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람 (로마서 8:5~11)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좇아서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영으로 자기의 육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하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공원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있었습니다.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벌은 큰 아이의 얼굴 주변을 맴돌면서 윙윙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이는 무심결에 손을 들어서 벌을 떨쳐내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벌은 갑자기 큰 아이의 눈언저리에 따끔하게 침을 쏘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아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손으로 쥐고서 아파 죽겠다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은 성에 차지 않는 듯이 이번에는 작은 아이의 얼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지레 겁을 먹고서 아버지 뒤에 숨었습니다.
"아빠! 벌이 나를 물려고 해요. 살려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작은 아이를 토닥거려주면서 이렇게 달랬습니다.
"얘야, 겁먹지 말아라. 이미 저 벌은 네 형을 쏘았기 때문에 그 벌에는 더 이상 침이 없단다. 너를 쏘려고 해도 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큰 아이의 얼굴에 박혀있는 벌의 침을 뽑아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작은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아라. 여기 벌의 침이 있잖아! 저 벌이 너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침으로서 너를 해치지는 못한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침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침을 이미 쏘아버렸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침을 쏘았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침을 이미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망의 침으로 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55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의 모든 요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되 어떤 모양으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그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또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기만 하시라고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본을 보여주라는 단순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만 하셨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되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그 아들 예수님의 몸에 죄를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가운데 죽는 모습을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광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하셨을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너무 아파서 찢어지는 듯 하셨을 것입니다. 땅이 진동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며 죽으시는 모습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도 고통 속에 떨리셨을 것입니다. 바위가 터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도 터지는 듯한 아픔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일을 통해서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바울은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더 이상 육신을 좇아서 살지 말고, 영을 좇아서 살라는 것입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육신의 삶을 살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사망입니다. 우리가 영을 좇아서 영의 일을 생각할 때, 그 속에는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우리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6:3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영을 좇아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평탄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형통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의 일에 치중하지 말고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때였습니다. 그때 서부 캘리포니아의 여러 곳에서 엄청난 사금이 채취된다고 하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에 동부에 있는 백인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서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길도 좋지 않았습니다. 또 자동차로 달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서 가족들을 태우고 말을 메어 달렸습니다. 몇 달을 가야하는 먼 거리였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가야지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금을 캐어 벼락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 가운데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의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도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기대 속에 자기 가족들과 함께 마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다가 주일이 되면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개울가나 숲속을 찾아가서 그곳에 짐을 다 풀었습니다. 그런 뒤 그는 가족과 함께 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일만큼은 말씀 그대로 주 안에서 안식을 취했습니다.
그의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 저러다가 언제 서부에 도착하려고 저러나? 아마도 저 가족이 도착할 때쯤이면 미리 도착한 사람들이 사금을 다 캐내 가버리고 말거야!"
남들이야 비웃던지 말던지 그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꼭 멈추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 엿새 동안은 그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와 그의 가족도 무사히 캘리포니아 목적지에 당도했습니다. 그는 자기들과 함께 출발한 사람들은 이미 다 도착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함께 출발한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와 그의 가족이 제일 먼저 당도한 것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던 사람들은 중간에서 다 병들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말도 지쳐서 쓰러졌습니다. 사람들도 골병이 들어서 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차도 다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영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영을 좇아 영의 일을 생각합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둘째로, 왜 우리가 육신의 일을 생각해서는 안됩니까?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는 정상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8절 말씀을 보십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7∼8절의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될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나니 이는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즐겨 굴복하기 때문이니라. 그 결과 영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계속해서 육신의 생각에 얽매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으로 영의 일을 생각하도록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남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부친은 그 교회 장로님이셨고 모친은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사업을 잘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 생활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그는 영의 일보다는 육의 일에 치중했습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도 거래처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장에 가서 골프 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에서 안수집사 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사자는 별 볼일이 없었지만 장로님, 권사님이신 그의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교인들은 그를 안수집사로 뽑아 주었습니다. 그랬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일에만 늘 분주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손을 드셨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몸져누웠습니다.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보았습니다. 위암 3기였습니다. 의사는 그의 배를 갈라보았습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다시금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생명이 까물까물 꺼져갑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흐느끼면서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장로님, 권사님의 부모님을 주셨고 나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하셨건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구나! 이 형편없는 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쓰시겠다고 안수집사로 뽑아주셨건만 그래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정신차리지 못했구나.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 육신, 내 영혼이 둘 다 지옥에 떨어질까봐 하나님은 내 육신은 불러 가시고 내 영혼은 구원해 주셨구나! 얘들아, 너희들은 어찌 하든지 예수님을 잘 믿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라. 그럼 우리 모두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그의 장례식 때 그의 육성이 녹음기를 통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흐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의 사람처럼 육신의 생각에 골똘할 때, 우리를 쳐서라도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시련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까닭입니다. 영의 사람으로 바꾸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육의 생각을 영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영의 생각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랍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삶을 가르쳤습니다.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나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셨더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못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두 가지가 서로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은 "영"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은 것"은 "산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무엇을 택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몸이 아니라 영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 곧 부패한 육신의 행실을 좇아서 살아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인하여 산 것, 곧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11절 말씀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변화가 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육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는 육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일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겨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영과 육의 갈등 속에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육의 사람처럼 육신의 일에 치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948년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세계 각국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다 모였습니다. 첫날 개회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의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강단 앞에 큰 관이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꽃들로 주변을 장식했습니다. 누군가의 장례식을 치르는 광경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곳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누가 사고로 돌발적인 죽음을 당했구나! 그래서 갑자기 이 시간에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구나!"
드디어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모든 사람이 한 줄로 서서 관속에 있는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관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사람의 시체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큰 거울이 하나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관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누구의 모습을 쳐다보았겠습니까? 각자가 자기의 얼굴을 쳐다본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었겠습니까? 이제 그들은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각자의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 육신의 일들은 장사지낸바 되어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날 있었던 각자의 장례식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때 산적해 있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아무런 잡음 없이 아주 쉽게 처리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잠시 잠깐의 세상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의 행실에 따라서 살려고 하지 맙시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을 좇아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생명이요, 평안입니다.
출처/박상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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