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와 함께 하겠고, 너를 새로운 민족의 조상으로 세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된 것은 과거에 예수 님을 알지 못했을 때 세상 것을 좇았던 그 가치관에서 예수 님을 얻고 난 이후에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라 생각해서 버렸기 때문에 주님이 온전히 그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18절 에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버린 만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이 살아온 본토, 수십 년 동안 함께 어울렸던 일가친척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자라온 부친의 집도 버리고 하나님이 가라하는 곳으로 갈 때 아브람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어디로 가십니까? 하나님이 나더러 본토를 떠나고 친척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해서 나는 하나님이 가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랬을 때 미쳤구만. 그런 비방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분명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이 본토에 있지 않으며 친척에 있지 않으며, 아비 집에 있지 않고 나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만이 만복의 근원임을 믿었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죄악에서 돌아설 때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서화목교회성도들이여!!! 믿음으로 말씀 따라가며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예배에 열심이었습니다(7,8)
7절에 아브람은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절에서는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의 근원은 예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배가 필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역사적 현장에서 찾고 싶은 것입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제단을 쌓을 필요가 있을까요?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왜 단을 쌓았는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그 동기를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7절“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자“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단을 쌓는 아브람의 마음은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5절에“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 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라함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달했습니다. 성경이 간단히 말하지만 아브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이 필요했습니까? 천신만고의 그 여행을 통해서 마침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마침내 제가 약속의 땅에 도달했군요. 그러나 가나안 땅에 도달했지만 가나안 땅이 저절로 아브라함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이제부터 자기의 땅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7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내가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자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믿었을 때 아, 정말 이 땅이 내 땅이 되는구나!“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땅을 주시는 군요.”그래서 아브람이 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 제단은 감사의 제단입니다. 감사의 표현으로써 그 제단이 쌓아졌고 아브람이 주 앞에 나아갔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우리가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진지하게 성경공부도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날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게 다 나를 위한 약속입니다. 풍성한 삶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생명을 준다. 영원한 생명을 준다. 풍성한 생명을 준다. 이 땅에서의 약속, 그리고 우리의 삶이 다할 때 저 영원한 천국에 대한 기업의 약속. 우리가 이 약속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떤 심경일까요? 감사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주님을 향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때 그 감사의 심경을 제단을 쌓고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처럼 오늘 동일하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이 감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승리의 삶을 위하여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6절에“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성경의 기자는 아브람이 지금부터 직면해 가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절의 마지막 부분에“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다”이 표현이 왜 등장했을까요? 아브람이 약속된 가나안에 왔지만 그 땅이 저절로 아브람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그 땅을 선점하여 살고 있었던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래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 그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왜 이 사실을 말합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이제부터 그 땅을 자기의 땅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일전이 불사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위축 됐을 것입니다.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랬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다시 7절을 읽어보겠어요.“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이것은 아브람이 어떤 의미의 약속으로 들려 왔을까요? 이 땅은 네 땅이 될거야. 염려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듣고 아브람이 뭘 했습니까? 단을 쌓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틀림없이 도와주시겠구나. 이 약속은 승리의 약속이었습니다. 예배란 주님을 향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능력의 삶, 승리의 삶을 위하여 아브람이 이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살려면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을 구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러분! 오늘 이 험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도전과 스트레스와 그리고 많은 압박에 직면하고 있는 여러 분이 이 땅에 살면서 어디에서 능력을 얻습니까? 어디에서 힘을 얻습니까? 저는 그것이 예배의 자리라고 믿습니다.

예배가 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내가 예배 나올 때만 해도 좀 처진 모습으로 힘없이 나왔지만 우리가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또 기도를 드리면서 내 마음을 쏟아 내고, 그리고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새 힘을 얻습니다. 예배 끝나고 나갈 때 어떤 심정이 듭니까? 예배 끝나고 나갈 때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여전히 처진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예배 참석하고 달라졌습니다. 변화됐습니다. 새 힘이 생겼습니다.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하나 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삶을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새로운 능력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얼굴이 확 펴지면서 그래, 주님이 함께 하셔. 다시 일어나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할렐루야!’저는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배가 살면 우리 인생이 산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한번 따라 해 보세요.“예배가 살면 인생이 산다”예배가 살아나야 내 인생이 살아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디에서 위로를 받습니까? 어디에서 새 힘을 얻습니까? 어디에서 꿈을 꿉니까?

소양강 댐에 물을 채우는데 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7년 동안은 물을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받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고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고 나서 헌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가 강물처럼 넘치면 어떠한 시험과 환난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찬송과 기도 그리고 말씀이 은혜입니다. 은혜 받은 자는 위기에도 강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 받고 말씀을 들어야 꿈꾸는 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과 우상숭배자들 앞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보든지 무어라고 비난하든지 개의치 않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신앙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가족뿐 아니라 318명이나 되는 훈련된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미국 메사추세츠 뉴샴푸턴에 조그만한 오두막집이 있습니다. 이 집 문 앞에는 '이 집은 미국역사를 새로 만든 위대한 집이다' 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오두막집은200년 전 죠나단과 사라 부부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12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후손 중에 부통령1명, 13명의 대학총장, 3명의주지사, 3명의시장, 149명의 변호사, 48명의 판검사, 116명의 목회자와 선교사, 66명의 대학교수, 75명의 사업가, 25명의 발명가, 82명의 차관급 공무원, 68명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역사 학자들이 그 가문을 조사했습니다.

죠나단과 사라 부부는 첫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가정. 둘째, 하나님을 뜨겁게 사모하고 열정이 있는 가정, 셋째, 고난 때 기도하고 응답 받는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아브람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아브람의 가정처럼, 죠나단 가정처럼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브람의 가정처럼 복의 근원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믿음은 마음에서 행동으로 생각에서 입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내면의 영적인 감정이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고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와 예배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장막이 있는 곳은 어디서나 기도의 제단에 의해 신성해지게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고백 할 수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예배가 살면 내 인생이 삽니다. 예배란 주님을 향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능력의 삶, 승리의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셋째, 아브람은 사람을 이끌었습니다(4,5).
4절에 보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하였고 5절에도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보니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을 알게 하고 싶어집니다. 아브람은 가족, 조카 그리고 여러 일꾼들을"이끌고 가나안 땅으로"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하는 일입니다. 지금 사람을 이끌고 계십니까?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십시오. 그러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나면 주위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그들을 유익하게 하고 싶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불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자를 개종시키게 됩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 사람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고 보니 사람을 이끌게 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싶고, 하나님을 섬겨 복을 받게 만들고 싶어집니다. 믿어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게 하고 싶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주님께 이끄는 일이 곧 관계전도입니다. 예수 님이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가실 때의 행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4:4) 왜 사마리아로 통해하여야 했느냐? 수가라는 동네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 길러 나온 그 여자를 만나 "물 좀 달라"고 하시고 그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여인을 이끄시고 그 여인으로 하여금 수가성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끌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 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겠노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요12:32,33). 땅에서 들린다는 말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이끌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예수 님은 십자가를 지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이끌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 해야합니다. 투자해야 합니다. 시간을 쓰고, 마음도 쓰고, 물질도 쓰고, 눈물도 써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좇아가며 복의 근원이 되시고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이끄는 사람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예배를 통해 복의 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살아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영적 스릴을 느끼며 영적 경영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비전이 있다면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그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심는 대로 거두고 수고한대로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자연법칙을 따라서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꿈의 성취라는 달콤한 열매는 꿈의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가면서 혼자서만 가지 않고 사람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관계전도는 붙들어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겨냥해서 이끄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전도하여 양육하면 배가에 배가를 이루어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사람씩 누군가를 이끌어야 합니다. 예배에 철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서 화목교회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집사로, 장로로 임직 받는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복의 근원이 되어 삽시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 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처/원영희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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